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본향(本鄕)은 그리스도교다.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미사를 의미하는 기독교 전례의 최대 축일이다.

기독교계만이 아니다. 이미 세계적 축제가 된지 오래다.

‘하늘에는 영광을 돌리고 땅에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기원’하는 축제다.

예수 탄생의 메시지는 겸손과 사랑과 평화다.

예수가 지극히 낮은 자세로 세상에 내려와 빛을 밝혀 어둠을 사르고 거기에 사랑과 평화를 심은 것이다.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의 외양간에서 태어나 말 여물통(구유)에 뉘어진 성서의 예수 탄생 일화는 이를 상징한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에게 겸손한 자세로 다가가서 사랑을 베풀고 이를 통해 기쁨을 나누면서 평화를 노래하는 축제가 크리스마스다.

‘억압받고 고통 받는 이웃,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 억울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찾아 위로하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잘못에는 용서를, 미움과 증오에는 화해를 통해 모든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들의 가치를 존중하여 평화를 엮어내는 역할이다.

크리스마스의 진정성도 여기에 있다.

가톨릭교회의 각 성당과 개신교의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 전야인 24일부터 미사와 예배와 찬양을 통해 예수 탄생의 기쁨을 나누었다.

거리에는 울긋불긋한 온갖 조명등으로 장식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빤짝 거렸다.

흥겨운 캐럴 송과 함께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마음을 들썩이게 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아름다운 사진과 그림, 글을 곁들인 크리스마스카드와 문자 그림 메시지 등을 주고받으며 건강과 행복을 빌고 덕담을 나누기도 했다.

크리스마스가 교회 신앙인들 뿐 만 아니라 믿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도 즐겁고 행복한 축제로 자리 잡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기쁨을 나누고 사랑을 실천하고 평화를 노래하는 크리스마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직도 어둡고 칙칙하다.

예리하게 날선 미움과 증오가 독버섯처럼 곳곳에 널려있다.

상대를 향한 막말과 나만 살겠다는 이기심과 허위의식이 공동선을 짓밟고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공동체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다.

경제적 효율성에만 집착하는 보여주기 식 성과주의가 사회안전망을 찢어발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일들이 정의란 이름의 탈을 쓰고 자행되고 국민적 의아심과 피로감을 누적시키고 있기도 하다.

충북 제천시의 화재 참사는 순식간에 29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36명의 부상자를 냈다.

낚시 배 침몰로 죽고, 공사장 크레인이 넘어져 죽고, 현장실습 고교생이 프레스에 깔려 죽고, 인큐베이터에서 4명의 아기들이 죽기도 했다.

최근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이다. 무엇이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 안전 불감증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제천시 스포츠 센터 참사는 경제적 탐욕과 무책임이 만들어낸 안전 불감증 종합세트다.

센터 외벽은 불붙기 쉬운 값싼 스티로폼 소재의 드라이 비트 공법을 썼다. 한 번 불이 붙자 걷잡을 수가 없었던 이유다.

초기 화재 진압에 필수적인 스프링클러는 아예 작동되지 않았다. 건물주가 잠가버렸기 때문이다.

비상탈출구는 가려졌거나 열리지도 않았다.

건물주변 2차로 도로에 늘어선 주정차 차량은 소방차 진입을 방해 했고 지연시켰다.

총체적 안전 시스템 부실이었다. 행정, 건물주인, 소방당국, 일반 시민 등 모두가 공범자인 셈이다.

안전보다 경제적 드라이브에만 집착해 온 허술한 사회안전망과 무관심 무책임 무분별이 만들어낸 침사요 비극인 것이다.

안전 미비는 대형 참사의 지름길이며 인계철선이다. 건드리면 언제 어디서나 폭발하게 되어 있다.

사고가 난 후에야 ‘안전미비’니 뭐니 하며 설레발을 치며 긴급대책 운운하지만 그때뿐이다. 사후 약방문에 불과하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캐치프레이즈는 ‘사람이 먼저’다. “이것도 나라냐”는 국민적 아우성이 담긴 촛불로 탄생한 정권이다.

그래서 ‘나라다운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

‘사람이 먼저 인 나라다운 나라’, 멋지고 매력적인 구호다. 국민적 구미에 맞는 달콤한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를 바탕으로 이른바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의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국민적 기대와 호응 속에 정부가 출범한지 일곱 달을 넘기고 있다.

그러나 국민적 기대감은 점점 퇴색하고 있다.

국가나 사회시스템의 안전망 구축이나 점검보다는 ‘적폐청산 과잉’이 빚어내는 부작용이다.

‘적폐청산’이 ‘정치보복’이라는 새로운 ‘적폐 생산’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있다. 언제 절망적 상황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릴지 모를 일이다.

지금은 안보가 위증한 시기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당당한 외교력도 같은 범주다. 이는 나라의 위상과 국격에 관련되는 것이다.

눈치 보기 외교는 나라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망신살이가 될 수도 있다.

위에서 제기된 안보 경제 외교 문제는 정부가 어떻게 나가야 할지를 제시하는 방향타이자 키워드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적폐청산’ 타령만 하고 있다. 나라를 좀먹었던 폐단을 청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무랄 일이 아니다. 박수를 보낼 일이다.

그러나 그것에만 매몰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일각의 지적대로 ‘적폐청산’이 아니고 새로운 ‘적폐생산’이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시중에는 ‘적폐 청산’을 두고 부지런히 먹잇감을 노리는 ‘양의 탈을 쓴 늑대의 이빨’로 비유하는 말들이 나돌고 있다.

‘다음은 누구누구가 먹힐 것’이라는 정체가 모호한 황당한 유언비어가 번지고 있는 것이다.

적폐청산의 길은 어디까지인가. 청산해야 할 적폐는 얼마나 남았는가.

적폐청산이라는 말에 식상하고 피로감을 느끼는 이유다.

적폐청산은 질질 끌 일이 아니다. 그것이 국정 운영이나 국가 운명의 발목을 잡아서는 곤란하다.

끊을 것은 끊고, 매듭을 풀 것은 푸는  쾌도난마식 화끈한 적폐청산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적폐청산을  반대파를 겁주고 겁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일은 말아야 한다.

국민적 피로감 해소를 위해서도 그렇다.

청산해야 할 적폐 대상의 1호는 정치권이다. 삼백예순날 정치투쟁에 골몰하는 여야 정치권이 청산하고 청산되어야 할 적폐인 것이다.

정치 과잉이 안보를 멍들게 하고 경제를 혼란스럽게 하고 국민적 불신과 분열을 키우며 사회 안전망 구축에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크리스마스’ 아침에, 이들에게 보내는 국민적 경고는 엄중하고 싸늘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니컬하다.

“그러지 마소”.  '제발 그러지들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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