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눈물을 보였다. 지난 18일 광주 국립 5·18 민주 묘역에서다.

이날 대통령은 5·18 민주화 운동 37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기념식 진행 중 희생자 유족이 읽는 추도의 글을 들으면서 손수건을 꺼내 연신 눈물을 닦았다.

김소형(37)씨의 글이었다. 그녀는 1980년 5월 18일 생이다.

그날 그녀의 아버지 김재평씨는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에 왔다가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됐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은 소형씨는 ‘슬픈 생일’이라는 제목의 추도사를 겸한 하늘나라 아버지에게 보내는 슬프고 절절한 그리움의 편지를 읽어 내려갔던 것이다.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글을 읽고 퇴장하는 소형씨를 따라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 후 한참동안 감싸 안아 위로와 격려를 보냈다.

자리에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눈물을 훔쳤다.

현장에서 이를 지켜보던 참석자는 물론 생중계 TV 방송을 보던 국민들 역시 코끝이 찡했다.

‘대통령의 눈물‘이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던 것이다.

지지했던 사람이든, 그렇지 않는 사람이든,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통령 눈물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눈물은 감정의 언어다. 진솔한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수녀시인 이해인은 ‘눈물’이라는 시에서 ‘나를 속일 수 없는 한 다발의 정직한 꽃’으로 눈물을 표현했다.

눈물은 강철도 녹일 수 있다고 한다. 백 마디 웅변보다 더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고도 한다.

눈물은 화해와 치유와 일치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루소는 “함께 울어주는 것만큼 사람의 마음을 결합시켜주는 것은 없다”고 했다.

지도자의 눈물은 더욱 그러하다.

링컨은 노예해방을 위한 ‘눈물의 연설‘로 남북으로 분열됐던 미국을 하나로 묶었다.

처칠은 2차대전의 위기에서 국민들에게 ‘땀과 눈물과 기도‘를 요청했다. 전세(戰勢)를 역전 시킨 힘이 바로 이 ’눈물의 호소‘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4년 서독에 파견돼 고생하던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났을 때 목이 매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때 흘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물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의 재건과 산업화의 불씨가 되었다는 평가가 뒤 따른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5·18 광주 유가족들을 만났을 때 오열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보시절 대통령 선거 TV 광고에서 기타를 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심금을 울릴 정도의 압권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2010년 천안함 폭침으로 산화한 희생자에 대한 추모연설에서 눈물을 보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대국민 담화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지도자의 눈물은 나약함의 표현이 아니다. 감동을 주고 실의에 빠진 국민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강력한 메시지나 다름없다.

지도자의 눈물이 때로는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왕왕 전략적으로 이용되기는 했다.

역대 대통령의 마음에서 우러나 흘린 순수한 눈물을 ‘악어의 눈물’이라거나 가식적인 ‘가짜 눈물’로 매도되기도 했다.

물론 정치적 경쟁자나 반대자들에 의해 서다. 그러나 그것은 눈물의 순수성이나 진정성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정치적 악의가 순수한 감정의 선의를 왜곡하고 더럽히는 비겁한 작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광주에서 흘린 ‘대통령의 눈물’도 그렇게 폄훼되어서는 곤란하다.

색안경을 끼고 볼 일이 아닌 것이다. ‘인간 문재인의 순수한 감정’의 표현으로 읽을 일이다.

굳이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자면 대통령의 눈물은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로 읽을 수도 있다.

이는 바로 ‘문재인 정부’에 바라는 국민의 기대치이기도 하다.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부’는 좋은 정부다.

그러나 ‘백성이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는 정부’가 더 좋은 정부인 것이다.

‘대통령의 눈물’이 이러한 정부를 향한 첫 걸음인 것이다.

아장걸음을 하는 ‘문재인 정부’를 따뜻한 눈으로 지켜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직은 채찍을 들 때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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