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권무일/ 소설가, 역사소설 <의녀 김만덕>, <남이>, <말, 헌마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 수상록 <어머니 그리고 나의 이야기>, 평설 <이방익 표류기>

1. 길트기

220년 전 제주 북촌을 출발하여 우도 앞바다에서 표류했고 중국을 거쳐 9개월 만에 돌아온 북촌사람 이방익의 발자취를 따라 대장정(大長程)을 떠나기로 한 우리들(심규호, 진선희, 권무일, 노인숙 그리고 촬영기사)이 북촌 포구에 모였다. 2018년 4월 21일이었다. 한라일보사 임직원들, 제주문화포럼 회원들, 길생태해설사 회원들, 그리고 북촌리 윤인철 이장이 자리를 빛내주었다.
 북촌리 해신당 가릿당은 예부터 북촌사람들이 어업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전이다. 간단한 제물을 배설한 이곳에서 심규호(제주국제대 교수)가 읊어대는 쩌렁쩌렁한 축문 소리는 파도를 타고 바다로 울려 퍼졌다.
 “이방익 표류기를 따라 새로운 탐사의 길을 찾는 이들이 함께 모여 정성과 열정으로 천지신명께 고하나이다. 한라산 산신령님, 제주바당 용왕님, 서북계절풍을 몰고 오시는 영등할망님, 북촌 터줏대감님 여러 신령께서 저희의 작은 정성을 흠향하시옵소서‧‧‧”
 풍물패 <제주두루나눔>이 풍악을 울리며 바다로 가는 길트기에 나섰고 함께 한 이들이 풍악에 맞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뒤를 따랐다. 우리들은 풍물패와 더불어 작은 배에 올라 바다로 나가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마치 이방익을 포함한 8명이 북촌을 떠났을 때의 모습을 상기하듯‧‧‧. 부두에는 사람들이 모여 떠나가는 배에 손을 흔들었다. 배는 다려도를 향해 나아갔고 배에서는 구성진 풍악소리가 파도물결을 따라 마을과 바다와 하늘에 퍼져나갔다.
 우리가 여기서 작은 퍼포먼스를 벌이는 것은 이방익이 북촌리에서 태어났고 무과에 등과한 후 중앙에 진출하여 무겸선전관을 거쳐 충장위장을 지냈고 40세에 제주에서 표류한 9개월 만에 생환하여 정조임금의 배려로 오위장과 전주중군을 지냈고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1796년, 정조20년 9월, 임금을 최측근에서 호위하던 충장위장(정3품) 이방익은 잠깐 말미를 얻어 고향 제주를 찾는다. 그는 동네 사람 7명과 더불어 작은 배를 타고 우도에 다녀오다가 일진광풍을 만나 먹고 마실 것도 없이 돛대도 부러지고 노와 삿대도 없이 6,000리를 흘러 대만해협의 팽호도에 표착한다. 이후 이방익 일행은 대만‧하문‧복건‧절강‧항주 그리고 양자강을 거슬러 동정호까지 두루 다니고 북경을 거쳐 만주를 통과하여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렇듯 이방익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양자강 이남의 중국을 처음 목격한 사람이기에 그의 표류기는 대단한 시대적 의미를 갖는다. 조선시대 많은 지식인들이 중국 강남을 이상향으로 삼아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지만 그것들은 실제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글과 그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방익이 본 시가와 관청, 고적과 유물 등은 중국의 역사이며 문화이고 그가 엿본 풍물과 풍속은 중국의 살아있는 모습이며 이방익의 표류담은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국제적 상황, 급격한 사회변화, 백성들의 생활상, 포용적 정치문화를 폭넓게 담고 있다.

