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제주4.3평화공원에 마련된 묘역에 희생자 유족들이 비석에 적힌 고인의 이름 앞에서 간단히 제를 올리고 있다.@김관모 기자

4월 3일의 아침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늘 거세게 불기 일쑤였던 바람조차 숙연해진 시간, 제주4·3평화공원으로 많은 유족과 참배객이 모여들었다.

평화공원에 마련된 묘역, 유족들은 고인의 이름이 적힌 비석 앞에서 국화꽃과 술잔을 올리며 절을 올렸다.

69년이란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그때의 슬픔, 눈물은 유족들에게는 전혀 빛바랜 기억이 아니었다. 여전히 말 못한 이야기가 많았다.
 

상처와 그리움은 여전하다

고 강기규 씨와 강위영 씨의 유족인 오순주 할머니가 고인의 이름을 짚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김관모 기자

아버지를 여읜 오순주 할머니는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마음에 담긴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었다.

“이제 지난일 더 이야기해서 뭐 험니꽈. 그만 허영 가 마씸”하는 친척의 만류에 오순주 할머니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다시 주저앉았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비석에 올려진 희생자의 이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친이신지를 여쭙자, 할머니는 애절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오순주 할머니의 부친 강규빈 씨는 1948년 12월 토벌대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 슬픔이 끝나기도 전, 당시 막내 오빠였던 강위영 씨가 1950년 6월 27일 군인들에게 끌려가 행방이 묘연해졌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자주 울었다는 막내 오빠 이야기를 하며 오순주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강위영 씨는 실제 행방불명인이지만 묘역에는 사망으로 오른 상태. 행방불명으로 바꾸고 하루라도 빨리 오빠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내야 한다며 할머니는 기자를 붙잡고 하소연했다.

이런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오순주 할머니 한 분 뿐일까.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희생자 명단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도 많으리라. “혹시라도 알게 되면 꼭 알려달라”는 부탁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꼭 그리 하겠다”는 기약없는 약조만 드리고 인사드려야 했다. 
 

“이제는 다 만족하지, 만족”

강용쟁 할머니(왼쪽에서 세번째)가 동네친구분과 함께 행사장 뒷편 풀밭에서 점심식사를 기다리고 있다.@김관모 기자

“이제는 하도 오래 돼서 다 잊어버렸어. 어려서 일어난 일이라 기억도 잘 안 나고……”

남원2리에서 사신다는 강용쟁(85세) 할머니는 추념식장 뒤편 풀밭에서 점심 도시락의 밥 한술 뜨시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4․3 당시 15세 여학생이었던 할머니는 집에만 숨어있어서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른다고 했다. 그저 막연히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할머니의 큰 아버지는 당시 표선리에서 보초를 서던 군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산사람들에게 총과 칼로 무참히 살해당했다고 했다. 나중에 결혼하고 보니 시아버지도 4.3사건에 연관되어 군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고.

이후 강용쟁 할머니는 표선리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남원리에서 보리와 유채를 일구면서 연명했고, 1980년대 이후에는 밀감을 재배하면서 살아왔다고 했다. 그나마 이제 나이가 들어 일은 자손들에게 맡기고 노년을 지내고 있다.

“좋은 일하고 있다”며 웃으면서 기자의 질문에 답해주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무섭고 험한 70년 세월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마음만 느껴졌다. ‘이제는 여한이나 아쉬움 같은 것 없으시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이제는 다 만족하지, 만족”이라고 웃으면서 답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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