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길현 교수/제주대학교 윤리교육과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고 제주담론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주 제주의 눈 풍광은 압권이었다. 엉금엉금 걸어 다니느라 불편해도, 겨울에는 가끔씩 눈을 보아야, 겨울 지내는 맛이 난다. 지난 금요일 오후에 방한화 신고 수목원과 신제주를 감싸 안은 눈을 음미하면서, 여기저기 발 가는 대로 주유해 보았다.

어릴 적 제주의 겨울은 처마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리던 추운 겨울로 떠 오른다. 그 때는 정말 추웠다. 가난해서 더 추웠는지도 모르겠다. 까닥 방심하면 발에 동상 걸리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방한화가 없고, 난방도 잘 안될 때였으니까. 그래도 눈이 오면 좋아 했다. 눈 내리는 게 희소해서 그랬을 것이었다. 필자가 살던 비탈길 골목길에서 썰매 타면서 환호성을 터트리던 기억은 아직도 즐거웠던 어린 시절의 잊지 못할 한 토막의 추억거리이다.

눈 덮인 신제주의 여기저기를 거닐면서, 다시 한 번 동심으로 돌아가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어서 눈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드문 폭설이라 더 좋았다. 몸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옷과 신발, 목도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후의 반나절이 휴일처럼 주어질 수 있기에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행여 눈길에 미끄러져 낙상을 해서는 안 되겠기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눈 덮인 신제주의 길 여기저기를 아무 작정 없이 걸어 다녔다. 그냥 눈길이 있기에 걸어 다녔다. 요즘 뜨는 트래킹이 따로 있는 게 아닐 터이다.

계절이 부자와 빈자에게 주는 의미가 다르다고들 한다. 굳이 부연 설명해 보면, 겨울은 부자의 계절이다. 돈으로 코트를 사서 걸칠 수 있고, 집 안의 난방도 따뜻하게 유지해 나가는 데 비용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그렇다, 올해 유난히 인기를 끌고 있는 롱패딩을 무리 없이 사 입을 수 있고, 아파트 난방비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겨울 지내기가 큰 어려움은 아닐 것이다.

여름에는 가난한 사람도 그냥 헐렁한 옷 하나만 있어도 지낼 수 있고, 또 선풍기 하나로, 그것도 없으면 나무 그늘이 있으면 햇빛을 피해 지낼 수 있다. 물론 일하지 않고 쉬는 경우이지만. 그래도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난 여름에는 정말 더웠다. 열대야로 잠을 잘 수가 없는 날이 며칠이나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엔 부자도 힘들었다고 한다. 낮에는 몰라도 밤에까지 에어컨 켜고 잘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열대야에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다 고통이었다.

어떻든 여름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버티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건, 동남아시아를 여행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의 기준에서 보면 1년 내내 여름인 동남아에서는 옷과 주거 비용이 그다지 많이 들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래전 버마의 사원을 방문했을 때, 그 사원 여기저기에 앉아 편안한 얼굴로 명상에 잠겨있는 버마인들을 본 적이 있다. 신발도 신었는지 말았는지, 옷도 한 겹의 큰 천으로 둘둘 말아 입은 채, 머리는 빡빡 깎아서는, 부처님 얼굴이 잘 보이는 나무 그늘 밑에 앉아서, 무상무념의 평안해 보이는 버마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부자가 아니어도 마음의 안식과 평온을 보이는 건, 혹 버마가 여름 나라여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금요일 오후의 서너 시간을 유람하듯이 걸으면서, 필자만 흥이 나니, 다른 분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문득 65만 제주도민 모두가 다 밖으로 나와서,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이 하얀 눈 세상을 여기저기 걸어 다니는, 도민 휴일의 날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유행하는 번개이다. 번개 눈 축제이다. 따로 기획하고 준비할 필요가 없다. 눈이 많이 와서 출퇴근도 힘드니, 공공기관도 비상조만 남기고, 모든 도민들에게 하얀 눈 거리를 어슬렁 배회하는 시간을 갖자고 하면, 안 되는 걸까?

지난 주 금요일 같은 날, 번개로 임시 공휴일로 하고는, 도민 모두가 밖으로 나와 그동안 잊고 살았던 내 동네 길의 눈 풍광을 사진 찍어 카톡이나 밴드로 경향 각지 지인들에게 보내주면, 그것이 최상의 제주 홍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65만 도민이 100명씩에게만 보내도 6,500만명이 눈 덮인 제주의 모습을 보면서, 제주를 향한 마음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건 아닐는지. 제주공항에서 언제 뜰지 모르는 비행기 기다리기보다 아예 하루 더 체류하기로 하여 도민 번개 눈 축제에 동참하려고 가방 들고 다시 제주의 여기저기 돌아보는 전혀 계획 없던 번개 관광도 꽤 있을 거란 생각이다.

혹 방한옷과 신발이 없어 밖으로 못 나오는 이웃이 있으면, 이런 때에 밖으로 초청해서 사주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일 것이다. 지난 금요일 같이 번개 축제 때에는 멀리 가지 말고 동네 식당에서 옹기종기 모여 외식을 함으로써 동내 가게 매상도 늘려주는 게, 진정 축제가 아닐까. 지인을 불러내어 같이 동네 눈길을 걷다가 눈에 띠는 식당에서 점심 같이 하자고, 막걸리 한잔 같이 하자고, 아님 향기 좋은 차나 커피 한 잔 하자고, 문자 보내거나 이웃집 초인종을 눌러보는 게 어떤지.

요즘은 눈이 많이 오지도 않고, 자주 오지도 않는다. 더욱 지난주 금요일 같은 눈 세상은 더욱 자주 오는 게 아닐 게다. 그렇다면 앞으로 혹 눈으로 덮인 제주의 모습을 그대로 만끽할 수 있도록 시간과 마음의 여유와 훈훈한 정 나누기가 있어야, 진정 사람 살맛이 나는 제주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제주 관광은 65만 제주도민 부터 제주의 날씨와 풍광을 있는 그대로 즐길 때 비로소 ‘제주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되는’ 그런 관광지가 되리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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