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립 약사

갑작스럽게 수온주가 뚝 떨어졌다. 어제까지도 반팔 옷을 입고도 땀이 배어나오더니 스산해지는 날씨 덕에 살이 드러난 팔뚝 피부엔 긴장한 흔적이 완연하다. 웬지 서늘한 느낌 때문에 두 손으로 팔뚝을 감싸 안았다. 갑작스런 기온 변화는 많은 것들을 변화시킨다. 여전히 건들거리는 푸른 이파리에선 광택이 걷히고, 여유 있던 사람들의 발걸음은 종종거림으로 바뀐다.

뜨듯한 방안이 그리워지는 날씨에, 컴퓨터 창을 통해 보이는 세상은 여전히 한가하다. LED 패널을 통해 보이는 많은 이야기들은 여전히 푸근하다. 페이스 북을 통해서 들려지는 수많은 사연들 역시 모니터를 통해서 스크롤된다. 스크롤이 계속 내려가다가 한 곳에 멈추었다. 스산해지는 날씨만큼이나 절박해지는 이야기들이 있다. 게 중에서 제주 시청 앞에서 단식 농성을 시작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김 경배. 한 번의 만남과 또 여러 번의 카톡 방에서의 인사, 그리고 간간이 들려왔던 1인 시위 소식들과 함께 늦은 결혼소식도 날아왔다. 나를 보고 갑장이라며 반갑게 인사하던 이가 한뎃잠을 자면서 단식을 시작했다고 했다.

갑작스런 일이 아니었다. 생면부지의 사내를 갑장이라고 한 자리에 앉아서 막걸리를 나누어 마실 수 있었던 것도, SNS를 통해서 한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정부청사, 제주도청 앞에서 두 주먹을 그러쥐고 치켜든 모습을 보게 된 것도 제주국제공항 건설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제주 국제공항 건설 문제는 저가 항공사가 취항하기 시작하면서 제주행 관광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공항 대기 시간이 30분 이상씩 늘어지면서 관광객 수가 늘어나면 더 잘 살 수 있다는 환상과 조급함, 그리고 위기의식이 도민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도민 공동체 의식보다는 점차 개인적인 삶에 대한 우위가 강조되는 현대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도민 전체의 이익이라는 추상적인 개념, 거기에 관광객이라는 구체적으로 지칭되지 않는 시민들의 이익이라는 공공선의 개념들이 강조되는 공항건설 당위성 논리는 상호 모순적이기까지 했다.

화폐의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도민 사회에 돌아다니는 돈의 양이 늘어나면 그만큼 삶의 질이 좋아질 수는 있다. 반면, 소위 구매력으로 측정되는 실질소득의 관점에서 볼 때, 가격이 상승한 지대, 물가수준 인상, 생활환경 수준 저하로 인해서 도민들의 삶의 질이 나아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관광객들이 지불하는 돈이 도외로 유출되는 양이 상대적으로 많은 상태에서는 관광객의 증가가 과연 도민들의 삶의 질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2015년 11월 후보지 발표 이전에 있었던 여론 조사에서, 제2공항 건설에 대한 평가는 좋지 못했다. 제주국제 공항 확장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찬성했다. 그 방법론에서도 기존 공항을 확장하자는 안이 제 2 공항 건설, 신공항 건설보다 더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하지만, 공항 후보지를 발표한 후에 여론조사는 제 2 공항 건설을 당연시하고, 문항에 제 2 공항 찬성, 반대만으로 의사표시를 제한했다. 그러니 찬성이 압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항 자체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면 여전히 제 2 공항에 대한 여론은 기존 공항 확장 보다 낮은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지난 9월 성산지역 대책위와 도민행동에서 공항에 대한 근본적인 필요성에 대한 의문을 표하면서 공항 문제 해결 방식을 공개했을 때 결과는 여전히 제 2 공항보다 기존 공항 확장이나, 정석 비행장 활용 방안이 높은 지지를 받았다.

한편 도에서 제시한 설문조사 결과는 여전히 제 2 공항 건설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결과가 과연 다른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문항을 조금만 눈여겨보아도 도정에서 실시한 설문에는 제 2 공항 건설을 전제로 실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도민들은 여전히 제 2 공항 건설보다는 기존 시설을 활용하는 것이 낫다는 데 동의를 표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존재를 규정한다고 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현실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 삶의 전략을 짤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소위 현실 세계를 종이 위에 좌표축을 연결함으로써 인간 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증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많은 사연과, 고뇌, 기쁨, 걱정들은 서서히 그 구체성을 잃고 숫자와 기호로 변화하고, 함수로 변화했다.

