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국가 재건과 사회 개혁의 길 위에서 리민용(李敏勇)

 

1. 기억의 궤적을 찾아서

 

1945년 8월 15일

바다 저 너머로부터 해방의 소리가 들리고

식민지의 아이는 무엇인가 달라진 하늘을 바라본다

새의 비상이 전투기(軍刀機)를 대신한다

 

일본군은 섬의 금지된 쇠사슬을 열고

태양기를 내렸다

그러나 우리는 탑에 깃발을 올리는 걸 잊고

우리의 신분을 나타냈다

 

종전의 그날

기쁨 중에 우리는 방황하며

식민지의 직인을 철거하는 걸 잊는 바람에

우리에게는 절망적인 역사가 계속되었다

 

잃어버린 기억의 날들이

새로운 쇠고랑에 봉쇄되어

섬의 신분을 모호하게 만들었고

하늘을 향한 우리의 동경을 막아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역사를 닦고

기억의 바퀴자국을 찾고 있다

쇠고랑에 아픈 우리의 손으로

닫힌 책갈피의 역사를 펼쳐야 한다

 

-「잊혀진 역사(被遺忘的歷史)」

 

대만과 한국은 -북조선까지도 포함하여-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옛 중국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으며 근대에는 각각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대만은 할거되었고 한국과 북조선은 조선시기에 일본에 의해 강점당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조선의 좌우익 독립운동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건립되었다. 한편 대만은 대표연합군(代表盟軍)에 접수되어 중화민국의 점거통치(據佔統治)를 받았다.

1945년 10월 25일은 중화민국 대표연합군이 대만을 접수했던 날이다. 하지만 점거통치라는 상황으로 인해 (10월 25일이) 대만의 광복절이 되었다. 전 세계 다른 식민지국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인 8월 15일이 보통 광복절이면서 독립기념일이지만, 대만에서 (이 날은) 사라져버렸다.

대만에서 8월 15일은 일부러 지워버리고 잊어버린 날이다. 1945년 10월 25일 중화민국 통치당국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성대하게 경축행사를 했다. (대만은) 대만행정장관공서(臺灣行政長官公署) 설치 ․ 유사 식민통치(類植民統治)의 실시를 시작으로, 항전을 통한 승리 곧 중일전쟁(일본의 중국 침략전쟁)의 승리는 중화민국이 대만을 위해 겪은 천신만고라는 사실에 대가를 치렀다. 사실 대만이 일본식민통치에서 해방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의 종식이 가져온 선물이고, 미국을 수장으로 한 아시아 연합군의 승리가 가져온 선물이다.

2차 세계대전의 종식 후, 중화민국이 통치하던 중국대륙은 중국공산당의 무장혁명 상태에 빠져들었다. 중화민국을 통치하는 중국국민당은 대만을 점거함으로써 사실상 착취하는 유사 식민지로 삼았으며, 행정장관공서를 통치기관으로 하고 행정기관은 설치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이러한 마음 상태이다. 대만 점거 통치 초기, 중국의 좌우익인사들이나 통치당국을 통해 대만에 파견된 이들은 50년간 일본식민통치를 받은 대만이 중국본토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본래 조국과 친밀했던 대만인들은 1895년 할양되고 나서 1945년 종식될 때까지 일본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았다. 청(淸)왕조에서 중화민국 정부로 변화한 중국은 아시아의 첫 번째 민주공화국으로서 대만에 대해 조국으로서의 곤혹스러움과 장벽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공화국으로서의 중화민국 정부는) 대만인들에게 (어떤)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중국민국 건국이후 줄곧 민주화는 실시되지 않았고, 게다가 중국공산당이 중화민국을 전복하려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에) 대만 역시 국민당 중국과 공산당 중국의 내전 상황에 휘말려 들어갔다.

2차 세계대전 후의 대만은 독립의 절호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광복은 터무니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대체된 후에, 대만으로 망명한 중화민국 정부는 점거통치하고 있던 대만을 반공(反共)과 반격(反攻)의 기지로 삼았다. 일당화(一黨化)를 추진하고 장기적인 계엄통치를 실시했다. 1949년 제정한 헌법을 동결했을 뿐만 아니라 「반란평정 시기 임시 동원 조항(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에 근거해 군사통치를 했다.

