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권무일/ 소설가, 역사소설 <의녀 김만덕>, <남이>, <말, 헌마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 수상록 <어머니 그리고 나의 이야기>, 평설 <이방익 표류기>

필자는 최근에 제주의 서복유적에 관해 일본 학자가 쓴 두 편의 논문을 입수하였다. 츠카하라(塚原 熹)의 「제주도에서의 진(秦)의 서복유적 고찰」과 아사미 린타로(淺見 倫太郞)의 「제주도에 있는 서복의 석벽문자」가 그것이다. 이는 홍순만의 「제주도와 신선사상」이라는 논문과 다른 여러 글에서 인용된 내용이었지만, 필자는 그 원본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논문들은 1910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잡지 『朝鮮』에 게재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도서관들에서는 열람이 허용되지 않는 도서라, 제주대학교 도서관을 통해 일본 도쿄대학 도서관에서 팩스로 받아볼 수 있었다.

츠카하라에 의하면, 김정희가 유배시절 제주도의 한 석벽에서 암각을 발견하고 이를 탁본하였는데, 한학자 몽인 정학교가 다음과 같이 화제(畫題)를 달았다고 한다. 논문에는 탁본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고, 탁본의 원본은 지금 일본 도쿄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진시황 28년 방사 서불 등은 동남녀와 더불어 삼신산의 불사약을 구하기 위하여 바다에 나아가 조선국 탐라도를 지나면서 석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고 새겨놓았다. 이 4자는 새긴 지가 2천여 년이 흘렀으니 해동 고적에 이보다 오래된 것이 없다. 여러 사람이 탁본을 뜨러 찾아다녔지만 이 고적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神物이 출몰함은 때가 있는가. 김시랑 추사선생은 여러 해 동안 이 섬에 머물면서 많은 석각을 찾아 탁본하고 세상에 알렸다. 이 탁본도 그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에 옛글을 즐기고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몽인(夢人) 정학교(丁學敎)

정학교는 조선 말기의 저명한 서화가로 광화문 편액을 썼으며, 그의 서화작품이 여럿 남아 있다. 그는 이 탁본을 <徐市過之>로 불렀다. 그러나 아사미 린타로는 <之>가 <此>의 오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아사미 린타로는 같은 해 같은 잡지 다음 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그가 1906년에 자신의 숙부가 운영하는 서울의 고서화점에서 그리고 1909년에도 다른 고서화점에서도 이 탁본을 보았는데, 주나라 말기의 고문자와 비슷했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는 작년(2016년)에 남해서복회가 주최한 서복 한‧중‧일학술세미나에서 논문발표를 할 기회를 가졌다. 그때 남해 금산의 중턱에서 서복이 암각했다는 마애문자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이 문자는 상형문자로 되어 있어 해독이 어려운 바, 한학자 오경석(1831-1897)이 중국 금석학자 하추도(何秋濤)에게 의뢰하여 <徐市起禮日出>이라는 판독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런데 츠카하라가 제시한 제주도 암벽의 석벽문자 사진이 올챙이 모양인 남해 암각과 닮은꼴이어서 여러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런 이유로 정학교가 김정희(金正喜)의 것이라고 주서(注書)한 이 탁본이 김정희의 것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당대 고관을 역임한 저명한 서화가가 사술을 썼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위의 남해석각과 제주석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 다 올챙이 모양의 상형문자로 되어 있고 글자의 획수와 모양이 대동소이하나 여러 획에서 다른 모양을 볼 수 있다. 탁본이나 사진은 일획일점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동일 작품으로 인정될 수 없는 바, 이에 제주석각은 남해석각의 모조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탐라기년』의 저자 김석익은 『심재집』에서, 고종14년(1877) 백낙연(白樂淵) 목사가 초도순시 중 정방폭포에 이르러 서복전설을 듣고 긴 밧줄을 늘어뜨려 암각을 탁본하였는데, 글자는 올챙이, 새, 벌레의 모양과 같고 12글자였는데 무슨 글자인지 판독할 수는 없다고 하며 그 탁본의 행방도 알 수가 없다고 썼다. 살펴보건대 정학교가 주서한 탁본을 가지고 김석익이 말을 꾸며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츠카하라의 논문에 덧붙인 사진에서 보이는 탁본 사진은 남해석각을 닮았고 백낙연 목사의 탁본이 올챙이 모양 같았다는 내용으로 보아, 김정희의 탁본과 백낙연의 것은 동일한 것으로 서불의 암각은 근래까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문제는 그 두 탁본이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유적도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제주의 현무암이 풍우로 인하여 마모되기 쉬운 점을 감안하면 2,200년 전의 석각이 남아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신비의 섬 탐라 특히 한라산에 신선이 살며 그들은 불로초를 먹고 산다는 믿음이 구전(口傳)으로 이어져 왔다. 많은 문인, 학자들이 그 구전을 진실로 믿고 글을 써서 남겼다. 서복, 불로초 그리고 신선사상과 관련하여 옛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를 들어보고자 한다.

