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수] 화평의 신과 상극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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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수] 화평의 신과 상극의 신
  • 제주투데이
  • 승인 2018.03.2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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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수/ 전) 제주대 교수, 소설가

[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영수/ 제주대학교 교수를 퇴임한 후 전업소설가로 활동 중

제주신화가 인간 위주의 이야기라면, 그리스신화는 신 위주의 이야기이다. 제주신화에서는 인간세상을 보살피고 도와주는 것이 신들의 본분이지만, 그리스신화에서는 신들의 존재이유가 그들 자신의 사랑과 권력을 즐기는 것이다. 제주의 신들은 인간이 정성스럽게 올리는 치성을 받아주고 인간의 간절한 기구(祈求)를 들어주기 위해 각 마을 신당에 좌정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그리스신화에서는 인간의 행복은 신들의 질투 대상이고, 뛰어나게 잘난 인간은 오만하다는 이유로 신의 저주를 받고 엄벌에 처해진다.

그리스신화에서 영웅적인 인간이 오만죄 때문에 중벌에 처해지는 대표적인 예가 시지푸스 이야기이다. 그의 오만죄는 감히 제우스신의 연애행각에 대해 왈가왈부한 것이고, 그가 자기를 데리러 온 저승차사를 묶어놓고 죽기를 거부한 점에서는 제주신화의 ᄉᆞ만이하고 비슷하다. 시지푸스가 사후에 받는 벌이란, 위로 굴려올린 바윗돌이 산 꼭대기에 닿았다가 아래로 내려오면 다시 굴려올리기를 반복하는 끝없는 고역이다. 해결됐던 것처럼 보이는 문제들이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인간역사의 비유이다.

탄탈루스는 제우스신의 아들로서, 그의 죄는 아버지 배경을 믿고 신들의 전유물인 꿀차(nectar)를 훔쳐 먹었다는 것인데, 그의 벌은 못 견디게 목이 마른데도 바로 코앞에 가까이 다가오는 물을 마실 수 없다는 것이다. 아라크네라는 길쌈질의 명수는 감히 아테나여신과 실력을 겨루다가 괘씸죄에 결려서 거미가 되는 벌을 받고, 악타이온이라는 호기심 많은 사냥꾼은 감히 사냥신 아르테미스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았다가 사슴으로 변한다.

트로이 왕국의 제관인 라오콘은 그리스군대가 만들어놓은 ‘트로이목마’를 성안으로 들이면 재앙이 오리라고 겁 모르는 애국적인 예언을 했다는 죄목으로 아테나여신의 미움을 사는데, 두 아들과 함께 두 마리 왕뱀에게 몸이 칭칭 감긴 모습의 ‘라오콘군상’ 조각상은 고통 받는 인간의 운명을 표현하는 명작으로 통한다. 제주신화에 비하면 그리스신화 속의 징벌 방법은 더 견디기 어렵고 운명적인 복선이 깔려있다. 테에베의 왕 오디푸스는 아폴로신전의 신탁을 거역하려고 한 것이 결국은 그 신탁을 구현한 결과가 되는데, 부친을 죽이고 모친과 결혼한다는 죄악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비탄이라 하겠다.

그리스신화에서는 남녀간의 애정을 배신한 불륜범들도 혹독한 징벌을 받는다는 점에서 제주신화와 다르다. 절대권력을 쥐고있는 제우스신만 예외이다. 트로이전쟁의 영웅 아가멤논의 아내는 남편 부재 중에 외간 남자와 통정했다가 자기가 낳은 아들과 딸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용맹한 장수 이아손이 오지 깊숙이 숨겨진 황금양털을 탈취하는 무훈은 적국의 공주 메데아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가능했지만, 그는 사랑의 은혜를 망각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치른 죄값으로 메데아로부터 (아비가 보는 앞에서 두 어린 아들의 사지를 찢어발기고, 결혼식 날 신부를 불에 태워 죽이는) 잔혹무비한 복수를 당한다.

트라케 왕 테레우스의 삼각관계 애욕행각이 불행한 말로를 맞이함은, 서귀포당신본풀이의 애정삼각관계가 비극적인 결말을 면피하고 있음과 대조된다. 테레우스는 아테네 공주 프로크네와 결혼하여 살던 중 그의 처제 필로멜라를 유인, 구애하지만 언니의 기지와 동생의 복수심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두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리스신화의 애정관인데, 긴장되면서도 유화적인 사랑다툼이 허용되는 제주신화 이야기와 대비된다.

신들이 인간세상을 어떻게 보살피느냐 하는 점에서 제주신화와 그리스신화가 다르다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 보낸 선물의 성격에서 잘 나타난다. 제주신화에서 농경신 자청비는 오곡의 씨를 인간 세상에 갖다 줌으로써 농사짓고 사는 역사를 열어준다. 그리스신화의 올림푸스 주신(主神)들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며, 신들의 전유물인 불을 훔쳐다가 인간 세상에 선물하는 것은 프로메테우스라는 하위신(下位神)이다.

오곡의 씨앗은 인간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고 이것이 잘못 이용될 우려는 거의 없다. 반면에 불이라는 선물은 이용하기에 따라서 축복이기도 하고 재앙이기도 하다. 불은 음식을 익혀먹고 추위를 막아주는 데에 쓰이면 좋은 선물이지만, 전쟁무기로 쓰이거나 화재를 일으키는 불은 재앙의 씨일 뿐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바라볼 때, 제주신화에서는 서로 화평의 관계이지만, 그리스신화에서는 상극의 관계이다. 제주신화에서 사람들은 신들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그들의 가호를 기원하지만, 그리스신화에서 사람들은, 특히 영웅적인 능력과 담력의 소유자일수록, 신의 영역을 넘보고 이에 도전한다. 제주신화에서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가호는 진실로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만, 그리스신화에서 인간 세상에 내려온 신의 역사는 인간의 능력을 시험한다.

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 사랑을 실천한 프로메테우스가 올림푸스 주신들의 절대권력에 거역하여 신들의 전유물인 불을 인간 세상에 선물한 죄목으로 내려진 벌은, (제우스신이 보낸) 독수리에게 끊임없이 생간을 쪼아 먹히는 것이다. 신의 세계에 대한 반역과 도전 끝에 벌을 받는다는 점에서 프로메테우스와 인간의 운명은 같은 맥락의 것이다. 인간을 사랑하여 내려준 프로메테우스의 선물조차도 인간에 대해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는, 끝없는 시련을 요하는 인간역사를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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