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邊時志, 1926-2013)는 제주 출생의 작가로서, 주로 제주의 바다와 바람과 말을 그렸다. 한 마리의 바닷새와 돌담의 까마귀와 쓰러져 가는 초가와 소나무 한 그루와 마침내 이 모든 것들을 휘몰아치는 바람의 소용돌이―그의 이러한 풍경 속에는 어김없이 구부정한 한 사내가 바람을 마주하고 서 있는데, 이러한 변시지 회화의 기본구도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비애와 고독감이 고즈넉하게 녹아 있다. 화면 전체가 장판지색 혹은 건삽(乾澁)한 황토빛으로 처리되어 있고, 풍경과 인물은 먹선의 고졸(古拙)한 맛과 역동성이 함께 어울려 장대한 대자연의 율동으로 형상화한다. 제주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수업, 23세 때 일본의 「광풍회전(光風會展)」 최고상을 수상하여 화제를 모았던 그는 귀국하여 서라벌예대 교수를 역임하며 극사실의 비원파(秘苑派) 시절을 거쳐 마침내 제주로 돌아간다. 실로 40여 년 만의 귀향이었고, 〈폭풍의 바다〉 연작들은 자기검증의 결실이었다. 저자 서종택 교수는 이 책에서 “어설픈 서구 추수의 모더니즘 속에서 자기 예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의 어려움을 제주-오사카-동경-서울-제주로 이어지는 작가의 고향회귀의 과정이 잘 말해 준다. 변시지 예술의 구도자적 순례는 대지와 바람의 뒤섞임 속에서 마침내 황토빛으로 열렸으며 그것은 결국 그의 사상이 되었다. 그는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실존적 위상을 바라보는 우주적 연민, 달관과 체관의 어떤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그림처럼 예술과 풍토, 지역성과 세계성, 동양과 서양이 함께 만나는 희귀하고도 소중한 사례는 아직 없다”고 결론 짓고 있다.

변시지의 그림은 얼핏 보기에 제주의 풍물이 시적으로 처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갈매기와 바닷새와 쓰러져 가는 초가, 바람 혹은 태양을 마주하고 망연히 서 있는 사내― 이 소재들은 그러나 인간 존재의 근원적 상황을 드러내기 위한 부수적인 소도구일 뿐 제주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풍물시(風物詩)가 아니다. 풍경으로 처리된 변시지의 인물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우수이고 그 표현의 저돌성은 모두 아름답고 개성적이다.

이번에 내는 개정판은, 초판이 출간된 2000년 이후 변화된 내용을 수정하고, 일부 작품을 교체하여 다시 편집했다. 표지 디자인과 판형도 새롭게 했으며, 앞으로 중문판, 영문판, 러시아어판 등도 출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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