대만은 대표연합군이 접수하고 나서 점거통치가 실시되었다가 중화민국이 중국대륙에서 교체당한 후에는 망명지가 되었다. 반공과 반격의 기지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소대립의 냉전상황 속에서 한국과 마찬가지로 반공전선을 형성하면서 미국의 보호를 받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극단적인 장제스(蔣介石) 정권 역시도 공고해졌다.

그러나 계엄통치, 일당의 장기 독재는 계속해서 내부의 민주의식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또한 이 때문에 통치권력의 억압과 통제 역시 계속되었다. 국내외적 정치상황이 변화하면서 1970년대 말 미려도(美麗島) 가오슝(高雄) 사건이 발생했다. 1980년대, 199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선거가 실시되었고, 정권 역시 본토화의 흐름 속에서 대만의 국가주체로서의 재건(重建)을 전개했다. 그리고 사회 개혁을 위해서도 전력을 다했다. 결국 되돌아보면, 무자비하게 억압되었던 1947년의 2. 28 사건이 민주화의 계기가 된 것이다.

 

2. 구속당한 펜, 불리지 못하는 노래

 

사멸하는 해에

내가 태어났다

 

목이 쉬어버린 대만의 역사

침묵에 봉쇄된 언어

 

구속된 펜

소리를 금지당한 노래

 

처참하게 말이 없는 입술

암흑의 밤에 떠도는 마음

 

생명의 날인

1947

 

-「1947(一九四七)」

 

내가 태어난 그 해, 대만에서는 2. 28 사건이 발생했다. 수많은 지식인 ‧ 문화인들이 살해되었고 대만 본토의 문화는 진공상태가 되었다. (2. 28 사건은) 정치적으로 금기시되었다. 사건은 1947년 2월 27일 발생했다. 관방이 사제담배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생긴 충돌이 그 원인지만, 사실은 중화민국의 점거통치, 대만 행정장관공서의 탐욕과 부정부패에 대해 그동안 쌓였던 사람들의 원망이 촉발된 것이다. 충돌이 일어나자 수습은 불가능해졌다. 사건 발생지인 타이베이를 시작으로 그 다음 날인 2월 28일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확대되었고 심지어 동부로까지 번졌다. 사람들이 힘을 모아 봉기했고 각지에서 관공서를 포위했다.

대만 행정장관공서는 우선은 민의가 반영된 중재위원회(調解委員會)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화해위원회는 각지의 존경받는 사회인사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난징(南京) 정부에 대만으로 군대를 파견해달라는 연락을 취했다. 3월 초, 군대가 지롱(基隆)항에 상륙한 후 피비린내 나는 진압이 전개되었다. 더군다나 화해위원회에 참여했던 인사들까지 체포되었다. 대만 전체에서 대거 체포와 대학살이 벌어졌다. 후에 희생자가 2만 여명에 달했다고 통계되었다. 이 사건을 2. 28 사건이라 부른다. 일제시기 양성된 대만의 지식인 ‧ 문화인들은 거의 다 학살되었다. 조국이라는 의미는 곧 파멸세력이었다.

2. 28 사건이라는 기회를 이용해 전후(戰後) 본래 마땅히 국가건설에 참여해야 하는 대만의 문화세력을 제거한 것이다. 대만인들은 이 사건의 공포로 인해 1987년까지도 줄곧 화합하지 못했다. 사건이 발생하고 4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공민평화(公民和平)운동’이라는 이름(名義)으로 새로이 규명에 나설 수 있었다. 1987년 나는 대만인권촉진회(臺灣人權促進會)가 참여 발기한 운동에 참가했다. 「이날, 우리로 한 그루 나무를 심게 하라(著一天 讓我們種一棵樹)」를 기도시(祈禱詩)로 썼는데, 후에 이를 노래가사로 바꾸었다. 여기에 작곡가 샤오타이란(蕭泰然)의 곡을 붙여 「사랑과 희망의 노래(愛與希望之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여기에 곡을 하나 더해서 「1947년의 서곡(一九西七序曲)」을 완성했다.

