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이언」을 보면서, 문득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2012년 인도에서 연구년을 보내던 중 두 학생과 함께 벼르고 벼른 인도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길에서 인도의 다양한 풍경과 숱한 표정들을 때로는 원거리에서 때로는 가까운 곳에서 생생히 지켜보았다. 인도의 서쪽 벵골 지방을 여행하기 위해 대도시 꼴까타 역에 첫발을 디뎠을 때를 잊지 못한다.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하마터면 나와 동행하는 인도 학생들을 인파 속에서 잊어버린 채 졸지에 길 잃은 어른이 될 뻔했다. 그 와중에 역사 후미진 곳곳에는 아주 어린 애들이 끼리끼리 모여 놀고 있는가 하면, 드문드문 외국인을 향해 거리 구걸을 서슴없이 하기도 한다. 그때는 무심결 그들의 행색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역사 근처에서 생존을 위한 고달픈 삶을 살고 있는 것 정도로만 간단히 넘겨버렸다.

<사진=네이버 영화 라이언>

「라이언」은 내가 꼴까타 역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인도 어린애들의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사연들을 스크린 밖으로 소환하였다. 「라이언」은 일반 관객이 감상하기에 복잡한 구조와 다층적 이미지, 그리고 난해한 주제로 이뤄져 있지 않다. 대신, 부담없이 감상할 수 있는 평이한 구조와 스토리를 보인다. 아버지가 부재한 채 절대빈곤의 환경에 놓인 주인공 사루는 어머니와 형, 여동생과 함께 힘든 삶을 살아간다.

<사진=네이버 영화 라이언>

사루의 어머니는 채석장에서 손으로 돌을 깨부수는 힘겨운 막노동을 하고, 사루의 형은 조금이라도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해 철도 주변에서 할 수 있는 비천한 일들을 마다하지 않는데서 알 수 있듯, 사루의 가족에게 하루하루의 삶은 생존의 전쟁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어린 사루는 가족과 함께 고향의 대자연 속에서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는 행복을 누린다. 이를 암시하듯, 영화의 첫 장면은 인상적이다. 사루는 거칠고 황막한 비교적 완만한 모래 언덕의 틈새에서 나비 떼의 유영을 신기한 듯 쳐다본다.

<사진=네이버 영화 라이언>

어디로인지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는 나비의 날갯짓은 몽환적이다. 사루는 나비 떼의 유영을 쳐다보면서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을까. 순간, 어린 사루는 나비 떼와 동일시되는 욕망을 품었을지 모른다. 아무리 어린 사루일지라도 빈곤한 경제환경에 구속된 자신과 가족의 처지에 둔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지만, 이러한 환경에 있는 어린애일수록 조숙하지 않는가. 어린애가 어린애로서 성장하는 게 아니라 ‘애늙은이’로서 성장하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이 첫 장면 다음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사루의 형이 사루를 부르고, 그들은 목숨을 건 시도를 한다. 달리는 열차로 뛰어들어 형은 석탄을 훔치고, 사루 역시 달리는 열차에 간신히 몸을 밀착한 채 형으로부터 석탄을 넘겨받고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린다. 사루와 형은 이렇게 목숨을 건 그들 나름대로 가족의 생존을 위한 일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사진=네이버 영화 라이언>

이렇게 훔친 석탄은 시장에서 겨우 우유 두 봉지와 교환된다. 교환되는 장면에서 사루는 기름에 튀겨지는 인도의 과자를 먹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사먹을 돈이 없다. 그러면서 형제는 커서 돈을 많이 벌어 과자를 실컷 사먹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과자를 파는 가게를 사버리겠다는 호기를 보인다. 어려운 환경의 사위에 있으면서도 이 객관 현실을 이겨내는 힘을 형제는 자연스레 터득하고 있다. 그것은 아무리 힘든 절망적 상황에서도 쉽게 투항하거나 굴복하지 않는 삶의 도저한 낙천성이 지닌 생의 비의적 힘이다. 사루 형제는 이 비의적 힘을 지니고 있다.

