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정의, 5.18 기념식의 한 장면

어제 있었던 제37주년 5·18 기념식이 연일 화제다. 스물다섯 차례나 박수를 받았다는 대통령의 연설문 전문은 각종 SNS에서 공유되기도 했다. 5월 18일에 태어난 김소형 씨를 뜨겁게 안아준 대통령의 파격 행보는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박관현, 표정두, 조성만, 박래전. 광주를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졌던 이들의 이름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못했다, 가슴이 무너졌다고 고백하는 이도 있었다.

공감과 정의. 37주년 5·18 기념식은 이 두 마디로 정의될 수 있다. 국민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권력, 그리고 정의를 바로잡는 권력. 이 상식의 힘을 국민들이 얼마나 목말라 했는가. 세월호 사건 이후 정부가 보여준 비상식적인 태도와 돈과 권력을 앞세워 특권과 반칙을 일삼아 온 비정상의 세상에서 국민들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공감과 정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겠다고 약속했다. 현행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다. 이 헌법 전문에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담아내겠다는 약속이었다. 제주에서 대통령의 약속을 생중계로 지켜보면서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 정명을 이루지 못한 제주 4·3 때문이었다. 제주 4·3의 정신은 과연 헌법 전문에 담겨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4·3 정신은 과연 무엇인가.

지난 4월 3일 열린 제69주년 4.3추념식

기념과 추념, 너무다 다른 5·18과 4·3

5·18은 기념식이라고 불리지만 4·3은 추념식이라고 부른다. 기념과 추념 사이. 이 단어만큼이나 4·3과 5·18이 처해 있는 상황은 다르다. 국어사전에는 기념을 이렇게 정의한다. 어떤 뜻 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함. 추념은 이렇게 정의된다.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함. 죽은 사람을 생각함. 아직 4·3은 정신을 기념하고 계승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당시 죽어간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추모의 성격이 짙다. 과연 제주 4·3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해방 이후 대두되었던 식민지 청산과 나라 만들기의 과제는 지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군정의 제주 주둔 이후 제주에서는 미군정과 친일경찰들에 대한 조직적 반발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였다. 오현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양과자 배척 운동과 미군정의 미곡 공출령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해방이 ‘독립’이 아니라 또 다른 식민의 시작이라는 인식 속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은 지역의 저항을 촉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3·1절 발포 사건으로 6명의 민간인 사망하자 제주에서는 민관이 모두 참여하는 3·10 총파업이 일어난다. 이 3·10 총파업은 그야말로 전도적인 저항이었다. 하지만 3·10 총파업은 육지에서 응원경찰이 파견되는 계기가 되었고 지역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응원경찰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총파업 참가자들을 구금, 고문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천중학원 학생회장이 사망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다. 3·10 총파업 과정의 폭력적 진압에 대한 저항적 폭력의 차원에서 1948년 4월 3일의 무장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이날 제주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과 김익렬 연대장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졌다(1948. 5. 5)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4.3진상조사보고서

무장봉기,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동안 제주 4·3에 대해서 일부 남로당 제주도당 모험주의자들의 극단적 행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군경의 무자비한 폭력이 야기한 비극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제주 4·3 진상조사보고서도 제주 4·3을 남로당 제주도당의 봉기와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이라고 제주 4·3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은 당시의 시대적 한계, 특히 분단 체제라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제주 4·3 진상규명을 제도권에서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2000년 제주 4·3특별법이 제정될 당시 범국민운동 진영 내에서는 제주 4·3의 명칭을 두고 항쟁과 사건이라는 견해가 대립하기도 하였다. 양정심 등 젊은 역사학자들은 제주 4·3을 항쟁이라고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특별법 제정이 우선되어야 한다면서 사건으로 일단 규정하자는 유보적 입장이 힘을 얻었다. 이는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제주 4·3 특별법 제정과 대통령 사과, 4·3 추념일 지정 등 진상규명의 실질적인 성과를 낳기도 하였지만 4·3 정명이라는 또 다른 과제를 잉태할 수밖에 없는 한계 또한 남겨주었다.