2. 28 사건은 전후 대만의 사멸의 흔적이다. 그해에 태어난 나를 비롯한 동년배의 전후세대는 ‘47사’(四七社)를 결성했다. 1990년대의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문화예술계 ‧ 문화학술계 ‧ 사회운동계 및 정치계에서 ‘사멸된 해에 태어난 세대’가 이끄는 대만 국가 재건과 사회개혁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그리고 신세기로 진입하는 2000년대에는 정권교체를 통한 대만 통치권력의 변화를 기대했으며, (마침내) 그것은 실현되었다.

대만이 1949년부터 1987년까지 계엄통치 하에 있었던 - 사실상 금기의 시대에 문학예술계에서의 표현은 고압적인 통제를 받았다. 억압받았던 대만 본토문학계는 1960년대 중기에 이르러 소설가들이 주축이 된 󰡔대만문예(臺灣文藝)󰡕, 시인들이 중심이 된 󰡔갓(笠)󰡕이 각각 만들어지면서 조금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갓󰡕의 본토시인들은 황관을 쓰지 않고 삿갓(斗笠)을 씀으로써 민중의 입장에 서서 현실경험을 새로이 응시하였다. 나는 1960년대 말 󰡔갓󰡕에 가입하고 일원이 되었다.

1960년대 초 고등학교 재학 시절 나는 처음으로 2. 28 사건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유연체조를 하고 쉬는 중에 학교의 체육선생님 한 분이 학교 교실 벽의 갈라지고 구멍 난 흔적을 가리키며 그것이 2. 28 사건 당시 군대가 참여한 학생들을 향해 총격을 할 때 남겨진 탄흔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역사적 기억의 씨앗이 되었고 내 가슴속에서 싹을 틔웠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2. 28 사건에 대해 가장 처음으로 언급한 두 편의 시-「불사조(不死的鳥)」와 「피비린내 나는 기억(血腥記憶)」이 되었다.

죽은 고향 상공에서

한 무리의 새가 빙빙 날고 있다

마치 날고 날아

억울함을 꾹 참는 시편처럼

 

……

 

-「불사조(不死的鳥)」

 

학교 담 벽돌에 남아있는 총알구멍으로

섬의 역사를 바라본다

 

피비린내가

공기 중에 돌고 있다

 

……

 

-「피비린내 나는 기억(血腥記憶)」

 

망령의 부활로 비유될 수 있는 나는 불멸하는 의지를 품고 시인의 길을 걸었다. 이는 일종의 숙명과 같았다. 나의 개입과 참여는 이러한 역사적 숙명에 사로잡혔다. 1960년부터 1970년대 초기까지의 시집 󰡔진혼가(鎭魂歌)󰡕에서의 반전(反戰), 위령(慰靈)을 시작으로 1970년대 후기 시집 󰡔야생적인 사고(野生思考)󰡕의 정치비판은 곧 나의 시가 품은 뜻이 체제부합보다는 상대적으로 재야시인의 입장에 있음을 보여준다.

1950년대의 백색테러는 2. 28 대학살에 이어 잠재적인 공산당원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벌어진 정치적 숙청이었다. 이는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교적 안정되었다. 계엄통치를 실시한 정치당국은 반공(反共)을 국책으로 내세워 국책문학(國策文學)을 조장했고, 일당화(一黨化)를 추진하는 등 국가 전체를 통제했다.

 

3. 당신은 나의 증오의 발자국을 포착할 수 없다

 

밤이 깊어진 후

현실에 하나의 결함이 생겼다

난 어디로든

도망쳤다

 

비록 당신이

평생 감금된 죄인처럼

내 일생을 감금한다 해도

 

그래도

도망친 이후의 나는

자유이다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손금을 잡기는커녕

내가 증오하는 발자취조차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꿈(夢)」

 

내가 1970년대 중후반에 발표한 󰡔야생적인 사고󰡕에 「꿈」이라는 시 한 편을 실었다. 이 시 속의 ‘당신’은 계엄통치권력을 가리킨다. 이러한 통치권력은 내 인생을 감금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꿈’이라는 은유는 시인인 나의 시이며 또한 나의 사상과 감정이다. 시속에 존재하는 은유는 마치 현실의 틈을 통해 도망친 꿈과 같다. 꿈속에서 나의 언어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나의 사랑은 내가 추구하는 것이며, 나의 증오는 내가 비판하는 것이다. 바로 언어의 은유 때문에 통치권력은 알아챌 수 없다.

