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의 힘에 끌렸을까. ‘분노’라는 간결한 제목에 뭔가 홀린 듯 영화에 대한 이렇다할 정보 없이 무작정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아니, 정보가 있었다면, 라디오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간략한 영화소개를 스치듯 들은 게 고작이다. 그 중 재일조선인 3세가 감독이라는 사실과 오키나와가 주요한 공간으로 등장한다는 점에 귀가 쫑긋해졌다.

<사진=영화 분노 홈페이지>

「분노」는 독특하고 매혹적이다. 얼핏보면, 충격적 살인 사건의 범죄자를 추적하는 스릴러물로 보이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개별 이야기들은 이 영화가 대중 상업영화의 스릴러물로 단순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화의 발단은 도쿄의 외곽 지대 주택가촌의 어느 주택 안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한 중산층 부부의 시신과 그 살인 현장의 벽면에 피로 씌어진 ‘怒’라는 글자에서 시작한다. 형사들은 이 엽기적 살인범을 체포하기 위해 공개수배로 수사를 전환한다. 그러니까 「분노」의 굵직한 서사는 살인범을 추적하는 것이고, 이 와중에 세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병치된다. 그러다보니, 관객들의 주요 관심은 세 개의 이야기들을 지켜보면서 각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중 하나가 살인범이 아닐까 하는 추리력을 발동한다. 이 영화를 이렇게 감상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분명, 「분노」는 표면상 엽기적 살인범을 추적하는 스릴러물의 재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살인범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관객이 마주하는 세 가지 에피소드의 결들 사이에서 그동안 우리가 심드렁히 지나쳐왔던, 지나치고 있는, 그리고 지나칠 뻔한 인간 관계에서 소중한 것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사진=영화 분노 홈페이지>

우선, 첫 번째 에피소드를 들여다보자. 도쿄에서 전형적 샐러리맨의 삶을 살고 있는 총각 유마는 동성애 윤락가에서 만난 나오토와 동거를 한다. 유마에게는 죽음을 앞둔 어머니가 있는데 나오토는 유마의 어머니를 친엄마처럼 대하는가 하면, 유마의 집안 살림뿐만 아니라 유마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무해주고 심지어 치유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물론 나오토 역시 유마로부터 어떤 행복감을 느낀다. 나오토는 고아로서 유마와 같은 가족의 행복을 체험해본 적이 없어 유마와 유마의 엄마와 맺는 관계를 통해 비로소 가족의 푸근함을 느낀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마와 나오토의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우연히 살인범과 관련한 공개수배 방송을 접한 유마는 혹시 나오토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은닉하면서 살아가는 살인범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증폭되면서 결국 헤어진다.

<사진=영화 분노 홈페이지>

두 번째 에피소드의 핵심을 간추려보자. 도쿄에 인접한 해안 도시 치바에서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 요헤이는 도쿄에서 윤락녀 삶을 살고 있는 딸 아이코를 수소문 끝에 찾은 후 집으로 데려온다. 명확한 이유는 나와 있지 않으나 아이코의 삶은 이미 황폐화된 처지다. 그러던 아이코는 차츰 아버지와 평온한 삶을 살다가 정확한 신원을 알 수 없는 채 치바에 나타난 테츠야와 가까워진다. 급기야 아이코는 테츠야와 부부관계를 맺고 삶을 시작한다. 비록 요헤이가 그동안 지켜본 테츠야는 성실한 젊은이로서 손색이 없지만, 요헤이는 하나밖에 없는 딸의 삶을 걱정해오던 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테츠야와의 부부관계를 못 미더워한다. 이처럼 외지인 테츠야에 대한 불신은 마침내 공개수배 살인범일 수 있다는 의혹이 생기면서 테츠야는 사랑하는 아이코를 떠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이 의혹이 풀리면서 테츠야는 아이코 곁으로 돌아온다.

<사진=영화 분노 홈페이지>

마지막으로 세 번째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일본 열도에서 오키나와로 이사온 여고생 이즈미는 오키나와에서 사귄 남자 친구 타츠야와 함께 무인도에 가는데 그곳에 여행온 타나카를 우연히 만난다. 자유로우면서도 어떤 그늘이 드리운 영혼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타나카에 대한 이즈미의 호기심은 언뜻 사랑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즈미에게 타나카는 자신처럼 일본 본토에서 겪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오키나와로 올 수밖에 없는 어떤 무엇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오키나와는 이즈미와 타나카에게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를 대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평화적 삶의 쉼터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분노」가 주목하고 있는 오키나와는 이와 정 반대다. 이즈미는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군으로부터 폭력적 윤간을 당하는데, 그 사건은 주택가 놀이터에서 일어났으나 어느 누구도 이즈미가 당하는 성폭력을 구원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 현장 근처에는 타나카와 타츠야도 있었으나 그들은 미군의 성폭력 현장에 맞서기는커녕 이미 이즈미가 성폭력의 야만에 짓밟힌 후 그에게 이렇다할 도움도 되지 못하는 방관자,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성폭력범 미군과 공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츠야는 이런 자신의 비겁함과, 더 나아가 오키나와에 가하는 유무형의 폭력에 속수무책인 오키나와의 현실 자체에 대한 무기력함에 자책할 뿐이다.