개별적인 특이성들은 제거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기호가 됨으로써 문명은 발전하고 화폐는 기하급수적인 팽창을 이루었다. 그렇게 기호화된 숫자들이 현실세계로 돌아오려면 다양한 규범 창들을 통과해야 한다. 그 창들을 통과해야 기호화된 수식들은 비로소 현실 세계와 마주하고 사람들 사이를 완전하게 이어줄 수 있는 것이다.

사회 규범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다소 상이하게 작동하고, 규범을 이끌어내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다르게 변화한다. 스펙트럼과 같은 변이 속에서 숫자들은 영원히 사람사이를 연결하지 못하고 방황할 수 있다. 공항 건설이라는 문제를 바라보고, 설문에 응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생각과 관점에서 답을 했다. 그리고 제시 문항에 따라서 판이하게 다른 것과 같은 결과를 마주하고 있다. 설문에 답한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답변을 했을까?

그들도 그들 개인의 이야기가 있고 슬픔과 기쁨, 격정과 체념들이 숫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숫자들은 개별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거하고 나열되었고, 다시 현실 세계와 마주하면서 제주사회의 미래를 제시하게 된다. 미래 사회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하며 설문조사의 결과가 도민 개개인의 삶을 보증하고 위로해야 한다. 그래서 32%라는 숫자는 도민들의 이야기가 되어 삶을 풍성하게 영위하도록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후보지 선정을 위한 용역 자료는 왜곡되거나 잘못된 자료를 바탕으로 했으며 후보지 선정 과제를 확정으로 둔갑시키고, 설명회, 간담회 등을 제 2 공항 건설을 전제로 하는 절차 형식에 맞추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몇 차례의 설명회, 진행과정에 대한 간담회가 과연 해당 지역 주민들, 도민들의 삶을 지표로 하고 있는가? 내년이면 기본계획이 수립되고 보상절차에 들어갈 것이다. 현대 사회의 지향점으로 제시되는 다양성 중시는, 도정 수립과정에서 찬반양론으로 변질되는 수단이 되었고, 주민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존중에 대한 요구는 이기주의로 매도되고 있다.

김경배. 그는 중장비 기사로 아름다운 자신의 이야기를 쌓아 보금자리를 만들어 행복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졸린 눈을 비비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산등성이 너머로 빛나던 햇빛을 바라보던 기억도, 지친 어깨를 기대어 앉았던 키 낮은 의자도, 새 식구와 단란한 꿈을 꾸었던 작은 소망마저도 함께 잊혀져야 한다.

구체적인 주민들의 상실의 아픔이 관광객들의 숫자와 소득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증명되지 않은 삶의 질을 위해서 해당 지역 주민들의 살아있는 구체적인 생활의 흔적들을 지워내고 잊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잊는 다는 것은 잊혀져야 하는 시간만큼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소수, 피해자들의 눈물과 아픔을 어루만져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이 시간의 기억을 만들어 내고, 풍성한 삶의 내용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민들을 몰아낸 후에 관광객들이 배타적인 점유를 통해서 행복을 과연 얼마나 더 많이 얻을 수 있을까?

곡기를 끊은 지 12일. 이제 심장은 지친 통증을 서서히 호소하고, 근육들은 피곤한 호흡을 시작하여 얼굴빛은 거칠어지고, 대사 율은 떨어질 것이다. 의식이 또렸한 만큼 육체의 고통은 더 커질 것이다. 한 줌 목숨을 걸고 버티는 단식행위가 개인에게 생존을 보장받기 위한 몸짓이다. 그런 몸짓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발걸음들이 모아지는 것은 참여한 사람들 모두의 기억이 될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기억 학습이 공유를 통한 공동체의 유대감을 확대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제주 도정에서는 구체적으로 누구의 행복을 위해서, 어떤 사람들의 삶의 질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지역주민들이 생활의 기억을 박탈당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지 쫒겨 가는 사람들과 박탈된 기억을 공유하는 많은 사람들 간의 새로운 유대가 싹 틀 수 있는 것이다.

위정이란 바른 행위를 행하도록 조정하고 함께 하는 것이지, 강요하고 강제하면서 밀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들의 노동으로 굵어진 땀방울과 희망에 찬 숨소리가 지켜져야 할 인간에 대한 예의의 징표라면, 도정은 단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예의마저도 각별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_고대립(약사)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