야생적인 사고는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사고를 의미한다.

나의 1970년 초기 시집 󰡔진혼가󰡕의 반전(反戰)과 비교한다면 󰡔야생적인 사고󰡕의 정치비판은 통치권력을 겨냥한다. 1971년 UN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지위였던 중화민국의 대표권이 해제되고,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에게로 넘어갔다. 대만을 점거통치하던 중화민국은 차라리 일반적인 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릴지언정, 대만이란 명의로는 UN에 남지 않겠다고 버텼다. 대만의 입장에서, 이는 대만이 계속해서 국제무대에서 국제법적 지위를 잃어버리도록 만들었다.

(대만에서는) 2. 28 사건부터 백색테러의 50년대, 60년대까지 점차 통제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비록 아직 계엄시대에 놓여 있었고 중화민국은 여전히 장제스 체제 아래에 있었지만, 1970년대에 대만은 국가의 지위와 존재론적 환경에 대해 사유했다. 문학방면에서 1977년의 향토문학논쟁은 더 이상 관방의 통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회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977년의 향토문학논쟁을 두고) 정부가 조작한 일부 여론에서는 현실에 개입하는 문학작품이 혁명시기 중국공산당에서 발동한 공농병(工農兵) 문예현상에 해당한다고 성토했다. 이어 정치선거에서의 정부의 부정행위 역시 저항에 부딪혔다. 시민 역량의 각성을 보여주는 민중항의가 일어났다.

1979년 12월 10일 미려도(美麗島) 잡지가 주축이 되어 세계인권의 날을 호소(號召)하는 시위행진이 가오슝에서 거행되었다. 폭력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통치당국에 의해 시위행진이 사전에 진압되는 미려도 가오슝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가 통제하는 신문매체를 통해서 민주화운동에 폭력이라는 오명을 씌우려는 조작을 기획했다. 사건 발생 후에 많은 정치적 의견을 달리하는 인사들이 체포되었고 그 중에는 두 명의 작가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각각 군사재판과 일반사법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공개된 재판과정에서 시민들은 통치권력의 폭력성을 더욱 분명히 보게 되었다. 미려도 정치집단이라는 이름으로 구금된 수많은 정치인사들의 가족들은 후에 이어진 국회의원선거 및 지방행정수장 선거에서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국회에 입성하거나 지방행정수장에 당선되었다. 대만의 작가 양칭추(楊靑矗)와 왕투어(王拓)는 미려도 사건으로 감옥에 갔다. 그러나 이 사건은 더욱 많은 대만 작가들이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도록 독려했다.

1984년 국제 엠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 표준을 참고하여, 감옥에 구금된 정치양심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설치된 대만인권촉진회가 성립되었다.

나와 일부 대만 시인, 소설가들은 대만인권촉진회에 가입했다. 이들 대부분은 󰡔갓󰡕과 1964년 둘로 나눠진 󰡔대만문예󰡕 그리고 ‘대만인민자구운동(臺灣人民自救運動)’이 발생한 그 해에 창간된 간행물의 작가들이었다. 나는 ‘대만인권촉진회’의 집행위원을 맡아, 작품말고도 더욱 실천적으로 대만정치개혁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시기에 쓴 나의 시 「어두운 방(暗房)」에서는 대만의 현실을 ‘어두운 방’에 비유했다.

 

이 세계는

밝은 사상을 두려워한다

 

외침은 모두

그 출구가 막혀버렸다

 

진리는

상반된 형식으로 존재한다

 

그저 약간의 빛만 침투했다하면

모든 것은 파괴된다

 

-「어두운 방(暗房)」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환경보호 ‧ 노동운동 ‧ 인권추진은 자주 병합해 진행됐다. 참여자로서 항상 거리에서 시위행진을 했다. 시적 은유에서 행동의 직접적 개입으로 옮겨간 것이다. 나의 문학적 저항은 때때로 현상을 직접 겨냥했다. 「계엄풍경(戒嚴風景)」은 바로 현실을 포착한 것이다.