최부(崔溥)는 1487년(성종18) 9월 제주에 추쇄경차관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1월 부친상을 당하여 급거 배를 탔다가 표류하였다. 그는 13일 만에 중국 영파를 거쳐 귀국하여 『표해록』을 집필했는데, 제주에 있을 때 35수의 탐라시를 썼다. 그 중에 서복, 신선, 불사약에 관한 시구가 보인다.

俯瞰人間隔世踵(내려다보면 인간세계와 자취가 멀어진 곳)

海中別有瀛洲峯(바다 가운데 별천지인 영주봉이 있네)

秦童漢使枉費力(진나라 아이들과 한나라 사자가 탐라에 와서 헛된 일에 힘을 쓰다가)

遺與三韓作附庸(내팽개쳐 한반도의 지배를 받게 했네)

我來得覩神仙宅(신선이 사는 곳에 내가 왔으니)

採了天台劉阮藥(천태의 유완약을 캐어 먹고)

願學麻姑看海桑(설문대할망에게 선술을 배워 하늘에 오르면)

應將此身壺中托(장차 이 몸은 선계에 머물러 있겠지)

첫 번째 시에서는 탐라를 인간세계와 다른 별천지로 인식했고 진나라의 서복 일행과 한나라 무제가 보낸 사신이 불사약을 취하러 탐라로 왔다는 이야기를 읊고 있다. 두 번째 시에서는 제주가 신선이 사는 곳이기에 신선이 먹는 불사약을 구하여 먹으면 선계에 이를 것이란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은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인 사실에 항의하다가 제주로 유배되어 대정고을에서 10년간 적거하였다. 그의 문집 『동계집』에 서복에 관한 시구가 나온다.

漢使何年至(한나라 사신은 언제 왔었나)

秦童住不還(진나라 아이들이 살면서 돌아가지 않았네)

老星臨咫尺(노인성은 지척에 있는데)

弱水隔塵寰(이 세상과 사이에 약수가 가로막았네)

‧‧‧‧‧

明時投極裔(밝은 시대에 유배지로 쫓겨났지만)

何幸近仙山(다행히도 신선의 산에 가까이 있네.)

瀛洲遠在海中天(영주는 멀리 바다 가운데 있는데)

秦漢曾浮採藥船(진시황도 한무제도 일찍이 약 캐는 배를 띄웠네)

聖主却憐危命促(성주가 위기에 처한 나의 목숨을 가련히 여겨)

許令歸伴紫霞仙(선궁에 사는 신선과 벗이 되게 하셨네)

정온은 시에서 서복이 데리고 온 진나라 아이들이 탐라에 머물었음을 암시하고 있고, 한 무제가 불사약을 구하러 사람을 보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탐라국왕세기』에 의하면, 기원전 110년 한 무제가 동방삭의 말을 듣고 영주에 사신을 보내어 금광초와 옥지지를 구해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정온은 노인성이 가까이 보이는 곳, 돌아오지 못하는 강 약수 밖에 쫓겨나 있지만 신선이 사는 곳에서 신선과 벗 삼아 사니 다행한 일이라고 쓰고 있다.

선조 때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는 서복이 탐라에서 채취하려 했던 불로초의 존재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제주 전역을 편답했다. 김녕포에서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 여러 명을 만났고 그 중에 백세에 이른 노인이 예닐곱 있었으므로 그가 신선이 사는 마을에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거기서 불로초를 찾으려 했다. 존자암에서는 영지를 닮은 지초(芝草)를 불로초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숙종 때 제주판관으로 와 있던 우암(寓庵) 남구명(南九明, 1661-1719)은 그의 <불사초변>에서, 예로부터 전하는 말은 삼신산에 신선이 살고 있다고 한다. 거기에는 불사초가 있어서 진나라 동남녀와 한나라 사신들이 탄 배들이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그들은 동남해중을 편력하며 그것을 구하려 했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불사초가 있다고 하지만, 실제 그것을 구했다는 사람은 없다. 나는 내 눈으로 보지 않은 터에 있다 없다를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가 사람들을 만나보니 제주에는 영묘한 약초가 있어서 한 번 먹으면 몇 해씩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당시 제주도에 80세 이상의 노인이 400명을 넘고 백세 이상의 노인도 십여 명이 됨을 확인했다.

