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신용인 (제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948년 1월 30일 아침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 국민회의 서기장에게 자신이 직접 작성한 신헌법 안을 보냈다.

평소 간디는 “인도에는 70만 개의 마을이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간디는 인도의 70만 개 마을이 각각 주권을 가진 독립공화국이 되기를 원했다. 그렇게 되면 마을이 세계를 구하게 될 것이라 보았다.

간디의 신헌법 안에는 그런 간디의 꿈이 담겨 있었다. 70만 개의 마을은 각자 주민이 선출한 5명 내지 11명의 판차야트(Panchayat)로 정부를 수립하여 마을공화국을 건설한다. 마을공화국은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전 생활영역에서 고도의 자치를 누리며 경제적 자급자족을 실현한다. 그 상위에는 마을을 전국적으로 연결하는 일종의 국제기구와 같은 조직을 두되 그 조직은 마을에 대해 조언만 할 수 있을 뿐 명령할 수는 없다.

나아가 간디는 영국으로 독립을 쟁취하여 정부를 막 장악한 국민회의 임원들에게 정부 요직을 버리고 마을로 돌아가 마을주민들과 함께 마을공화국 건설운동을 하라고 촉구했다.

국민회의 임원들 중 절대 다수는 인도를 중앙집권적인 근대국민국가로 세우기를 바랐다. 까닭에 간디의 신헌법 안은 국민회의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폭탄의 위력은 금방 사라졌다. 그 날 저녁 간디는 힌두교 광신자인 나투람 고드세가 쏜 총을 맞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간디의 사망과 함께 간디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식민지 인도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연방국가로 새롭게 출범했다.

그 후 인도는 1993년 제73차 헌법 개정을 통해 마을 판차야트, 판차야트, 지역 판차야트의 3단계 지방자치제도를 도입했다. 우리나라의 읍ㆍ면ㆍ동과 유사한 마을 판차야트는 3단계 계층구조의 최하층이고, 마을 판차야트 몇 개가 결합하여 블록 판차야트를 이룬다. 그 상위에는 블록 판차야트 몇 개가 결합한 지역 판차야트가 자리하고 있다. 2006년 기준으로 마을 판차야트는 약 24만 개이고, 총 위원 수는 약 300만 명에 이르며 그 중 여성은 37%, 불가촉민 등 사회소외계층이 30%를 차지한다. 간디의 꿈이 부분적으로나마 성취된 것이다.

촛불혁명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무성하다. 민주주의를 영어로는 democracy라 부른다. democracy의 어원은 헬라어의 demokratia에서 유래한다. demokratia는 ‘인민ㆍ시민’을 의미하는 데모스(demos)와 ‘통치’를 의미하는 크라토스(kratos)의 합성어다. 이렇듯 민주주의는 ‘시민의 통치’를 뜻한다.

유감스럽게도 국가 단위에서 시민의 통치는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동네 단위에서는 가능하다. 동네 단위라면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통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의 중심이 국가 단위에서 동네 단위로 내려올 때 시민의 통치가 실질적으로 구현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약 3,500개의 읍ㆍ면ㆍ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만일 3,500개의 읍ㆍ면ㆍ동에 동네공화국이 건설되고, 대한민국은 3,500개 동네공화국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연방국가로 변모한다면 민주주의가 활짝 꽃필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부는 동네민주주의 활성화 차원에서 1998년 이래 읍ㆍ면ㆍ동 별로 주민자치위원회를 설치ㆍ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주민자치위원회를 주민자치회로 강화ㆍ개편하기로 결정하고, 현재 전국적으로 49개 읍ㆍ면ㆍ동에서 주민자치회를 시범실시하고 있다.

주민자치위원회 내지 주민자치회(이하 ‘주민자치회’라 한다)는 읍ㆍ면ㆍ동의 해당 행정구역 주민 중 선발된 20~30명의 주민자치위원으로 구성되는 주민자치조직이다. 따라서 주민자치회가 제대로 구성ㆍ운영되어 읍ㆍ면ㆍ동 정부 노릇을 한다면 동네 단위에서 시민의 통치를 구현할 수 있다.

하지만 주민자치회는 다음과 같은 대표성 결여, 권한의 미흡으로 분명한 제도적 한계가 있다.

첫째, 주민자치위원 선정의 민주성ㆍ투명성ㆍ공정성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해 주민대표성을 담보할 수 없다. 그 결과 주민자치회는 지역유지나 관변단체 인사 위주로 구성되고 대다수의 주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주에서는 제주도민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주민자치위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작년 7월 8일 조례 개정을 통해 전국 최초로 주민자치위원 추첨선발제를 도입했다. 주민자치학교를 개설하여 수료자 중에서 신청을 받고 신청자가 정원을 초과할 경우에는 추첨에 의해 주민자치위원을 선발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서울의 경우 성동구는 올해 7월 13일 조례 개정을 통해 주민자치위원 추첨선발제를 도입했고, 금천구, 도봉구, 성북구는 현재 추첨선발제 도입을 추진 중이다.

제주와 서울의 사례는 매우 고무적이다. 이제 전국적으로 주민자치위원 추첨선발제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주민자치위원으로 선발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주민자치위원 선정의 민주성ㆍ투명성ㆍ공정성이 보장되어 주민대표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둘째, 현행 주민자치위원회는 문화프로그램을 짜는 것 외에는 별다른 권한이 없어 사실상 행정의 ‘장식용’에 불과하다. 시범 실시되고 있는 주민자치회의 경우 권한이 좀 더 강화되기는 했으나 읍ㆍ면ㆍ동의 하부행정기관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주민자치회가 아니라 ‘주민관치회’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대통령 소속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는 2012년 6월 주민자치회 모델로 협력형, 통합형, 주민조직형을 제시했는데 그 중 통합형과 주민조직형은 주민자치회가 읍ㆍ면ㆍ동 사무소를 지휘ㆍ감독하거나 대체하는 안으로 동네 단위의 시민의 통치를 구현할 수 있는 방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통합형과 주민조직형은 현행 법령 위반이라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이에 정부는 가칭 ‘주민자치회의 설치ㆍ운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통합형과 주민조직형도 실시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밝혔으나 아직 오리무중이다.

동네공화국의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그러나 희망도 있다. 범도민적 풀뿌리자치운동조직인 제주주민자치포럼은 지난 7월 27일 기자회견을 열어 제주지역에서 다음과 같은 읍ㆍ면ㆍ동자치 실현을 촉구하기 위한 1000인 선언운동을 전개하겠다고 했다.

첫째, 읍ㆍ면ㆍ동에게 법인격과 자치권 부여

둘째, 읍ㆍ면ㆍ동장의 주민직선 선출

셋째, 주민자치위원회의 기초의회 전환

제주에는 43개 읍ㆍ면ㆍ동이 있다. 만일 제주주민자치포럼 주장대로 제주지역에서 읍ㆍ면ㆍ동자치가 구현된다면 제주에는 43개 동네공화국이 생기는 것이다. 나아가 전국이 제주의 사례를 본받아 따라하게 되면 대한민국에는 약 3,500개의 읍면동 공화국이 건설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제주가 대한민국의 주권재민을 선도하면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제2항이 현실적으로 구현되는 세상이 오게 될 것이다.

간디는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고 믿었다. 난 세계의 구원은 ‘동네’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