 

빗물이

변색된 하늘에서 쏟아진다

진압부대의 방패가

번갯불에 빛을 발하고

무장경찰의 곤봉도

벼락 침에 반짝이고 있다

 

도시에

하나의 새로운 경계선이 나타났다

한쪽은 비무장의 군중이고

한쪽은 가스 최류탄

민성로(民生路) 민첸로(民權路)에서 민주로(民族路)까지

서로 대치하고 있는 습기로 축축한 어두운 밤

 

-「계엄풍경(戒嚴風景)」

 

미려도 사건 발생 후, 정부는 군법(軍法) ‧ 사법(司法)이라는 두 종류의 심판과정을 빌려 많은 반정부 정치인들을 구금했다.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반정부인사들이 특히 많았다. 1980년대 나의 시풍경은 시집 󰡔계엄풍경󰡕에서 드러나는 저항이미지였다. 대만인권촉진회의 인권조직에 가입하면서, 나는 글을 쓰는 일에서 보다 실천적인 개입과 참여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1947년 탄압되고 통제되었던 2. 28 사건과는 다르게, 1979년 미려도 사건은 대만이 일어서게 만들었다.

 

4. 기울어진 섬에서 우리가 아직 탄생시키지 못한 나라를 수호하다

 

우리는 언어의 성루(城堡)를 쌓고

기울어진 섬에서

우리가 아직 탄생시키지 못한 나라를 수호하고 있다

 

모종의 사악한 힘이

계속해서 우리의 건축을 파괴하려 해도

무장한 문화군단(文化兵團)이 우리의 땅을 순찰할 것이다

 

우리의 손에는 의미의 참호가 파놓은 발전의 통로가 있다

또한 성루 주변에는 촘촘히 심겨진 선인장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시의 방패(詩的盾牌)」

 

1987년 2월 28일, 2. 28 사건 40주년이 되던 해 내가 조직구성에 참여한 대만필회(臺灣筆會)가 성립되었다. 이것은 재야를 표방하고 계엄통치체제에 반대하는 일군의 작가들, 시인 ‧ 소설가 ‧ 산문가 및 편집인을 포함하여 구성된 단체이다. 나는 「대만필회성립선언(臺灣筆會成立宣言)」의 초안 작성을 맡았으며, 비서장을 담당했다. 후에는 회장(1993~1994)을 지냈다. 대만필회는 “작가라 함은 마땅히 정신적인 정부(政府)이다. (작가는) 인간의 입장에 서서, 공리와 정의를 견지하고 평화와 사랑을 준수한다. 문학작품과 예술적 창작, 평론과 연구를 통해 사회비평을 통해 특히 문화운동을 통해 의의와 가치를 확연히 드러낸다.”라고 선언했다. 또한 “모든 작가들은 시대의 시인이며 사회의 양심이다. 본토를 실현한다. 마음을 활짝 연다. 그리고 세계적인 시야를 가지고 대만문학예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라고 호소했다. 나아가 다음의 8개 항의 문화개혁안을 제안했다.

 

1. 작가의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라. 어떤 방식의 언론 자유 압제에도 반대한다.

2. 작가의 존엄을 보호하라. 문예단체에 대한 당(黨) ‧ 정(政) ‧ 군(軍)의 농락과 구속에 반대한다.

3. 출판 ‧ 영상 ‧ 희극의 발전을 촉진하라. 어떤 부당한 조사와 금지, 압수에도 반대한다.

4. 일체의 문학예술 정보를 개방하라. 사상의 흐름을 저해하는 일체의 조치에 반대한다.

5. 대중보도매체에 대한 모든 제한을 해제하라. 신문 ‧ 텔레비전 ‧ 방송국 및 기타 정보 독점에 반대한다.

6. 대만 본토의 역사 문화를 존중하라. 모든 왜곡과 조작에 반대한다.

7. 대만 각 지역의 모든 모어(母語)를 존중하고 이중언어(雙語) 교육을 실시하라. 모어 보급을 방해하는 일체의 조치에 반대한다.

8. 초중고 각 단계별 학교의 대만역사 ‧ 대만문화 과정을 늘리고, 대만문학예술연구기관을 설립하라. 대만 본토를 등한시 하는 교육 정책에 반대한다.

