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 훈/ 제주출신으로 제주일고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먼저, 질문부터 해 보자. 프랑스 아이들이 ‘엄마’ 다음으로 많이 하는 말은 무엇일까? ‘왜?’라고 한다. 하기야 사람은 원래 호기심 덩어리로 태어나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삶이란 게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므로 제대로 살자면 세상을 잘 알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물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르는 것을 아는 것에서 큰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아이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묻는다. 그런데 우리 부모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개별적으로 보면 같은 나라 안에서도 차이가 많아 일률적으로 말하는 것이 어렵겠으나, 우리가 프랑스 부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이들의 왕성한 호기심을 귀찮아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어떤 부모들은 심지어 그런 거 알 필요 없다고 윽박지르기조차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차츰차츰 질문을 거둔다. 교육열에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우리 부모들은 겉보기와는 정반대로 반교육적인 태도를 실천하며 산다.

프랑스 부모들은 언뜻 보기에 엉뚱한 질문에도 꼭 대답을 한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쓸데없는 질문은 없다. 허구를 특징으로 삼는 문학은 이런 유형의 질문에 기대지 않고는 나올 수 없다. 문학의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현실 너머를 꿈꾸는 상상력을 그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어디 문학뿐이랴! 감성을 중시하는 문학과는 달리 냉철한 이성의 작용을 바탕으로 삼는 과학의 발전에도 엉뚱한 발상이 꼭 필요하다. 기존의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늘 의심의 눈으로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학교 교육도 사실은 우리 부모의 태도와 그리 다르지 않다. 질문해서 스스로 답을 찾기보다는 선생의 말이나 책에 나와 있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도록 길들인다. 우리 학생들이 질문을 꺼리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정답을 찾는 것을 위주로 하는 공부 방식 탓이다. 이른바 객관식 문제가 이런 태도를 갖도록 세뇌시킨다. 내 생각은 필요 없다. 정답으로 제시된 것을 외우기만 하면 된다. 정답만 필요하므로 학생 스스로도 질문하는 동료에게 시간 뺏는다고 눈을 흘기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암기가 필요한 것일까? 이제 웬만한 정보는 우리가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에 들어 있다. 그런 걸 학교에서 외우고 시험까지 봐야 할까? 기계가 다 해결해 주는 세상에서 이런 일에 힘과 시간을 바치는 것은 괜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암기가 강조될수록 정답이 중요해지고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은 존중받지 못한다. 그래서 비판적으로 따지는 능력을 상실해 간다.

한국 유학생들에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는 말을 읽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질문이 없다, 자기 생각이 없다, 토론할 줄 모른다는 것이 그것이다. 외국어와 환경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하겠으나,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으로 보건대 터무니없는 악담은 아닌 것 같다. 수업하면서 질문하라고 수없이 요구하지만 반응은 시원치 않다.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에 대해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는 어떤 것을 모른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있으니까 알려고 노력하게 된다. 읽을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책이 책을 부른다고 할 만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책들로 이루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곳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모른다고 의식한 것에 대한 뜻하지 않은 선물이다!

그런데 반대로 책을 읽지 않으면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니까 다 아는 것처럼 굴게 된다. 그래서 책도 질문도 필요 없다.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뭐 하러 눈과 머리 아프게 책을 읽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질문하지도 않거니와 질문 받는 것도 싫어한다.

제대로 알려면 물어야 한다. 정답을 아는 것은 쉽다. 정보를 모아 놓은 책을 기계적으로 외우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질문은 의식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잘 나오지 않는다. 문제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봐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어떤 경우에는 기존의 답이 갖고 있는 권위에 도전하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억압적인 사회에서일수록 정답은 힘이 센 사람들이 정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문제 제기를 달가워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아예 금지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창조적인 질문은 쉽지 않다. 해 오던 대로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습관의 힘은 무섭다. 그래서 상투적인 대답과 삶이 나온다. 일상의 늪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면서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된다.

이렇게 금지와 습관에 길들여진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능력과 소질을 묻지도 않은 채 그냥 점수에 맞춰 대학에도 가고 전공도 정한다. 결국 고정관념과 관습, 유행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르는 사람이 된다. 여기에 나라는 존재는 없다.

질문하지 않으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자꾸 물어야 개인적인 성숙도 도모하고 더 나아가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도 이바지할 수 있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낸 것만 참다운 지식이 된다. 질문 없이 그냥 얻은 답은 시험 보고 나면 다 잊힌다. 아마 다들 공감할 것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다 이유가 있어 생긴 것이다. 그 이유를 알려면 물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다.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열심히 물으면 저절로 공부가 즐거워진다. 공부가 지겹게 된 것은 질문하지 않도록 학생들을 몰아가는 우리 교육 현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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