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수영(王秀英. 79) 재일동포 여류시인의 "일본살이(부제 일본사람, 한국사람, 교포사람)" 에는 모두 81편의 수필이 게재되었다.

그중 두 편 전문을 소개하겠다. <이바라키 노리코>라는 수필이다.

윤동주의 시를 처음으로 일본어로 번역하여 소개한 사람은 여류시인 이바라키 노리코(茨木のり子. 80)이다.

그녀는 아사히문화센터에서 공부한 한국어 실력으로 윤동주의 시를 번역하였는데 동기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사진에서 본 윤동주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농담을 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윤동주를 추모하는 모임은 일본국내의 여러 곳에 있으며 시낭독회도 회를 거듭하면서 팬이 늘고 있다. 한국어를 마스터하고 나서 간행한 이바라키 시인의 <한국현대시선(1990)>은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6년 뇌동맥 파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시인의 말년에 쓴 시집 <기대지 않고>는 15만부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시집으로서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웠다.

"오래 살면서 깨달은 것은 기존의 사상이나 종교나 학문이나 어떤 권위에도 기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귀와 눈과 두 다리로 서 있다가 육신이 쇄약해지면 그때는 의자에 기댈뿐이다."는 라는 취향의 시다.

또한, 대표작 중의 하나인 "자기의 감수성 정도는"이라는 시는 많은 이들이 벽에 부딪혀 막막하고 용기를 잃었을 때 힘을 주는 시로 인기가 높다.

메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으로 하다니/스스로가 물 주는 것을 게을리 해놓고/깐깐해진 성품을 친구 탓으로 하다니/상냥함을 잃은 건 어느 쪽인가/안절부절 하는 걸 근친 탓으로 하다니/모든 건 내가 서툴러서인데/초심을 잃어가는 걸 세월 탓으로 하다니/의지가 약한 자기 탓인 걸/잘못되는 모든 것을 시대의 탓으로 하다니/반짝 스치는 존엄의 포기/자기의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이 바보 천치야

2차대전 종전 이후에 쓴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때"라는 시는 전쟁의 분노를 서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서 여러 교과서에 게재되어 있다.
그녀의 시는 작고 후에도 일본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여러 권의 수필집도 끊임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바라키 시인과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어 가끔 만나서 식사를 하는 사이였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그녀는 베비 스모커로, 내 차로 자택까지 데려다 줄 동안을 참지 못하고 차를 세우게 하고는 내려서 담배 두 대를 연달아 피웠다.
시인이 작고한 후에 유서가 발견되었다. "장례식이나 작별회도 필요없으니 어는 순간 아! 시인이 떠났구나 라고 생각해 주면 된다."라고 적혀있었다.
매력적이고 멋있던 시인을 이제는 나의 앨범에서만 만나 볼뿐이다. 이바리키 시인을 만나면서 내가 쓴 윤동주에 대한 시가 있다. 

이국땅 일본 감옥에서 젊고도 젊은/윤동주 시인이 목숨을 걷우었을 때/시인을 지켜준 하늘과 바람과 별은/대한민국의 하늘과 바람과 별이었고/타향살이 서러운 눈물을 훔쳐주는 바람도 윤동주 시인의 손길입니다/지금은 일본사람들의 가슴에 되살아나/곳곳에서 시인을 기리는 모임으로/그들은 죄값을 치루며 무릎 끓고 고개 숙입니다  (시 일부)

다음은 <외국인>라는 수필이다.
우리 집 가까이에 미니코스 골프장이 있어 한 달에 서너 번은 라운드를 한다. 혼자 라운드 할 때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끼리 함께 어울리기도 한다.

언젠가 함께 코스를 돌면서 자기는 재일동포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통명(일본이름)을 사용한다면서 고오노 씨라고 했다.

"작년에 처음으로 아버지 나라에 갔다왔습니다."라고 나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감동적인 그의 표정이 인상에 남았다.