국가의 그늘에 숨은 학살 책임자들

더 큰 문제는 제주 4·3의 가해 당사자인 군과 경찰의 책임 문제를 국가 폭력이라는 추상적 언어로 서둘러 사죄했다는 점이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는 제주 4·3을 겪었던 유족들에게는 수십 년 동안 쌓였던 한을 위로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사과의 방식은 실질적 책임의 문제를 외면한 추상의 차원, ‘무고한 희생’이라는 규정을 확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사과 이후 제주에서는 제주 4·3 희생자들을 ‘희생자’로 규정하면서 해방 정국에서 발생한 3·10 총파업 등 지역의 저항을 주체적인 시각으로 인정하지 않는 암묵적 동의가 확산되었다.

불타는 오라리마을. 미군정찰기가 공중에서 촬영한 이 모습은 기록영화의 한 장면으로 나온다(1948. 5. 1) <기록영화「제주도의 메이데이」에서> 4.3진상조사보고서

이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 계기는 제주 4·3특별법 제정 이후 서북청년단 중앙본부 단장을 지냈던 문봉제 등 극우 인사들이 헌법재판소에 제기한 헌법 소원 결과였다. 당시 헌재는 이들 인사들의 위헌 소송을 각하하면서 희생자 선정 기준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며,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북한 공산정권을 지지하면서 미군정기간 공권력의 집행기관인 경찰과 그 가족, 제헌의회의원선거 관련인사·선거종사자 또는 자신과 반대되는 정치적 이념을 전파하는 자와 그 가족들을 가해하기 위하여 무장세력을 조직하고 동원하여 공격한 행위까지 무제한적으로 포용하는 것은 우리 헌법의 기본원리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한다. 이러한 헌법의 지향이념에다가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된 배경 및 경위와 동법의 제정목적, 그리고 동법에 규정되고 있는 ‘희생자’에 대한 개념인식을 통하여 보면 수괴급 공산무장병력지휘관 또는 중간간부로서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자, 모험적 도발을 직·간접적으로 지도 또는 사주함으로써 제주4·3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기타 무장유격대와 협력하여 진압 군경 및 동인들의 가족, 제헌선거관여자 등을 살해한 자, 경찰 등의 가옥과 경찰관서 등 공공시설에 대한 방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자와 같은 자들은 ‘희생자’로 볼 수 없다.

헌법재판소는 제주 4·3 희생자의 범주에 “수괴급 공산무장병력지휘관”, “중간간부로서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자”, “모험적 도발을 직·간접적으로 지도 또는 사주함으로써 제주4·3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무장유격대와 협력하여 진압 군경 및 동인들의 가족, 제헌선거관여자 등을 살해한 자”, “경찰 등의 가옥과 경찰관서 등 공공시설에 대한 방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자” 등은 대한민국의 헌법 이념과 맞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규정은 지역에서 제주 4·3을 ‘희생’의 범주에서만 사고하게 만드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희생자를 결정하는 기구인 제주 4·3위원회가 헌재의 선고를 받아들이면서 남도당 핵심 간부 등 4·3 당시 무장대 핵심 세력들은 여전히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희생자 선정이 불허된 자는 31명에 이른다. 하지만 제주 4·3 당시 군경 토벌대들은 여전히 희생자로 선정되고 있다.

