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항쟁 70주년이다. 제주도는 물론이고 시민사회 진영에서도 70주년 행사 준비로 분주하다. 금기의 언어였던 ‘제주 4·3’이 공론장에서 불려지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일본에서, 제주에서, 서울에서, 장소는 달랐지만 침묵을 강요당했던 ‘제주 4·3’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순이삼촌>의 작가 현기영, <제주민중항쟁>을 펴낸 김명식 시인 등은 4·3 진상규명 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제주 4·3의 진실을 규명해온 언론의 역할도 크다. 4·3 연구자라면 누구나 정전처럼 독해하는 <4·3은 말한다>는 제주를 넘어 한국 언론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탐사 보도의 전범이었다. 수많은 기자들의 노고가 있었지만 단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김종민 전 4·3 진상조사기획단 전문위원이다. 진상조사보고서와 11권이 넘는 제주 4·3 자료집은 그의 집요함과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4·3에 관해서 세계 최고의 전문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가장 앞자리에 놓일 이름이 바로 ‘김종민’ 전 위원이다.

과거사 진상규명을 백안시 했던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그는 보수정권의 눈엣가시였다. 지만원 등 극우 인사들은 그의 퇴출을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야인(野人)으로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신임 기자시절 구석 책상에 앉아 산더미 같은 자료와 씨름하던 모습을 기억하기에 그의 퇴임 소식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지난 해 제주 4·3 연구소 주최로 열렸던 한 학술대회에서 그는 토론자로 참석했다. 그는 4~5페이지 정도 되는 토론문에서 발표자들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발표자들 누구도 그의 지적에 반론하지 못했다. 제주 4·3, 나아가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한 그의 지식은 알량한 박사학위를 능가한다. 그는 10년 동안의 기자 생활과 진상조사 기획단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7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숱한 자료와 씨름하며 펴낸 진상조사보고서와 진상조사 기획단 시절에 펴낸 수많은 자료집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제주 4·3 진상규명과 관련한 그의 작업은 박사 학위 논문 수십 편과 맞먹는다.

제주 4·3에 관련해서는 최고의 전문가인 그는 지금 고향 과수원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하는 삶이라고 SNS에서 밝힌 바 있다. 자신의 글이 다른 사람의 글로 둔갑하는 ‘꼴’을 보면서도 4·3의 진실이 세상에 더 알려지길 바란다고 말하는 사람.

4·3 70주년. 추념 행사 준비로 제주가 떠들썩하다. 하지만 그 부산함의 뒤편에 자신의 모든 삶을 제주 4·3 진실 규명에 바쳐온 한 사람을 생각할 여유를 우리는 지니고 있는 것일까. 제주 4·3 연구와 관련해서 제주대학은 이미 그 사회적 역할을 내버린 지 오래다. 교수들의 알량한 자존심 싸움과 텃세 탓에 제주 4·3 연구자 한 명 없는 게 제주대학교 사학과의 현실이다. 탐라문화연구원 안에 제주4·3센터가 설치되어 있지만 전임 연구자 한 명 없다. 재일제주인센터를 만들어놓고도 연구자 채용보다는 건물을 짓는 게 우선이고, 학교발전기금을 받는 게 목적이 되어 버렸다. 제주 4·3 하나만으로도 제주는 한국 현대사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연구의 중심지가 될 수 있다. 10억 원의 학교 발전기금을 약속했다고 람정 회장의 흉상을 세우면서도 제주 4·3 연구소 하나 못 만드는 게 제주대학의 현실이다. 대학은 그렇다 치더라도 제주 4·3평화재단은 어떤가. 재단의 연구 기능도 기대를 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람을 품지 못하는 제주 사회가 문제다. 최고의 전문가를 최고의 대우로 모셔도 모자랄 판에 박사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고작 몇 만원의 강사료를 책정하는 행정의 무신경은 그에 비하면 애교수준이다. 사람 하나 품지 못하면서 무슨 70주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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