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은주/ 주부, 제주시 아라동

지난 설 명절 때 오랜만에 만난 지인으로부터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사교성 인사를 받고, “부모님 유산 덕분에 잘 지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얼마나 많은 재산을 물려 받았길래 저러지?’ 하는 표정을 짓더군요. “부모님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물려주신 덕분에 열심히 잘 살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니, 그제서야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요즘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수저 계급론’으로 말하자면, 우리 제주도민은 적어도 금수저 정도는 물려받은 계급입니다. 조상님들로부터 물려받은 아름다운 ‘자연유산’ 덕분에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오래 갈까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이른바 외지인들이 제주를 찾는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먼저,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거주하는 곳으로부터 되도록 먼 곳으로 떠나보고 싶은 심리가 있습니다. 제주도는 국내에서 가장 먼 관광지이니 가보고 싶겠지요.

그리고, 제주도는 육지와의 사이에 바다가 가로놓여 있어 비행기나 배라는 특수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다는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불편하기보다는 즐거운 체험이 될 수 있어 매력적입니다.

세 번째는, 주위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남북을 통틀어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다는 점도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리고 확 트여있는 길을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도로사정과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올레길도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느끼게 합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제주에서나 맛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먹거리도 있습니다.

이런 점만 해도 당분간 관광객 걱정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준비 안 된 자식은 부모 재산도 금세 탕진해 버리듯, 우리의 자연유산도 다를 바 없습니다. 훼손되면 그만이니까요.

그런 이유로 해서, 제가 여기서 새삼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을 보전하자!’ 구호를 외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금수저’가 뭔가를 제대로 생각해 보자는 얘깁니다.

우리 집 부근, 그러니까 제주여고 4거리에는 ‘박성내’라는 개천이 있습니다. 그곳 표지판에는 4·3 때 수많은 주민이 학살당한 곳이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습니다. 그런 역사를 모르고 하루에도 몇 차례 지나다녔습니다. 그리고 출근하는 길목인 애조로와 하귀 사이 광령리에는 고인돌 2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런대로 보존상태가 괜찮은데, 다른 하나는 엉망입니다. 사유지임에 분명한 밭 귀퉁이에 흙에 반쯤 파묻힌 채 방치돼 있습니다(관계 공무원을 흠잡을 의도는 없습니다).

때로는 친한 이들과 외곽지로 나가곤 하는데, 방사탑이니 연대니 하는 것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사실 그런 것들을 모르고 산다 해도 아무런 탈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어쩌면 우리의 새로운 먹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것은 천혜의 자연환경 말고도 ‘역사문화유적’이라는 어마어마한 보물이 있습니다.

선사시대 주거지부터 시작해서 각종 방어진지, 충효열비, 유배지, 민속신앙지, 예술인들의 발자취, 그리고 삼별초, 왜구, 4·3, 6·25로 상징되는 갖은 시련의 흔적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 바로 제주도입니다. 거기다가 1만 8천 신(神)들의 고향이라는 황송한 칭호까지 부여받고 있습니다.

유독 전쟁이 잦았던 유럽의 전쟁터가 오늘날에는 역사유적지로써 수많은 참배객들을 끌어들여 관광수입을 올리는 관광자원의 핵심이 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물론 선조들의 아픈 역사를 이용해서 먹고 살자고 하는 얘기도 아니고 미신을 옹호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정화수 떠놓고 자식 위해 빌고 비는 어머니의 치성을 보고 잡귀신이 들렸다고 하겠습니까? 본향당에 촛불 피워 가족 위하고 자식 위해 기도하는 우리 할머니를 두고 미신에 빠졌다고 하겠습니까? 문화로 이해하면 이것은 아주 귀한 재산입니다.

어떤 것이든 방치하면 우리의 시야와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자연관광지는 시간이 지나면 훼손 가능성이 커지는 반면, 역사문화는 되새길수록 가치가 커집니다. 지난 일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새로운 문화로 거듭나게 되죠.

해마다 입도객이 늘어가는 것에 환호를 하면서도 이러다 제주도 다 망가지는 거 아냐? 하면서 걱정을 하는 이율배반적인 갈등을 떨쳐버리고, 이제는 눈을 돌려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역 사유적지를 문화의 요람으로 발전시켜 나아가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천혜의 자연환경에다가 역사문화유적까지 물려받았으니, 우리는 분명히 ‘금수저 계급’입니다.

제가 제주를 여행하는 외지인이라면, 하루 일정을 이렇게 잡아보고 싶습니다.

낮에는 역사문화유적지를 답사하고, 오후에는 갯바위 낚시를, 그리고 저녁은 직접 잡은 물고기로 텐트에서 저녁 잔치를 벌이는 겁니다.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