배제와 차별의 구조는 여전

제주 4·3이 공동체의 분열을 경험한 비극이라고 할 때 헌재와 제주 4·3 위원회의 결정은 여전히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배제와 차별의 인식 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해방 이후 3·10 총파업과 이에 대한 폭력적 진압과 통일독립국가를 선택하기 위한 지역의 주체적 선택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배제되고 있다. 제주 4·3은 통일독립국가라는 시대적 과제를 쟁취하기 지역의 주체적 선택이었다. 반공과 친일을 기반으로 한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지역의 주체적 선택을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제주 4·3 당시 무장대의 규모는 많아봐야 500명 수준이었다. 그들의 무기도 일본식 구구식 소총과 죽창 등이었다. 저항은 미미했고 응징은 가혹했다. 무장 봉기 이후 무장대 지도자 김달삼과 9연대장 김익렬의 4·28 평화협정은 제주 4·3의 비극을 방지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평소 군과 대립 관계였던 경찰은 자신들의 책임 문제가 불거질 것을 우려해 5월 1일 오라리 방화 사건을 조작해 강경 진압으로 사건의 성격을 바꿔 버렸다. 그 과정의 배후자는 미군정이었고 학살의 집행자는 이승만과 군경이었다.

제주에 내려온 통위부 고문관들. 오른쪽부터 박진경 11연대장, 김종면 중령, 로버츠 준장, 최갑종 소령, 백선진 소령, 임부택 대위(1948. 5) <김종면 장군 소장> 4.3 진상조사보고서

4·3은 악을 생산하는 근대의 폭력에 대한 저항

제주 4·3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제주라는 지역이 로컬적 시선에서 세계-조선을 구성하고자 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반근대적 저항이라는 시각에서 다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제주 4.3은 단순히 역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되어야하는 저항 정신의 참조지대이며 악을 생산해내는 근대적 구조를 지역의 주체성으로 넘어서려 했던 운동이었다. 제주 4·3을 이렇게 바라볼 때만 제주 4·3 정신이 현재에도 유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지역에서 제주 4·3 정신은 오랫동안 잊혀져 버린 ‘언어’였다. 참혹한 비극조차 말할 수 없었던 시대에 비극을 이야기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비극의 진상이 어느 정도 밝혀진 이후에는 ‘희생담론’의 제도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희생담론’의 수동성은 단순히 기억투쟁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제주 4·3의 주체적 선택이 폭력적 진압으로 귀결된 직후 제주에서 불었던 근대에 대한 열망은 우리 스스로가 저항의 언어를 잊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 지역에서 불었던 근대화 바람은 반공을 정면에 내세운 박정희 정권의 개발정책을 내면화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1959년 8월 4일 제주를 찾은 이승만은 “모두 힘을 합쳐 제주를 꿈과 같은 새 세상이 되도록 하자”고 말했다. ‘공비 섬멸’에 대한 자신감은 지역을 새롭게 편성하려는 근대적 기획으로 손쉽게 대치되었다. 이러한 근대의 기획은 이후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진다. 1964년 제주도종합개발계획 수립 이후 제주 사회는 오랫동안 개발을 지상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지역에서는 ‘개발만 하면 제2의 하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넘쳐났다. 개발에 대한 기대감은 제주도가 곧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제주도개발특별법과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개발과 발전은 놓칠 수 없는 과제였다. 1976년 1월 1일자 제남신문은 이러한 근대화에 대한 열망을 잘 보여준다.

박 대통령과 제주도- 이 관계는 곧 번영과 풍요를 의미하는 것이다. 64년 3월 14일 대통령에 취임하고 처음으로 제주도에 온 박 대통령은 제주도를 동양의 하와이로 발전시켜야겠다고 결심, 이도에 앞서 당시 김영관 지사에게 종합개발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박 대통령의 이 지시는 오늘의 풍요를 약속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도 그것은 천년을 가난 속에서 헤매던 제주도민들에게 잘 살아야 하겠다는 의욕을 갖게 한 최초의 팡파레이기도 했다.