탐라, 한라산에는 신선이 살고 그들은 불로초를 먹고 살기 때문에 늙지 않고 죽지 않으며, 제주사람들 중에도 그 불로초를 구해 먹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은 연년익수(延年益壽)를 누린다고 하는 설이 중국과 한반도에서는 오랫동안 구전(口傳)으로 회자되어 왔다. 그래서 서복 일행도 동도(東渡)하여 탐라에 이르렀고 다시 탐라를 떠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서복의 사건을 단지 전설로 치부하기보다는 상고시대의 고조선과 동이족의 신념체계를 통하여 들여다볼 때 역사적 사실에 근접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신선사상의 원류는 단연 고조선이라 할 수 있는데, 환인‧환웅‧단군의 삼신사상이 그 중심에 있었다. 단군신화에서 환인의 아들 환웅은 천하치세의 뜻을 품고 천‧부‧인 3개를 들고 3천의 무리를 이끌고 풍사‧우사‧운사 3인을 대동하고 삼위태백에 내려와 나라를 세웠고, 그 아들 단군은 세상을 다스리다가 만년에 아사달이라는 산에 은거하여 신선이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여기에는 항상 3의 숫자가 따라 다닌다. 고조선의 삼신사상은 동이족 사회로 퍼져나갔고 동방을 경략했던 제왕들이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춘추시대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는 발해의 동쪽 멀리에 대여(大輿), 원교(圓嶠), 방호(方壺), 영주, 봉래라는 신산(神山)이 있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 신선들의 무리로 불로초를 먹고 살아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했는데, 사마천의 『사기(史記)』 또한 『산해경』의 내용을 근거로 삼은 것 같다. 서복이 목적지로 삼은 영주, 봉래, 방장은 3개의 신산이 아니라 신선이 사는 하나의 삼신산일 것이다.

탐라에도 또한 언제부턴가 삼신인의 신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모흥혈에서 삼신인이 솟아나와 세 처녀를 배필로 삼았고 세 화살을 쏘아 영지를 3도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한다. 이처럼 3의 숫자가 반복되는 것은 단군신화에서 영향을 받았고 고조선의 삼신사상이 탐라까지 전파된 것이 아닌가 한다. 탐라에서는 일찍이 신선사상이 깊게 뿌리를 내렸는데, 이는 바다를 오가는 사람들을 통해 알게 모르게 중국에 알려져 왔을 것이다. 한라산은 서복 이전부터 삼신산 또는 영주로 알려졌고 불로초에 대한 염원과 더불어 이상향으로 여겨져 왔을 것이다. 그래서 한라산은 삼신산 또는 영주, 영주는 신선이 사는 산, 불로초가 있는 산으로 중국과 한반도에 파다하게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서복이 불로초를 찾아 삼신산을 향함에 있어 산동반도에서 출발했다면 발해만을 거쳐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연안항해를 했을 것이다. 연안항해를 함에 있어서는 육지나 섬이 바라보이는 시인거리(약 100m)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의 동해안은 황해에서 흘러나오는 모래로 인하여 사구가 형성되어 항해가 곤란하며 황해를 가로지르는 항해는 당시의 항해술로는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서복의 선단은 서해안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복선단은 서해안을 지나 남해안에 이르고 거기서 일본으로 직행하기보다는 신선이 살고 불로초가 난다고 소문이 난 탐라로 향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복 일행이 발해만을 거쳐 한반도 연안, 탐라 그리고 일본으로 항해하는 긴 여로는 그 후 무역선 내지 대선단의 뱃길이 되었다. 이 해상루트를 통하여 많은 문물이 중국에서 한반도, 일본으로 건너갔고 또한 많은 물자와 진귀한 물건들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탐라가 신선이 사는 섬, 불로초의 섬이라는 유쾌하고 낭만적인 담론과 더불어 서복으로 인하여 황해교역권이 형성되고 탐라가 이 권역에 동참하여 문화교류에 일익을 담당해 왔다는 점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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