 

대만필회가 설립된 이후, 1987년 7월 15일 통치당국은 38년간(1949~1987)의 계엄통치 해제를 선포했다. 대만의 정치개혁이 조금씩 추진되었다. 1988년 장징궈(蔣經國)이 사망으로 장씨 부자의 통치가 끝나고, 대만 본토 출신의 리등휘(李登輝) 부통령이 대통령을 대행(代行)했다. 그리고 (리등휘는) 1990년 국민대회선거를 거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만정치와 문화의 본토화는 신기원을 이루었다.

1979년 미려도 사건과 1980년 한국광주민화운동을 비교하면 시점이 거의 일치한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47년 2. 28 사건과 1948년의 4. 3 사건 역시 시대가 상당히 비슷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한민족(韓民族)은 분열되어 남한과 북조선이 되었다. 한편 대만은 중화민국 대표연합군이 접수하여 점거통치 하였다. 그리고 후에 망명하여 대만으로 넘어온 정권으로 인해 대만의 중화민국과 해협 건너편의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는 적대적인 정세가 형성되었다. 반공(反共)은 과거에 공통적으로, 대만과 한국에서 독재정권이 정권을 유지하는 구실이 되었고 미국의 지지를 얻는 동력이 되었었다. (두 나라 모두) 40년의 군사통치를 겪으면서 엄청난 진압과 학살의 역사를 경험했다.

대만은 애초에 1895년에서 1945년까지 청나라가 일본에 할양한 50년의 식민통치 때문에 중국과 분리되었다. 중국과는 다른 문화양상과 생활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을 환영하는 것에서 중국을 거부하는 태도로, 중화민국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변화하는 등 제2차 세계전후의 대만인들도 전후 실질적인 정치변화를 겪었다.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인식과는 다르게 발전했다. 전후 2. 28 사건에서부터 오랜 계엄시기의 일당통치, 민주화의 발전은 중국과는 독립된 새로운 주권국가의 추구를 가져왔다. 오랜 기간 문학이 유사식민지, 독재정치에 예속되는 상황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대만작가들이 본토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민주화와 본토화 운동에 뛰어들어 참여하도록 촉구했다.

1990년대 문학적 개입과 사회적 참여 이외에도, 나는 호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47사(四七社)’를 조직했다. 2. 28 사건이 발생한 해에 태어난 동년배들이 모여 국가재건과 사회개조를 위해 노력하는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문집 󰡔재건과 개조(重建與改造)󰡕 ‧ 󰡔각성과 재생(覺醒與再生)󰡕을 공동으로 출간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신문과 잡지 등의 전문란에 시사비평을 실었으며 문명비평을 하였다. 또한 󰡔붕괴하는 국가(崩壞國家)󰡕, 󰡔슬픈 섬(悲情島嶼)󰡕, 󰡔혼란한 시대(迷亂時代)󰡕, 󰡔부패한 국가, 부패한 사회(腐敗國家, 腐敗社會)󰡕 등의 책을 출판했다.

시를 쓰는 뜻 깊은 일뿐만 아니라, 나는 2. 28 사건을 기념하는 ‘대만평화기금회(臺灣和平基金會)’ 이사회를 맡았고,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정난롱(鄭南榕) 열사를 기념하여 설립된 ‘정난롱기금회(鄭南榕基金會)’의 이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학술연구와 정치개혁을 결합한 ‘현대학술연구기금회(現代學術硏究基金會)’의 이사장도 맡았다. 문학적으로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실천적으로 참여했다. 전후세대의 문학인으로서, 게다가 수많은 지식인 ‧ 문화인들이 학살당한 2. 28 사건이 발생한 그 해인 1947년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포부를 품고 자유의 꿈을 추구했다.

「자유(自由)」라는 이 시에는 이러한 시 구절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 국가도 감옥의 개를 향해

자유를 노래한다

 

족쇄를 찬 대열을 데리고

경계가 삼엄한 광장을 지난다

 

한발 한발 초별이 거리를 장식해

축제를 돋보이게 한다

 

동원된 군중은 반복해서 구호를 외치고

이의분자에게는 강제로 마스크를 씌웠다

 

자유 자유

밝게 울리는 소리가 찬바람에 울부짖고 있다

 

-「자유(自由)」

 

시의 방패를 들고, 자유를 추구하며, 자유를 수호한다. 이는 내가 대만의 시인으로서 가진 사명이다. 또한 이는 대만이 정상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상을 품은 대만 작가의 노정이다.

