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 훈/ 제주출신으로 제주일고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물론 공감과 감동 때문이다. 이 논물의 원천이 어디인지 좀 자세하게 살펴보자.

먼저 결론부터 앞세우면, 광주를 가족 공동체라는 구체적인 상징과 장면으로 잘 담아냈기 때문이다. 영화는 어떤 예술 갈래보다도 감각의 직접성을 멋지게 잘 활용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시위대가 나눠주는 주먹밥 하나로 사람들 사이의 연대감을 직접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영화가 관객을 쉽게 웃고 울게 만들 수 있는 힘은 바로 이 감각의 직접성과 구체성에 있다. 영화는 ‘연인들이 치열하게 사랑했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 장면을 바로 보여 준다.

그러면 이 영화가 광주라는 가족 공동체를 드러내는 방식을 눈여겨보도록 하자. 앞에서 주먹밥을 거론한 것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한솥밥을 먹는 식구 아닌가! 그렇다면 음식이야말로 가족의 친밀한 관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해 주는 뛰어난 감각적인 소재일 수밖에 없다. 광주의 택시 운전사들 가운데서 중심이 되는 인물인 유해진 집에서의 저녁 식사는 한가족이 되는 의식(儀式)인 셈이다. 처음 만난 사이인 서울 택시 운전사 김만섭(송강호 분)과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통역을 맡은 광주 대학생은 저녁을 같이 먹으며 가족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매운 갓김치를 먹으라는 권유를 받고 매운 것이 좋다면서 먹고 나서 맵다며 물을 달라는 기자의 반응은 가족이 되는 절차의 압축적인 표현 아닌가! 우리는 남에게 우리가 좋아하는 우리 음식을 먹이고 싶어 한다. 거기에는 이방인에 대한 배려도 있지만 내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들어 있다. 저 이가 내 환대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자는 속마음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힌츠페터 기자는 서슴없이 내 권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런 사람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식구가 된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김만섭부터가 아버지다. 그는 아내가 병으로 죽자 혼자 딸을 키우며 산다. 딸 말만 들어 그 딸이 버릇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는 딸을 아낀다. 딸이 발이 커져서 운동화 뒤축을 꺾어 신는다는 말을 듣고서 광주를 벗어나오는 길에 시장에 들러서 운동화와 예쁜 꽃신을 살 정도로 딸을 사랑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광주에서는 무료로 택시에 기름을 넣어 주기도 하고 택시 운전사들은 돈을 밝히는 김만섭을 질이 나쁜 놈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렇게 이 영화는 가족 공동체를 보여 주고 환기하는 내용과 이미지로 가득하다. 한마디로 물질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정(情)의 세계가 광주의 의미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상(理想)에 가까이 간 이런 세계가 관객에게 끊임없는 눈물을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 과정에서 관객도 자연스럽게 저 세계의 일원이 된다. 여기서 이상을 환기하는 것은 눈물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점을 얘기해 두자. 우리는 이상이 실현되면 감동의 눈물, 이상이 사라지면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1980년 5월이라는 시간성은 이 영화에서 탈색된 게 아닐까? 광주의 5월이 한국 현대사에서 어떤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피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역사책에서처럼 날것으로 알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라도 드러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이런 노력이 나에게는 잘 눈에 띄지 않았다. 위에서 얘기한 유해진 집에서 저녁을 먹고 한 가족이 되는 감동적인 과정을 겪고 나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게 된다. 물론 사실(진실)과는 동떨어진 소식이다. 그런데 유해진은 텔레비전을 꺼 버린다. 물론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을 왜곡하여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데 대한 항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이 이 영화의 문제점을 알려 주는 징후라고 보았다. 사실과 뉴스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두고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얘기가 오가야 하지 않을까? 김만섭과 독일 기자가 광주에 몰래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만난 시위대를 보여 주는 장면에서도 이 시위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대화를 들려 줄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 시위대에는 영어를 하는 대학생도 있었고 그래서 기자와 인터뷰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절차였는데도 그 적절한 기회를 활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므로 저 시대를 모르는 젊은 세대는 이 영화를 보고 1980년 5월의 광주라는 특정한 시기의 역사성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바 나쁜 세력의 부당한 폭력과 정으로 뭉친 옳은 우리 편 사이의 싸움이라는 그런 의미 정도로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마지막 대목 즉, 김만섭과 기자가 광주를 벗어날 때, 마치 연극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한 주인공을 기계로 만든 신(deus ex machina)이 나타나 구원해 주듯이, 광주 택시 운전사들의 벌이는 활극은 이 영화를 유치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이 기자를 주목하던 보안사 요원들이 광주를 벗어나는 것을 알고 쫓아온다. 그런데 연락할 수단이 완전히 끊긴 그런 상황(그 당시 광주에서는 시외전화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스마트폰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에서 유해진을 따르는 택시 운전사들이 나타나 보안사의 추적을 방해한다 는 건, 개연성을 전혀 지니지 못한 구성상의 실패다.

그런데 왜 예술적 성취를 갉아먹는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가족 공동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가족 구성원이니까 목숨을 걸고 구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동을 강요해야 할까? 그냥 어렵게 도망치는 것으로 그려도 충분하지 않을까?

한 편의 영화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 것인지 모르겠다. 5월 광주의 역사적 의미가 저 영화로 다 파헤쳐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일 것이다. 감동이 너무 큰 나머지 덩달아서 요구 사항이 많아진 것이라고 이해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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