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길현 교수/제주대학교 윤리교육과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고 제주미래담론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4.3 70주년으로 다시 한 번 광화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때마침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선고가 있었던 다음 날이라 그런지, 지난 토요일 광화문 한 켠은 선고에 반발하는 태극기 부대로 메워지기도 했다. 언젠가는 태극기 부대도 4.3 추모행사에 함께 하는 날을 기약할 뿐, 아직은 각기 평행선을 가고 있는 현장이기도 했다.

4.3은 김대중정부 때 4.3특별법이 만들어지고, 노무현정부 때는 4.3 희생자에 대한 정부의 사과가 있었으며, 박근혜정부 때는 4.3 추모기념일이 제정되었다. 미진하다고 여기는 분들도 있겠지만, 하나씩 차근차근 4.3에 대한 진실 규명과 명예회복 그리고 화해상생의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지난 4.3 70주기를 맞아 문재인 대통령은 제주에 와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린다”고 하면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다. 평소 “제주를 외롭지 않게 하겠다”던 대통령의 언명이기에 조만간 4.3특별법 개정도 속도를 내리라 기대해 본다.

지난 토요일 4.3 70주년 문화행사도 참관할 겸 해서 집을 조금 일찍 나서, 명동성당에서 열린 4.3 위령미사에 참석했다. 필자가 알기로 서울에서 처음으로 4.3위령미사를 하는 거라 그런지, 제주에서도 250여명의 신자들이 미사에 참여했다. 1947년 3.1절 기념일 행사에 약 3만명의 제주도민이 제주북교에 모여든 열기에는 못 미치지만, 마음만은 올 4.3 70년을 맞아 4.3의 면모와 위상이 조금이나마 더 업그레이드되고, 그럼으로써 억울하게 죽어간 3만여 도민들의 영령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예배의 시간이었다.

4.3 위령미사가 치러지는 명동성당 앞에서는 공산 폭도들이 저지른 4.3을 위령한다며 이에 항의하는 태극기부대의 목소리가 쩡쩡 울리고 있었다. 태극기부대들이 그렇게 공경해 마지않는 박근혜대통령이 지난 2014년 4.3 추모기념일을 정했는데도, 여전히 이에 불만이 많은 걸 보면서, 태극기부대의 골수 반공주의 노선은 21세기 세계화 시대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 같아 안타까웠다.

4.3 위령미사는 ‘평화를 주옵소서’라는 성가로 시작되었다. 단순히 전쟁과 폭력이 없는 것으로서의 평화만이 아닌, 4.3이 추구했던 바 화해상생의 미래로 나아가는 평화를 찾아야 하고, 이를 위한 하느님의 은총을 기원하는 성가였다. 이러한 신자들의 평화 염원에 대한 응답으로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이신 김희중 주교님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겠지만 용서도 하자’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어린이, 노인, 여자들이 많이 학살당한 4.3의 참혹상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두어야 할 이유는, 그래야 다시는 그런 학살과 희생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용서도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먼저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용서가 가능할 것이라는 건, 상식일 것이다.

바로 이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4.3 위령미사의 백미는 강우일 주교님의 강론이었다. 2002년에 제주로 발령 받고 와서 4.3의 진상을 하나씩 접하게 되었는데, 그 때마다,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무참하고 잔인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의 의문과 고뇌가 끊이지 않았다는 강우일 주교님이었다. 이에 대한 대답 찾기로 강우일 주교님은 3.1절에 주목하고 있다. 3.1 독립만세운동은 실패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투옥되었지만, 그 이후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항일독립투쟁이 전개될 수 있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데에서 실마리를 찾고 있다.