 

5. 나의 국가는 다만 나의 마음속에 숨어있다

 

나의 국가는

단지 내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

 

철조망도 없고

경계병도 없는

 

나뭇잎으로 엮은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나무는 바로 깃대로

섬의 토지에 퍼져 있다

 

새가 숲속에서 노래하자

바람의 박자에 맞추 자연의 숨소리가 화답하고 있다

 

-「국가(國家)」

 

대만은 1990년대 중기에 이미 민주화시대에 접어들었지만, 대만의 국가(로서의) 조건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의 갈등이라는 국가적인 이데올로기로 인해 아직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다. 현재 대만이 맞닥뜨린 위협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 정부를 전복시키고 대체함으로써 대만을 병탄하는 것이다. 대만인들은 중화민국 대표연합군을 받아들이면서 점거통치를 겪었고, 또한 이러한 곤경에 놓이게 된 것이다. 1971년 UN에서 축출되면서부터, 1970년대에 수많은 국가들이 (대만과의)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단절해버렸고 대만은 국제외교상 어려움에 빠졌다. 이에 따라 대만의 민주화 성과 역시 위협을 받았다.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중국에 종속되지 않는 하나의 정상적인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꿈을 가진 모든 대만인들의 염원이다. 우리가 원하는 국가는 결코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국가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 28 사건에서 많은 지식인 문화인들이 학살되었다. 그리고 1950년대 백색테러 과정에서 통치당국은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절대적인 통치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정치적 이견을 가진 인사들을 학살했다. 1960년대 대만인들의 자구운동은 탄압받았다. 하지만 1970년대의 향토문학논쟁 ‧ 중리사건(中壢事件) ‧ 미려도 가오슝 사건 등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해서 전개되었다. 1980년대의 노력으로 훨씬 강압적이고 식민지배와 유사했던 외래 통치당국은 계엄령을 해제했고, 민주선거의 전면화를 점진적으로 확대했다. 그리고 2000년 중국국민당 일당체제의 장기화는 허구 ․ 잔여로 바뀌었다. 타자의 중국이데올로기는 통치 국면을 농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대만은 한국의 상황과 비슷하다. 장기간의 반공체제 아래에서 통치권력이 이를 근거로 독재정치를 하는 상황을 마주했었으며 인권이 박해받았다. 이러한 조건은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동유럽이 자유화의 영향을 받아 변화했지만, 미소냉전체제가 미중냉전체제로 변하면서 동아시아의 형세에는 후기 냉전시대가 새로이 만들어낸 어려운 상황이 여전히 존재한다. 미중전선에서 대만과 한국은 통치권력이 국민인권 ‧ 자유의 위협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대만의 문학종사자와 한국의 문학종사자는 모두 여전히 민주화 ‧ 자유화의 빛과 그림자가 교착하는 상황에 처해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나에게 1980년대 말을 떠오르게 한다. 대만과 한국, 일본의 시인들은 아시아시인회의(亞洲詩人會議)를 2년마다 대만 ‧ 한국 ‧ 일본 각각에서 개최했고, 󰡔현대 아시아 시집(亞洲現代詩集)을 출판했다. 어느 해에 나는 「아시아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통과하다(穿越亞洲歷史的光與影」라는 글을 발표했다. 대만과 한국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대만과 한국의 전후사회 발전은 내부적 동요와 분쟁을 드러냈다. …… 한국은 전후에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심지어 남한 자체는 민주화가 좌절되는 경험을 했다. 이 역시도 역사변화의 우여곡절이었다. 식민통치에서 해방돼 전후사회로 진입한 한국과 대만이 내부적 자기분열에 빠졌던 경험, 양국 내부의 정치적 곤경에서 드러난 대립과 불안은 시인의 작품 속에도 (그대로) 표현되었다. (모든 것을) 외래 식민통치정권의 탓으로 돌렸던 구실을 잃어버린 새로운 현실 속에서 전개된 비통함 역시도 (매우) 깊은 것이었다.”