<사진=네이버 영화 라이언>

하지만 삶은 냉정하다. 형을 따라 나선 사루는 철도 역에서 그만 형을 잃고, 자신도 모르는 새 멀리 떠나는 기차를 타고 꼴까타 역에 도착한다. 집을 잃고 미아가 된 사루는 우여곡절 끝에 호주의 어느 중산층 부부에 입양돼 25년의 시간이 흐른다. 대학에 입학한 사루는 또래 친구들과의 만남 속에서 자신이 인도에서 입양된 처지라는 것을 환기하게 되는데, 그동안 망각하고 있던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비롯한 자기인식에 대한 고뇌에 사로잡힌다. 호주 입양 부모는 남부러울 것 없이 사루를 친부모처럼 극진한 사랑으로 길러왔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곳에서 자라날 수 있었던 사루에게 호주의 환경은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낙원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사루는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 있던 존재감의 공허로 고통스러워한다. 어렸을 적 형을 따라나선 길이 가족과 영영 이별이 될 줄 꿈에도 몰랐던 사루에게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인도의 가족을 향한 간절한 애틋함과 그리움은 사루의 카르마로 그를 옥죈다.

<사진=네이버 영화 라이언>

호주에서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한 사루는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향한 탐사를 시작한다. 인도 아대륙(亞大陸)의 지도를 펼치고 꼴까타에서 인도의 곳곳으로 뻗은 철로를 되짚어가면서, 아주 작은 기억의 사금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 어디에서부터 이어붙여야 할지 도통 알 수 없는 기억의 조각들을 퍼즐처럼 맞춰간다. 누군가 영화의 감동스런 장면을 묻는다면, 나는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정교히 맞춰가는 장면들을 꼽고 싶다. 25년 전 사루의 어린 시절 남아 있는 작고 볼품없는 인도 마을의 골목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집으로 인도되고,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는 기억과 망각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사루는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힘겹게 찾아나선다.

<사진=네이버 영화 라이언>

흔히들 사루의 이러한 모습에서 어머니 찾기의 서사의 전형을 발견하는데, 「라이언」에서 쉽게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인도의 가족을 찾는 비중 못지 않게 사루의 이러한 분투를 응원하고 지켜보아주는 호주의 가족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넓고 깊은 이해다. 사루를 입양한 호주의 백인 부부는 불임 부부가 아니다. 그들은 세계에서 버림받고 상처받은 어린애들을 입양하여 친자식처럼 길러 입양아들이 인간으로서 품격을 갖추고 인간 존재의 가치를 존중받으며 살기를 원한다. 때문에 그들은 사루가 인도의 친어머니뿐만 아니라 가족을 애타게 찾는 것에 대해 섭섭하기는커녕 진심으로 응원한다. 어쩌면, 사루는 호주의 부모로부터 존재의 근원을 찾아나서도록 하는 용기와 슬기를 얻었는지 모른다. 이 과정에서 사루는 그의 개인적 역사뿐만 아니라 그를 에워싼 타자와의 관계의 소중함을 새롭게 발견한다.

<사진=네이버 영화 라이언>

「라이언」에서 보이는 충격과 감동의 스토리는 허구가 아니라 실제의 일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끝 부분에서 자막이 오르고, 다큐멘터리처럼 실제의 사람들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인도에 남겨진 사루의 가족들(친어머니와 여동생)과 호주의 가족들은 사루를 매개로 가슴 벅찬 만남을 갖는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사루의 형만 자리에 없다. 사루의 형은 사루를 잃어버린 날 기차에 치여 죽었단다. 사루의 형은 얼마나 자신을 원망했을까. 사루를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면 가족들은 사루와 오랫동안 이별하지 않았을 것이고, 사루의 형은 황망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흘러간 시간을 되감을 수는 없다.

<사진=네이버 영화 라이언>

「라이언」은 보기에 따라서는 가족 이데올로기에 구속된다고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한층 눈여겨 보고 싶은 것은 가족 이데올로기의 견고함을 확인하기 위한 데 영화의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족 이데올로기 너머에 존재하는 근대인의 고독과 소외의 상처를 치유하는 생의 근원적인 그 무엇의 가치가 지닌 아름다움이다. 근대의 복판을 가로질러 탈근대와 뒤범벅된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가 심드렁히 치부하고 있는 게 바로 생의 근원과 연관된 아름다움이 아닐까. 이것은 과거의 시간에 구속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 ‘사이’에서 생성된 근원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라이언」의 사루가 우리와 함께 공유하고 싶은 치명적 아름다움이 아닐까. 인도는 이렇게 내게 와락 엄습해온다. (끝)

□ 약력

고명철.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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