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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영삼] “한반도 해빙은 제주도에서 시작되었다…”마영삼/ 제주국제연수센터 소장
제주투데이 | 승인 2018.03.14 20:39

[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마영삼/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미국 죠지타운대 외교학 석사, 전 청와대 외교비서실 행정관, 주 이스라엘대사, 주 덴마크왕국대사, 현 제주국제연수센터 소장, 현 국립외교원 명예교수

4·19혁명 31주년 되던 1991년의 바로 그날, 우리나라 남단 제주도에서는 ‘외교혁명’이 불붙고 있었다. 낫과 망치가 새겨진 붉은색 소련 국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고르바초프 대통령 내외를 태운 일류신-62 수송기가 제주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반세기 가까이 한반도를 뒤덮었던 냉기류가 이날부터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이튿날 열린 한소정상회담에선 한반도 긴장 완화와 북핵 문제, 한국의 유엔 가입 문제 등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졌으며, 이로써 제주도는 평화회담 장소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로부터 5년 후, 유채꽃이 만발한 서귀포 해안을 배경으로 기자회견을 가진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 구상의 로드맵으로 4자 회담을 제안하였다. 이외에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 간의 한일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중국의 장쩌민 국가주석을 비롯하여 벨기에, 아일랜드, 카자흐스탄, 몽골 등의 국가원수들도 제주도를 즐겨 찾아 아름다운 풍광과 평화로움을 만끽하는 가운데 평화 정착 방안을 협의하였다. 이뿐 아니라 제주도는 한-중-일 정상회담, 한-아세안 정상회담 등 다자외교 무대로도 인기가 높다. 올해로 13회째를 맞는 제주포럼에서도 국제문제 전문가들이 모여 한반도의 평화 정착 방안 마련을 위해 머리를 맞댈 것이다.

남북회담의 역사에 큰 획이 그어진 것도 다름 아닌 제주도에서였다. 2000년 9월에는 북한 노동당의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가 특사 자격으로 제주도를 다녀갔으며, 연이어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전금진·권호웅 내각 책임참사 등 거물급 인사들도 제주도를 방문하여 우리 측 관계자들을 만났다. 2003년 제주도에서 개최된 민족평화축전에는 남북 양측의 체육인과 문화인이 대거 참가하여 한민족의 뜨거운 정을 나눴다. 그럼으로써 제주도의 평화 이미지는 더욱 탄탄해졌다. 2005년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되고 나서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주도는 이 이름에 걸맞게 자리매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현재 최초의 미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순간을 앞두고 제주도가 회담 장소 후보지로 거론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제주도는 휴전선에서 가장 먼 곳에 있지만 남북한 교류에서는 여느 지방자치단체보다 활발한 역할을 해왔다. 대표적인 사업이 ‘비타민C 외교’다. 제주도는 1999년에 감귤 100톤을 북한에 보낸 것을 시작으로, 남북한 양측의 호응에 힘입어 10여 년에 걸쳐 감귤 약 5만 톤을 전달하였다. 이를 계기로 제주도민의 북한 방문길이 열려, 2002년부터 5년간 네 차례에 걸쳐 도민 800여 명이 북한을 다녀왔다. 지자체로서는 이루기 어려운 남북 화해와 협력의 성공 사례에 해당한다.

얼마 전 폐막한 평창 동계 올림픽은 찬반이 엇갈리는 가운데서도 남북한의 개막식 동시 입장,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그리고 북한 고위급 대표단의 남한 방문이라는 큰 족적을 남겼다. 올림픽 직전 한반도 정세는 북한 핵 및 미사일 문제로 긴장이 한껏 고조되었으나, 북한의 올림픽 참가에 따라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우리 국민들은 스포츠 축제를 넉넉히 즐길 수 있었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러한 우호적 분위기를 한반도의 항구적 안전과 평화 정착의 방향으로 어떻게 끌고 가느냐이다.

한반도 해빙 무드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정교한 구상과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정치안보 분야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냉랭한 경우에도 모든 분야에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우선 스포츠 및 문화 교류 중심의 소프트파워를 매개로 하여 남북 화해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각에서는 경평(京平)축구의 부활이나, 내년에 100회를 맞는 전국체전의 서울-평양 동시 개최와 같은 아이디어가 백출하고 있다. 제주도의 경우 과거 남북한 교류 경험을 바탕 삼아 평창 동계 올림픽으로 조성된 남북한 교류의 동력을 이어갈 여지가 많다. 올해도 감귤 농사가 풍년이다 보니 ‘비타민C 외교’의 재개 여건도 갖춰져 있다.

분단된 남과 북의 지리적 상징인 백두산과 한라산을 소재로 한 여러 사업도 가능하리라 본다. 이미 그 아이디어가 제시된 바 있는 “한라에서 백두까지 남북한 교차관광”, “한라산-백두산 생태·환경보존 공동협력” 등의 사업을 구체화해 나가면 성사 가능성이 높다. 정치색이 배제되어 있고, 남북 양측이 그 필요성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남북한 주민이 함께 어우러져 천지와 백록담을 한날 한시에 등정한다면, 백두산 천지에 오르기 위해 지금처럼 번거롭게 중국 쪽으로 우회할 필요도 없다. 이 같은 사업들이 지방자치단체 간의 교류로 추진되면 중앙정부 간 교류보다 유연성을 좀 더 발휘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간에 실적을 쌓아 온 제주도의 역할이 크게 기대된다. 지금이 과거의 경험을 되새기며 향후 남북협력사업의 방향성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중요한 시점이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연이은 미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현재 우리 정부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동맹국 및 우방국들과 함께 전략, 전술을 짜는데 전력을 쏟고 있다. 이와 더불어 유엔 안보리의 대북한 경제제재 및 독자적 제재 이행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제주도가 구상하는 남북교류사업도 큰 틀에서는 외교·안보·통일 정책의 일부이기에 우리 정부의 마스터플랜이나 국제공조체제와 궤를 달리하기는 힘들다. 지자체의 노력이 평화 유지와 화해 협력을 위한 것일지라도, 대북정책 기조와 어긋나거나 섣불리 실행되는 일이 없도록 그 방향과 속도는 섬세하게 조절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외교정책은 흔히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비유된다. 어느 악기 혼자서 소리를 내는 독주가 아니라, 여러 악기의 소리가 아름다운 선율로 조화되는 합주여야 한다. 수많은 행위자와 변수가 상호작용하는 국제체제라는 합주곡 안에서, 지자체인 제주도 역시 한 파트를 맡은 연주자임을 염두에 두고 화음을 쌓아 올리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한반도 해빙의 앙상블에서 조화롭게 제 몫을 해내는 멋쟁이 제1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역할을 제주도에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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