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강협/ 제주평화인권센터 인권정책실장

쓰레기 요일별배출제로 제주가 시끌시끌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쓰레기 정책을 가지고 현 도정을 질타하면서 잔뜩 벼르고 있다. 이에 대항해 정책의 시행자인 서귀포시와 제주시는 도민들을 향해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며 정책 이행의 강한 의지를 들어내고 있다. 그러한 강한 의지로 제주시는 174명의 감시, 단속인원을 채용했다고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더 체계적인 단속체계를 구축하겠다고 제주시장은 공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사회적 약자의 상징처럼 쓰이는 사진이 있다. 나이든 어르신들이 굽은 허리에도 불구하고 폐지와 빈병을 리어카에 잔뜩 싣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이다. 누구에게도 충분하지 못했을 작은 돈을 꼬깃꼬깃 모아, 조금이라도 살림에 보탰던 그 절박함과 절약을 제주에서 볼 수 있을까? 정해진 요일에 폐지를 버리러 갔더니, 클린하우스를 감시하는 사람이 갑자기 폐지가 가득찬 쓰레기통을 밀고 클린하우스 옆으로 간다. 그 옆에는 그 사람이 세워둔 낡은 봉고차 뒷문이 열려 있었고, 이미 폐지가 차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저 정도면 우리 집 근처 할머니의 적은 용돈이나마 되었을 법 싶은데...

우리 아들놈이 먹던 빨대를 어디다 버려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비닐? 플라스틱? 일반쓰레기? 집에서 배가 고파 야식으로 치킨을 시켰다. 먹고 남은 뼈들을 음식물 쓰레기로 버렸는데, 알고보니 일반쓰레기라고 한다. 아 참! 조개껍데기도 일반쓰레기다. 사발면 용기는 스티로폼 재활용인데, 사발면 뚜껑은 포장제 종류로 분류하라고 되어 있다. 복잡한 요일별배출목록과 쓰레기 분류, 그리고 깐깐한 배출시간 등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행정에서 편성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카톡의 문자 메시지 하나를 보내는 것을 익히는 데도 수개월의 시간이 걸릴 수 있는 어르신들에게 이만한 정보의 양은 정말 폭력이라 할 만 하다. 종이 반토막한 요일별배출표를 나는 아직도 다 모른다. 집에 쓰레기 버리는 당번임에도 불구하고..

쓰레기를 버리러 갔는데 어디 숨어 있다가 나오는지 불쑥 튀어나와서는 쓰레기 버리는 모습을 지켜본다. 뭐 가끔 쓰레기 버리는 것을 도와주는 분도 있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는 분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감시자이다. 그날에 맞지 않는 쓰레기는 여지없이 다시 집으로 가져가야 한다. 아주 오래전 국민학교부터 군대 시절에 이르기까지 위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손톱검사를 하고 투명 잣대로 손등을 맞던 그 시절의 내가 된 듯하다. 선생님은 다 나를 위해서라는 말을 남겼다.

인권을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쓰레기 정책을 보면 사람을 소외시키고, 배제하고, 감시 통제하는 제주도정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우선, 좋은 정책이라고 하면 우선 사람을 둘러봐야 한다. 쓰레기 문제가 심각하다는 데에 동의는 하지만, 그 쓰레기 문제에는 사람들과 사람들의 삶이 있다. 쓰레기를 배출 안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은 그 직업을 통해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쓰레기 문제라고 하면서 쓰레기의 다른 모든 차원은 다 무시하고 쓰레기 배출에만 죽자사자 매달리는 듯하다. 이미 만들어진 쓰레기를 배출 구멍만 줄인다고 쓰레기 문제가 해결될까? 결국 쓰레기를 도민들에게 떠맡긴 정책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작지만 소중한 수입을 올렸던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더 고달퍼 졌을 것 같다. 막강한 소비사회의 압력을 용감하고도 지혜롭게 맞설 용기도 배짱도 없는 행정이 도민에게만 쓰레기의 책임을 넘기고, 애끗은 사람만 더 고달퍼 진다는 생각인 든다. 그리고 사람에게 불편을 주어 행동을 고치는 것보다 쓰레기를 줄이는 편의를 제공해서 문제를 줄어나가는 정책을 쓰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 ‘살색’이라고 불리던 색이 있었다. 그 색의 이름은 ‘연주황’을 거쳐 ‘살구색’으로 바뀌었다. ‘살색’이 인종차별적인 건 알겠는데, ‘연주황’은 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연주황’은 초등학교 학생들의 문제제기로 인해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통해 ‘살구색’으로 변경되었다. 이유는 연주황은 한자어로 표기가 어렵고, 문자에 약한 어린이들이 직관적으로 색을 인지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것이었다. 즉 그 단어의 모든 사용자 중에 가장 취약한 소수자들의 입장이 충분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권고였다. 지금 요일별배출제가 도민들에게 강요하는 모든 배출정보와 분류, 시간 등이 과연 이 제주사회의 약자, 특히 정보에 취약한 어르신들을 고려하고 있는 걸까? 정보의 취득과 정보의 활용에 취약한 이들에게 지금의 쓰레기 배출체계는 궁극적으로 이들을 사회적 과정에서 배제시키고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될 지도 모른다. 1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고 제주시장이 장담하지만, 카톡 메시지 하나 보내는 기능도 강의를 받아가며 배우는 어르신들이 적지 않다. 어떻게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가? 그리고 또 하나! 뭐든 최신의 정보라고 하면서 도민들에게 익숙해지라고 행정이 도민을 가르려 든다. 요새는 교통체계도 개편해놓았는데, 그 변경된 정보도 만만치 않다. 그것도 도민이 익혀야할 문제로 남아있다. 그리고 행정은 그 모든 것을 가르치기 위해 과태료를 들먹이며 협박도 서슴치 않고 있다.

그 누군가의 책 제목으로 쓰였던 ‘단속사회’가 떠오른다. 도민이 계몽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도 분통터지는 일이지만, 이제는 감시와 통제, 그리고 단속의 대상이 되고 있다. 쓰레기 문제로 시작된 일들이 결국 인간에 대한 감시와 통제로 귀결되고 있다. 도민은 애초부터 쓰레기문제를 같이 해결할 주체가 아니었다. 쓰레기 정책의 대상이었다. 즉 쓰레기문제의 원인자이기에 그 문제를 해결해야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대상이었다. 따라서 감시와 통제는 당연한 것이고 단속을 통해 통제를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자칭, 청정한 환경을 자랑하는 천혜의 제주를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정책이라는 것이다.

리어카 어르신들의 부르튼 손이라도 필요하다면 함께 할 방안을 찾아보고, 도민들이 분류하더라도 옆에서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도 함께 분류작업에 참여하고, 쓰레기를 원천적으로 저감할 수 있는 인식을 공유하며, 어느 누구도 사회적 활동에 배제되지 않도록 사람에게 친화적으로 이행될 수 있는 정책 설계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엘리트가 연구하고, 그 연구 결과를 도민들에게 가르치는 계몽주의적 행정을 비판한다. 그리고 계몽을 넘어 단속사회를 주창하는 제주행정에 저항을 경고한다. 사람을 중심에 놓고 다시 고민해보길 바란다. 제주도 사람들은 주체적으로 제주도를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 글은 제주평화인권연구소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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