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외친 '4·3 정명(正名)'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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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외친 '4·3 정명(正名)'의 외침
  • 김동현 기자
  • 승인 2017.04.2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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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제주 4·3 추모 행사 참관기-②

<편집자 주=지난 22일 일본 도쿄에서 제주 4·3 사건을 생각하는 모임이 연 4·3 추모 행사가 열렸다. 일본 도쿄에서 열린 강연내용과 일본 현지에서 만난 소설가 김석범 선생과의 대담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4·3 진상 규명 운동의 불씨가 시작된 일본

제주 4·3 진상규명운동사에서 재일제주인들의 역할은 각별하다. 재일 1세대를 비롯한, 2·3세대들은 제주 4·3 진상규명 운동의 처음을 열어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현기영이 「순이삼촌」을 발표했을 때 작가는 기관원에 의해 끌려가 치도곤을 당했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해방 직후 자신의 좌익활동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던 박정희는 집권 내내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다. 남한이 반공국가라는 병영체제에 숨 막혀 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4·3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시도되고 있었다. 김민주와 김봉현이 함께 쓴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 투쟁사>가 나온 것이 1963년의 일이었다. 병영국가의 억압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일본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22일 일본에서 열린 4·3 추모 강연에 앞서 도쿄 4·3을 생각하는 모임 조동현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김동현 기자

도쿄와 오사카에서 제주 4·3을 생각하는 모임이 결성되면서 4·3진상규명 운동은 한층 조직화되었다. 재일제주인 뿐만 아니라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도 함께 하면서 4·3은 제주의 문제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적인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일본 4·3 열기 뜨거워

도쿄에서 열린 69주년 추념 강연회에서 500석의 객석을 가득 메운 열기는 일본에서의 4·3 진상규명 운동의 열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대부분이 유료 관객이었다. 2500엔, 원화로 2만 6천원 정도를 내야만 입장할 수 있었다. 제주에서 4·3과 관련한 많은 학술 행사들이 열렸지만 규모면에서 도쿄의 열기와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22일 일본에서 열린 4·3 추모 강연에서 박경훈 씨가 강연을 하고 있다.ⓒ김동현 기자

처음으로 도쿄 추념 행사를 찾은 제주 4·3특위 위원들도 객석의 열기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멀리 시즈오카에서 온 재일 3세도 눈에 띄었다. 강연이 시작되자 무대에는 강연 내용을 번역한 일본어 자막이 대형화면에 비춰졌다. 제주에서 온 박경훈 화가는 그동안 제주에서 금기시되어왔던 ‘항쟁으로서의 제주 4·3’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을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제주에서는 이른바 ‘희생담론’이 확산되어 갔다. 제주 4·3봉기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기 보다는 ‘무고한 희생’이라는 인식이 제주사회에 폭넓게 퍼졌다. ‘희생담론’은 제주 4·3당시 피해자에 대한 위령과 추모의 논리적 근거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무장봉기의 역사적 의미를 화석화는 결과를 낳았다. 1948년의 무장봉기를 ‘좌파모험주의’자들의 독단적 행동으로 인식하면서 무장 세력과 소위 ‘양민(良民)’을 분리하는 추념의 정치학이 작동되었다. 유족들 사이에서도 소위 ‘빨갱이’로 낙인 찍힌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과의 괴리감도 자리잡게 되었다.

무고한 희생자라는 인식은 배제와 차별을 인정하는 것

특별법 제정 이후 언론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4·3의 완전한 해결’을 과제로 제시했다. 하지만 이러한 명명법은 오히려 과거청산을 지연하는 정치학적 수사에 그치고 말았다. 남아프리카의 과거사 청산 과정에서도 제시되었듯 과거사 청산의 문제는 대략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이 그것이다. 제주 4·3진상조사보고서 작성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당시 군인과 경찰, 특히 미군정에 의해 묵인되었던 제주 4·3의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진상조사보고서가 작성된 직후부터 제기되었다. 허상수는 진상조사보고서의 성과를 “대규모의 중대한 인권침해(유린)사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위원회에서 공식 의결된 진상조사보고서”라고 의미를 부여한다.(허상수, 「제주 4·3사건의 진상과 정부보고서의 성과와 한계」) 그는 이러한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를 “시민사회단체와 언론이 전개해 온 다양한 진상규명 운동과 사회적 투쟁의 성과가 하나의 ‘사회적 노획물’로서 자리를 잡게 됐”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는 정명(正名)문제를 거론하면서 가해의 진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적시될 필요가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제주 사회에서는 ‘희생자’에 대한 국가의 인정에 큰 의미를 부여해 왔다. ‘4·3의 완전한 해결’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당시 핵심 가해자였던 미군정과 피해자배·보상에 대한 접근은 조심스러웠다.

이제 정명 문제 정면으로 돌파해야

내년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본격적으로 정명(正名) 문제가 제기되고, 미군정의 책임과 피해자 배·보상 문제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제주 4·3 유족회도 이러한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70주년을 맞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제주 4·3의 정명(正名)문제이다. ‘폭동’, ‘항쟁’, ‘사건’, ‘사태’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부여하는 작업은 우리 세대의 몫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정명(正名)을 어떻게 할 것인가. 쉽지 않은 문제다. 제주 4·3진상조사보고서가 나왔을 때 4·3운동 진영 내에서도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극우 세력들은 여전히 진상조사보고서가 ‘좌익의 시각’에서 기술되었다면서 딴지 걸었다. 분단이 남긴 이데올로기의 낙인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옥죄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22일 도쿄에서 열린 강연은 이러한 현실적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고서는 4·3 정명(正名)이 요원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박경훈 씨가 강연에서 ‘반도-불령선인-빨갱이’이라는 배제와 차별의 용어의 역사적 기원을 말하면서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수동적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 것은 정명 운동의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줬다.

한때 제주 4·3소설을 쓰면서 4·3의 진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던 소설가 현길언이 진상조사보고서를 ‘좌파적 시각’이라고 비난했던 것을 상기해보자. 그의 소설 「우리들의 조부님」은 4·3 때 죽은 아버지의 영혼이 할아버지(이 소설에서 서술자는 아버지의 아들인 ‘나’이다.)에 빙의되면서 빚어지는 일화를 그리고 있다. 할아버지의 입을 빌린 아버지가 맨 처음 한 일은 손을 씻는 일이었다. 소설 속에서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한 인물이 손을 씻는다는 의미는 결국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무죄를 증명하는 상징이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무고한 희생자’라고 가정할 때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자기 부정의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음을 소설은 보여준다. 어쩌면 현길언의 ‘변절’은 ‘변절’이 아니라 ‘빨갱이 담론’을 내면화한 자기부정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빨갱이”가 배제와 차별의 언어이고, 이러한 배제와 차별의 언어가 때로는 반도로, 불령선인으로, 그리고 종북좌파로 이어져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정명(正名)은 이 배제의 구도를 무너뜨리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22일 도쿄에서 열린 강연회 직전 대기실에서 만난 소설가 김석범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제주 4·3은 해결하는 게 아니야. 4·3은 해방투쟁이야. 이승만 정권이 정권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제주도민들을 죽인 것. 이 문제를 묻지 않으면 안돼.” 김석범의 발언은 결국 제주 4·3이 미군정이라는 외세에 대한 항거이자, 친일반공정권을 수립하려는 세력들에 맞선 자기 해방을 위한 싸움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흔을 넘긴 노(老) 소설가의 일갈은 제주 4·3 정신을 기리자고 말하면서 그 정신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정명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꾸짖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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