고오노 씨를 지난 주에 골프장에서 또 만났는데 언제나 그와 함께 오는 일본인 친구도 낯이 익어서 인사를 하고 나서 고오노 씨에게도 말을 걸었다.

고오노 씨에게는 한국말로 "부모님들은 안녕하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일본인들과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나에게 한국말을 하지 마세요. 내가 한국인이란 걸 저 사람들은 모릅니다."라고 했다.

"그래요?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여기서 만나게 되어도 일본어로만 얘기할께요.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나는 사죄를 했다.

몇 년 전이라면 이런 경우 사죄는 커녕 욱박지르고 재일동포에게 자부심을 가지라고 심하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많이 변했다. 어쩌면 내가 변한 것이 아니고 시대가 변했다고 할 수있다.

물론 조국을 내세우고 우리말을 고집하고 본명을 되찾고 열렬한 애국정신도 좋은데, 나는 삼십년을 넘게 일본에 살면서 이제야 재일동포들의 뼈아픈 역사를 가슴에 새기며 그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본국에 사는 국민은 재일동포의 이러한 심정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고오노 씨의 경우처럼 아직도 끈질긴 역사의 밧줄에 묶이어 살고있는 동포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이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한다.

굴프가 끝나고 일본인 두 사람과 고오노 씨와 함께 골프장 내의 식당에서 차를 마셨는데 옆 테이블에 서양사람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자 고오노 씨의 친구인 알본사람이 "지난번에 함께 라운드했던 외국인이군요."라고 하면서 "이 골프장에는 가끔 외국인도 온답니다."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나도 외국인데요?"라고 했더니 그 일본사람은 웃지도 않고 "당신은 한국인이지요."라고 했다.

"그러니까 한국사람인 나도 외국인이라니까요."라고 내가 퉁명하게 말하니 "한국인을 외국인이라고 하니 이상하네요.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우리와 얼굴이 다름없으니 외국인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한국인 중국인라고 하지요. 파란 눈이나 노랑머리나 검은 피부의 사람을 외국인이라고 하지만."

고오노 씨가 내 눈치를 보다가 끼어들었다. "일본인은 한국사람이나 중국사람에게 친근감을 느껴서 그렇지요."라고 하면서 계면쩍어 했다.

나는 그날 밤에 고오노 씨를 생각하고 또 우리동포를 생각하면서 몹시 마음이 아팠다.
이상 두편의 수필을 소개했는데 왕수영 시인의 수필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일본에 대한 생활상들을 재판 삼판으로 찍어낸 인상을 주는 작품과는 그 내용이 달라서 식상하지 않는다.
물론 81편의 작품 중에는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시인의 눈과 마음으로 직시하는 짤막한 문장에는 일본인들의 사고와 생활상을 정곡으로 찌르는 신선함이 있어서 새로운 일본문화론이다.
아사히신문사가 발행한 이바라키 노리코 시인의 일반서 "한글에의 여로:ハングルへの旅" 중에 게재된 윤동주 시인 기사는, 일본 고교 국어교과서에 그의 시 3편과 해설 기사가 14쪽이나 게재되었다.

왕수영 시인은 1937년 부산 출생, 연세대를 졸업하고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11회 상화 시인상(1966), 32회 월탄 문학상(1998), 16회 한국문협 해외문학상(2007), 47회 한국문학상(2010), 일본에서 4회石川啄木상(2011.이시카와타쿠보쿠), 45회 한국펜클럽 번역문학상(2014), 32회한국문협 윤동주 문학상(2016)을 수상했다.

시집 <화문의 영토> <조국의 우표에는 언제나 눈물이 난다> <가도 그만 와도 그만> 등이 있고, 장편소설 <조국은 멀다> 등,수필집은 <모가 나는 한국인, 둥글게 쓰다듬는 일본인> 등과 일본어 시집이 있고, 번역서는 약 20권이 있다. 현재 토오쿄에 거주하면서 강연, 집필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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