<사진=영화 분노 홈페이지>

이렇게 「분노」를 구성하는 세 가지 에피소드는 뚜렷한 핵심을 갖고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가 구체적 양상은 다르지만, 모두 가족과 연관된 아픈 사연을 지닌다. 일본 사회의 고도 성장의 그늘 아래 파편화 ‧ 개별화 ‧ 고립화되는 삶 속에서 가족뿐만 아니라 타자와 맺는 관계의 곤혹스러움은 노골적 불편함으로 드러난다. 물론, 그렇다고 타자와 관계를 전혀 맺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타자와 맺는 관계가 의례적이며 형식적인 것으로, 바꿔 말해 계약 관계에 익숙하다보니, 계약에 철두철미한 윤리감이 관계에 지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강박증, 그 계약이 깨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조금이라도 계약이 어긋날 수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조바심과 의심, 급기야 계약이 파기되었을 때 솟구치는 분노 등속은 타자와 관계 맺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여실히 입증한다.

<사진=영화 분노 홈페이지>

「분노」에서는 그것의 구체적 장면을 가족 속에서 보여준다. 다른 가족 없이 병든 엄마와 간신히 가족의 끈을 잇고 있는 유마에게 나오토의 존재는 어쩌면 유마의 동성애적 성욕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이 아니라 세상에서 홀로 남겨질 유마의 단독자로서의 공허한 존재론적 상처를 위무하고 엄마의 빈 자리를 대신하여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의 가치를 띤 것일지 모른다. 그런 나오토가 범죄자로서 피신 생활을 위해 유마 자신을 이용했다는 의심을 유마가 품은 것은 타자와의 관계 맺기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곰곰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의심 속에서 유마는 나오토를 향한 환대가 증오로 변질되면서 나오토뿐만 아니라 자신을 향한 분노를 품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제 안심을 찾아 가정을 꾸리고 행복한 삶을 꿈꾸는 딸내외를 괜한 불신과 의심으로 깊은 상처를 낸 요헤이 역시 사위 테츠야를 향한 살인범의 누명이 벗기기 전까지 품은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딸을 흉악한 살인마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과정에서 품는 아버지의 분노를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다. 또한 그러한 분노가 살인마를 향한 그것이되, 그것이 근거 없는 불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데서 생기는 자신을 향한 분노 역시 외면할 수 없다. 즉 타자를 향한 분노와 불신 속에서 배태된 과정에서 솟구치는 자신을 향한 분노는 쌍생아를 이룬다.

<사진=영화 분노 홈페이지>

이러한 쌍생아로서 분노는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보다 뚜렷한 정치사회적 맥락으로 드러난다. 흉악한 살인범은 어처구니 없게도 오키나와로 여행온 타나카로 밝혀지는데, 그를 찾은 타츠야와 옥신각신 끝에 타나카는 죽고만다. 타츠야는 그가 사랑한 이즈미를 미군 성폭력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데 따른 자신에 대한 극도의 분노와, 현장에서 이를 방관한 타나카에 대한 저주와 분노를 못이겨 타나카를 죽인다. 타나카는 일 년 전 살인을 한 후 몇 차례 성형 수술을 통해 얼굴을 바꾼 채 도피 행각을 벌여오다가 결국 오키나와에서 그도 ‘분노’를 품은 타자에게 죽임을 당한다.

영화관을 나온 후 쉽게 가시지 않은 생각이 있다. 「분노」에서 도쿄가 죽음의 시작이며 오키나와는 죽음의 끝이 아닌가. 일본 사회의 온갖 문제들이 응집돼 있으므로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분노가 표출될지 알 수 없는 도쿄, 일본 본토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로 철저히 구조화된 식민화, 곧 희생의 시스템 속에서 켜켜이 누적된 채 항시 분노로 터질 가능성을 간직한 오키나와는 이와 유사한 모양새를 지닌 세계 도처의 ‘분노’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망각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될 「분노」의 또 다른 분노를 주목해야 한다. 이즈미는 미군 성폭력을 당한 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즈미는 오키나와의 코발트빛 바닷가 눈부신 백사장에서 그가 감당하지 못할 ‘분노’의 절규를 내뱉는다. 아마도 이즈미의 ‘분노’의 절규는 분노해야 할 대상을 향해 정상적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소자의 정치적 저항이리라. (끝)

□ 약력

고명철.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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