강우일주교님처럼 필자도 1947년부터 1954년까지 7년간 우여곡절을 겪었던 4.3의 의미를 1919년의 3.1독립운동과 연관해서 찾는 건 유의미하다는 생각이다. 즉, 4.3은 공산폭도들의 반란이 아니라 ‘진정한 자주독립’을 바라는 풀뿌리 제주도민들의 운동이라는 대의명분에 주목해야 비로소 4.3 정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진정한 자주독립이야말로 제주도민들이 그렇게 바라마지 않은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최적의 수단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렇다면, 4.3은 정치운동적으로는 ‘4.3자주독립운동’으로 명명하는 건 어떤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선 4.3을 공산폭도들의 반란으로 보는 견해는 너무 단면적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유격대가 제주도내 12곳의 지서를 습격한 데서 4.3이 시작했다고 보는 시각에서 보면 100%로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1947-8년 당시 제주도민들만 특별히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고 그래서 공산정부를 구성하고자 무장봉기했다고 보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났던 일부 무장대의 습격은 7년에 걸친 4.3자주독립운동의 한 부분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1947-8년 시점에서 제주도민들은 일부의 주장처럼 친미/반미도 아니고 친소/반소도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대세는 반일이다. 1945년 해방된 지 채 1년이 겨우 지나는 시점에서 제주도민들만 어떻게 친미/반미니, 친소니/반소니 하면서 이념적 혹은 냉전적 사고를 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할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당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로부터 일본을 내쫒는데 손을 잡은 연합군이 아닌가. 둘 다 해방군인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한쪽을 버리고 한쪽을 취할 수 있겠는가. 그건 미군정이나 소군정과 손잡고 정치권력을 탐하는 일부 정치인들의 것일 뿐이다.

1947-8년 제주도민들의 생각은 간단하다. 일본이 패망했으니, 과거에 친일해서 호의호식하던 사람들은 물러나고 우리 고장에 새로이 제대로 된 자주독립 정부를 세워 자유롭고 평등하고 잘사는 국가를 만들어 달라는 지극히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호소와 요청을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많은 도민이 죽어갈 정도로 어떤 대단한 이념투쟁을 의도하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할 역량도 없었다. 과잉진압이 문제이고, 제주도민을 얕보고 비하하는 중앙정치권의 편견과 아집이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4.3을 국가공권력에 의한 희생”이라면서 사과한 것은 지당한 것이었다. 다만 그렇게 지당한 사과도 쉽지 않을 만큼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회가 경직되고 골수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 문제이다.

4.3은 자발적인이고 자연발생적인 시위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자주독립의 열망과 기대와는 부합하지 못하는 한편으로 여전히 친일파가 활주하고 부정부패가 근절되지 않아 주민들의 삶은 피폐한 상태에서 당시 행정권을 갖고 있던 미군정에게, 제대로 된 자주독립의 정부를 구성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뿐이다. 그것은 한반도의 주인인 대한민국 국민들이 그리고 제주도민이면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제주가 소련군정 하에 있었다면, 소련군정에게 똑같이 요구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정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그에 반항했다고 해서, 이를 친소적이고 공산주의적이며 정부반란적인 봉기라고 단순화하고 색깔론으로 치부하는 것은, 오히려 제주도민들에 대한 무책임한 학살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한 정치권의 위장이자 왜곡에 다름 아니다.

4.3에 대한 정명은 제주도민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마침 문재인 대통령이 제주도민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 주겠다고 하니, 좋은 기회이다.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 늦었지만 서두를 때이다. 왜곡을 제대로 바로 잡아야 제주의 미래가 달라진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무장봉기를 주도해 놓고는 북으로 도피해 간 제주 남로당 지도부 김달삼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비판을 해야 할 것이다. 남로당 무장대의 무모한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사죄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 특히 무모하게 봉기를 일으킴으로 해서 무고한 도민만 무참히 죽도록 한 데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필자는 가끔은 4.3이라 이름 하는 것도 못 마땅해 생각하곤 한다. 왜냐하면 4.3이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김달삼과 남로당 무장대 그리고 지서습격이 자동 연상됨으로 해서 제주도민의 억울함은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4.3 이름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이념적 양극화 속에서 ‘빨갱이’라는 딱지 붙이기를 통해 군인과 경찰, 극우적 자경대들의 만행을 정당화 하는 데 악용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4.3 말고 다른 이름을 붙이는 건, 왠지 4.3 희생자의 억울함은 간 곳 없고, 또 어떤 형태로 4.3을 왜곡하고 다른 정치적 용도로 쓸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이왕 어렵게 4.3으로 70년을 살아왔으니, 이제는 과거와 같은 이념적 굴곡에서 벗어나고, 그럼으로써 7년에 걸친 4.3의 진실을 보다 더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널리 알린다면, 오해와 왜곡은 크게 줄어들 것이라 본다. 그런 점에서 올 4.3 70주년을 맞이하여 범국민위원회 등 여러 4.3 단체들이 4.3 전국화에 나선 건, 큰 성과이자 보람일 것이다.

