침몰했던 세월호가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23일부터 시작한 세월호 인양은 '복병'이던 램프 절단 작업이 끝나 선체 측면이 또렷하게 보이면서 '8부 능선'을 넘어서게 됐다.

사건당시 세월호 이준석 선장

세월호 선체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 배의 선장이었던 이준석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는 세월호가 침몰했던 비극의 날, 물이 차오르는 객실에서 단원고 학생 등 승객 300여 명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자리에 가만히 있어라"라는 선내 대기 명령을 내린 채 혼자 배를 버리고 빠져나왔다.

지난 2015년 대법원은 이 씨의 이런 행동이 살인죄에 해당한다며 무기징역형을 확정했다.

선박 침몰 등 대형 인명사고에서 책임자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것은 살인과 똑같다는 이른바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 판결을 처음으로 내린 것이다.

그는 현재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고 현재 순천교도소에서 무기수로 일반 수감자들과 같은 감방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노역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큰헤이드호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이후, 세간에 영국 해군의 수송선 '버큰헤이드호'의 시드니 세튼 대령의 일화가 회자됐다.

1852년 영국 해군의 수송선 '버큰헤이드호'가 승조원과 그 가족을 태우고 남아프리카를 향하여 항해하고 있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모두 630명 그 중 130명이 부녀자였다.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으로부터 약 65Km 가량 떨어진 해상에서 배가 바위에 부딪쳤다. 시간은 새벽 2시. 승객들은 잠에서 깨어나면서 선실에는 소란이 일어났다.

사고 당시 승객은 630여명, 구명보트는 단 세척, 승객의 반도 안 되는 180명밖에 구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함장 시드니 세튼 대령은 전 병사들에게 갑판 위에 집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함장의 지시에 따라 마치 아무런 위험도 없는 훈련처럼 민첩하게 행동하여 부녀자들을 3척의 구명정으로 하선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구명정이 그 배를 떠날 때까지 갑판 위의 사병들은 관함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구명정에 옮겨 타고 생명을 건진 부녀자들은 그 갑판 위에서 의연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다. 결국 시드니 세튼 대령을 포함한 436명의 군인들은 그대로 배와 함께 수장됐다.

누구나 명령대로 움직였고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 명령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모두가 잘 알면서도 마치 승선 명령이나 되는 것처럼 철저하게 준수했다

이후 ‘버큰헤이드호 전통’은 각종 해상 사고에서 불문율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이준석 선장의 세월호 침몰 10년 전인 2004년 1월 1일자 제주투데이와의 인터뷰 기사내용이다.

그는 “고향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여객선으로 실어 나르며 내가 누리지 못하는 행복한 시간을 그들은 가족들과 누릴 수 있게 하는데 위안을 얻는다”라며 오늘도 내일도 배와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제주~인천노선 왕복여객선 청해진 고속훼리 1호 선장이었던 이 선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보다 배와 함께 보낸 시간이 많다”면서 “배에서 내릴 때면 섭섭한 마음에 다시 한 번 배를 쳐다보게 된다”며 배에 대한 소회를 피력했다.

그는 또 “처음 탄 배가 원목선이었는데 일본 오키나와 부근 해역에서 배가 뒤집혀 일본 자위대가 헬리콥터를 이용해 구출해 줬다”며 “그때 만일 구출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2004년 1월 1일 지면을 통해 “오늘도 내일도 배와 함께 하겠다”는 이준석 선장의 말은 10년 뒤인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공허한 외침으로 함께 사라져 버렸다.

1073일이 지난 2017년 3월 24일, 바다에 침몰했던 세월호가 순조롭게 인양되고 있다.

배를 버리고 도망친 이준석 선장, 그리고 배에서 운명을 달리한 사망자 295명과 아직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 9명, 그들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하루다.

2004년 1월1일자 제주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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