‘번영의 줄달음 박대통령과 제주도’라는 특집 기사는 어승생 수원지 개발과 일주도로 포장, 중산간 횡단도로 건설 등을 예로 들면서 이것을 “물의 혁명”과 “길의 혁명”이라고 말한다.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제주개발은 박정희 시대의 선물로 여겨졌다. 기사는 박정희의 결단이 제주의 근대화를 백년 앞당긴 업적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이러한 근대화의 열망, 그리고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제주와 서귀포를 잇는 횡단도로의 이름이 5·16도로라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5․16이라는 이름의 상징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가-권력은 지역을 철저하게 국가 기획 아래에 두고자 했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개발프로젝트는 1964년 제주도종합개발계획의 수립과 1990년대 제주도개발특별법, 2000년대의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들 속에서 개발은 하나의 당위로 인식되었다. 그 과정에서 국가의 폭력성은 종종 은폐되었다. 식민과 피식민의 관계가 위험한 것은 그것이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상징체계로 은폐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폐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여전히 지역은 승리자의 시혜 안에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 개발이 전면적으로 부각될수록 국가의 폭력성은 은폐되고 국가는 지역을 배제와 차별의 구조 속에 고착화시켜왔다.

4.3진상규명 운동은 근대성과 식민성에 대한 저항

이러한 폭력의 은페와 차별의 고착화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움직임은 198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말해지기 시작한다. 1987년 지역 시민사회운동 진영이 창간한 대안 언론인 ‘제주의 소리’는 호헌철폐와 함께 개발 반대를 동시에 말하기 시작했다. 외지인들의 제주 소유 땅을 조사하면서 토지 잠식문제를 다루는 특집 기사들이 실리고 때마침 불기 시작한 제주 탑동 매립 반대 투쟁 등 개발의 문제가 전면적으로 부각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지역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인식이 지역에서 싹트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박정희 정권이 토지 강제 수용이라는 방식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중문관광단지 건설 과정에서 쫓겨난 원주민들의 사연도 이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역에서의 민주화운동이 제주 4·3 진상규명 등 실체적 진실에 대한 접근과 함께 국가 주도의 개발을 문제삼으면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이러한 저항은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맛보았다. 전국적인 6월 항쟁의 승리와 제주개발특별법 제정이라는 국가 주도 개발의 ‘성공적’ 입법이 바로 그것이다.

승리와 좌절의 경험은 이후 제주에서 제주 4·3진상규명을 역사적 진실 드러내기라는 차원에서 논의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제주 4·3을 근대에 대한 저항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비극적 사건으로 인식하면서 제주 4·3 진상규명 운동은 근대적 저항이라는 중요한 근거 하나를 상실하게 된다.

내부식민지를 뛰어넘는 제주 4·3의 정신을 말해야 할 때

윌터 미뇰로는 “식민성 없는 근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근대 그 자체가 식민적 위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그의 발언에 주목해보자. 제주 4·3이 이념 대결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라는 김석범의 인식은 제주 4·3의 현재적 가능성, 근대의 폭력적 위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상상의 지렛대로 사유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제주 4·3은 단순히 단선단정 반대를 외치며 일어났던 좌파모험주의자들의 극렬 행동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국가 권력에 의한 무고한 희생도 아니다. 어쩌면 제주 4·3은 근대가 필연적으로 배태할 수밖에 없던 폭력의 문제를 지역의 시각에서 스스로 선택하고자 했던 반근대적 운동이었다. 제주 4·3을 이렇게 해석할 때 근대가 만들어 놓은 중앙과 지역의 지리학은 비로소 새롭게 편성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내부 식민지를 생산해내는, 그렇게 함으로써 일상적 악의 시대를 유지하는, 근대의 내부에 숨어 있는 저항의 힘들이 제주 4·3의 역사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제주 4·3을 이렇게 해석할 때 박정희식 근대가 새겨놓은 지역의 식민성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근대에 대한 저항은 자본주의의 외부를 상상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근대의 내부에 있는 저항의 지대를 발견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그 내부적 저항의 지대로서 제주 4·3을 해석하는 일은 야만의 일상이 지배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지역의 응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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