이방익은 제주사람들에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나는 묻힌 값진 유물을 발굴하는 심정으로 수년간 이방익의 행적에 대한 자료수집에 열중했다. 박지원의 「서이방익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서 이방익에 관한 기록을 찾아냈다. 특히 이방익이 순수 쓴 가사 「표해가」와 순한글 기행문 「표해록」은 귀중한 자료였다. 나는 작년 8월 이들을 집대성하여 평설 『이방익 표류기』를 단행본으로 펴냈고, 9월17일에 출판기념토론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때 이갑도(북촌리), 강만생(한라일보 사장), 펑춘타이(중국 제주총영사) 등이 축사를 했고, 김석희(번역가), 양영길(문학평론가), 심규호(제주국제대 교수), 진선희(한라일보 문화부장) 등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토론회 휴식시간에 펑춘타이 총영사가 느닷없이 내 아내 노인숙을 만나고 싶단다. 중국문학을 약간 공부했고 나의 집필에 도움을 주었다는 <작가의 말>을 읽고는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펑 총영사는 심규호 교수를 통해서 우리 부부를 총영사 관저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총영사는 우리 부부로 하여금 이방익 발자취를 따라 걸어보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권했다. 나의 이방익 표류기를 홍콩학회에 소개했고 중국학자들과 빈번한 교류를 하고 있는 심 교수 부부가 동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답사에 펑 대사가 기꺼이 협찬을 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팽호도를 포함한 대만 답사는 차안(此案)에 부재(不在)라고 선을 그었다. 나는 한라일보 강만생 사장을 찾았다. 그는 한라일보 취재팀으로 하여금 우리와 합류하도록 할 것이며 대만지역 답사에 드는 비용은 한라일보에서 대겠다고 한다. 한라일보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는데 성공했고 심 교수는 통역 명목으로 지원에 포함되었으며 ‘더제주’(대표 양길현)에서 비용의 일부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나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몇 가지 점에서 난감했다. 첫째는 나의 연령과 건강문제였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지만 장정을 떠나는 올해 내 나이 77세인지라 자식들이 무척 염려를 했다. (그러나 나는 건강하고 아내가 꼭 옆에 붙어 다니니 걱정할 것이 못된다고 자식들을 설득했다.) 둘째 이번의 장정이 그냥 가보고 사진 찍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야 하며 중국의 역사를 뒤적거리고 참고문헌을 찾아서 살을 붙여 출판하여야 하는데, 지금 나의 기억력과 노쇠한 필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지 문제였다.
 그러나 우리는 떠나기로 했다. 풍토가 다르고 기후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이국땅을 여러 날 여러 번에 걸쳐 육로로 돌아다닌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역이겠지만 이러한 희귀한 경험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정했다.

(1) 이방익이 지나간 도정을 따라가면서 그가 보고 겪은 문물, 경관, 고적, 제도,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여 이방익의 행적을 확인하고 그의 표류기를 보충하여 재구성한다.
(2) 18세기경 대만해협과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되는 국제적 상황, 중국사회의 변화, 백성들의 생활상, 상업과 무역의 발달로 급격하게 변모하는 강남의 모습을 탐구한다. 
(3) 중국 학계와 공동 작업을 시도한다.
(4) 이방익의 행적과 작품세계를 여러 경로를 통하여 중국에 알린다.
(5)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이해하고 중국과 한국은 공통된 문화를 공유한 편안한 이웃임을 인식을 갖는데 기여한다.
(6) 한중 문화교류에 기여하며 특히 제주도와 중국 남방문화권의 교류와 활동을 촉발시킨다.

우리는 2018년 4월 27일 역사적인 대장정에 첫발을 내딛는다. 220년 전 이방익이 걷던 길을 따라 대만해협의 팽호도에서 대만, 중국 최남단 하문에서 복건, 절강, 항주까지, 양자강을 거슬러 동정호로, 되짚어 소주까지, 이어서 산동반도를 거쳐 북경에 이른다. 그리고 길고 먼 만주 벌판을 달려 압록강까지 갈 예정이다. 그 기간 내내 중국 땅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10일 내지 15일간 답파하고 한국에 돌아와 정리하고 다시 떠난다. 일 년은 넘어 걸릴 것 같다. 이방익이 제주도 연안에서 표류하여 팽호도에 표착할 때까지의 6,000리 길은 감히 우리가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아 나중에 해양을 탐구하는 이들에게 맡기고, 나는 표해과정을 더듬어가면서 이방익의 체험담을 각색하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여기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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