그렇다고 4.3을 학살로 이름붙이는 건, 한편으로는 가해자의 악랄함만을 드러내 보이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희생자들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그것도 찬동하기 어렵다. 물론 분명 당시 제주도민의 10%인 3만여명의 억울한 죽음을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데는 학살만큼 더 적절한 명명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필자는 강우일 주교님의 지적처럼 제주도민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그 죽음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사후에라도 제대로 명명해 주어야, 덜 억울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많은 제주도민들이 제 명대로 못살고 정말 억울하게 죽었는데, 그 죽음이 70년이 지나도 헛된 것이라면, 그 억울함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억울한 죽음이 안 되려면, 그 죽음은 헛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게 김우일 주교님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내린 결론인 듯싶다. 깊이 공감한다.

다만 필자는 강우일 주교님이 내비친 ‘4.3항쟁’이란 명명에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제대로 된 자주독립을 주창하며 제주도민들이 미군정과 이승만정부에게 그리고 무지막지한 국가공권력의 횡포에 대해 자위적 차원에서 항쟁을 벌였다고 보는 것은, 일면 타당하고 사후적 정명으로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래서 다분히 목적론적이고 또 4.3의 죽음을 승화시키려는 차원에서 지난 세월 재야권에서는 4.3민중항쟁으로 글도 나오고 책도 나오고 토론회에서도 널리 주창되어 왔다. 그런데도 필자가 굳이 4.3을 항쟁이 아니라 운동으로 명명했으면 하는 이유는, 우선 언어의 부드러운 느낌 때문이다. 항쟁은 너무 세고, 또 그런 만큼 항쟁은 그에 역반응하는 것으로서의 무참한 학살에 자칫 정당성을 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이다. 대한민국 사회가 아직은 반공주의가 힘을 발휘하고 있어서, 항쟁이라는 명명은 남로당 유격대의 지서 습격을 연상시켜 즉각 골수 반공주의적 반발을 불러일으키리라 보는 것도 그 한 이유이다.

그래서 앞에서 제언한 것처럼, ‘4.3자주독립운동’이라는 보다 온건하면서도 보편적인 명명이 보다 국민 사이에서 수용성이 높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광주민주항쟁이나 부마항쟁보다는 광주민주화운동과 부마민주화운동으로 하는 이유도, 항쟁이 자칫 본의 아니게 특정의 투쟁대상을 염두에 두고 전투적인 인상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4.3 위령미사를 드리면서 ‘4.3자주독립운동’으로 명명하는 게 더 좋아 보이겠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된 것은, 바로 4.3 위령미사 때의 마지막 성가가 ‘평화의기도’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기도’를 보면,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으로 시작한다. 항쟁은 무언가를-누군가를 거부하고 미워하는 느낌을 준다. 4.3 위령미사 시작 때 김희중 주교님이 강조한 것처럼, 4.3의 정신으로는 용서가 더 좋아 보인다. 학살자를 용서해야, 4.3이 산다. 학살자는 보통 국가권력을 지칭하지만, 또한 많지는 않지만 이른바 ‘산사람’에 의한 죽임도 용서를 청해야 한다. 다만 제3자는 쉽게 용서하라고 하지만. 당사자로서는 용서가 쉽지 않다는 데에 인간사의 어려움이 있다. 인간의 의지를 넘어선 초월자의 은총을 구하는 4.3 위령미사가 장엄하게 치러진 데에는, 이러한 인식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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