 

“아시아는 발전하고 있으며, 태평양전쟁 경험이라는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이미 빠져나온 아시아 각국은 전후의 세계발전 선상에 놓여 있다. 대만과 한국은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었지만, 전승국과의 연결관계에 편입되면서 진정으로 정당하고 정의로운 사회의 내부적 정치질서를 건립할 수는 없었다.”

 

“아시아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통과하고 나서야, 평화롭고 행복한 아시아를 향해 진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만 평화롭고 행복한 세계를 향해 진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시인은 바로 언어를 탐색하기 위해 존재한다. 시는 빛나는 언어가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얻도록 만든다.”

 

일본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대만의 전후시기를 생각해보면, 식민 통치와 유사한 중국 국민당의 통치가 이어졌고, (이후) 민주화노력을 통해 대만국가재건과 사회개조의 과정을 향하여 조금씩 나아갔다. 좌로 향하든 우로 향하든 나는 자유의 신념을 품었다. 자유 ‧ 민주인권의 가치는 끊임없이 내 마음 속의 국가의 의미였다. 나는 시인으로서의 직업적 사명도 깨달았다.

역사는 일찍이 대만에도 한국에도 수많은 상흔을 남겼다. 정치가들이 법질서를 통해 국가를 건립한다면, 문화의식은 길을 찾기 바라는 시인을 위해 시인의 마음속의 등대가 되어야 한다. 아시아는 발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제적 발전만을 중시할 수 없고, 물질주의만을 추구할 수는 없다. 더욱 문화적 우수성과 진보성을 중시해야 한다. 정신적인 승화를 지향해야 한다. 21세기가 이미 시작된 이때, 역사의 심층적인 관조를 통해 진심으로 바라며 더욱 행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

최말순 옮김

濟州島4‧3事件70週年國際文學研討會稿

我的文學抗爭

在台灣國家重建和社會改造的路上

李敏勇

 

 

 

1、尋找記憶的轍痕

 

一九四五年八月十五日

  從海的彼方放送解放聲音

  殖民地的孩子望著不一樣的天空

  雀鳥的飛翔取代軍刀機

 

  日本兵解開禁錮島嶼的鎖鍊

  降下太陽旗

  但我們忘了在塔頂升上旗幟

  標示我們的身份

 

  終戰的的日子

  在歡樂中我們徬徨

  忘了註銷殖民地戰記

  它持續了我們暗澹的歷史

 

  失去記憶的日子

  被對鎖在新的枷鎖裡

  模糊島嶼的身份

  阻塞我們對天空的憧憬

 

  但我們擦拭那些歷史

  找尋記憶的轍痕

  我們被枷鎖刺痛的手

  要翻出歷史被遮蓋的書頁

 ─〈被遺忘的歷史〉

 

台灣和韓國,甚至包括北朝鮮有相同的歷史,都和古中國有關係,近代更分別被日本殖民統治。台灣是被割據,韓國和北朝鮮在朝鮮時期被日本強佔。但二戰後,朝鮮的右左獨立運動分別建立了大韓民國及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而台灣則被代表盟軍接收的中華民國據佔統治。

一九四五年十月二十五日,原是中華民國代表盟軍接收台灣的日子,但以據佔統治的立場訂為台灣光復節,將終戰日的八月十五日空白化,在世界其他從殖民地國家,這一天通常既是光復節,也是獨立紀念日。

八月十五日,在台灣是被刻意空白化、遺忘的日子。一九四五年十月二十五日,中華民國統治當局,動員人民大肆慶祝。從設置台灣行政長官公署,施行類殖民統治之始,以抗戰勝利,即中日戰爭(日本侵華戰爭)之勝利係中華民國歷經千辛萬苦為台灣之付出。實則,台灣之從日本殖民統治解放係拜二次大戰結束之賜,且為以美國為首在亞洲的盟軍戰勝所賜。

二戰結束後,中華民國統治的中國大陸陷入中國共產黨武裝革命狀態。統治中華民國的中國國民黨其實以據台作為剝削的的類殖民地,以行政長官公署作為統治機關而不設行省。就是這種心態,據台統治之初,中國右左翼分子或藉統治當局派遣來台,對被日本殖民統治五十年的台灣,有異於中國本土的觀感。

台灣人民原是親近祖國的,從一八九五年被割讓到一九四五年結束,被日本殖民,中國從大清帝國而中華民國政制的變化,以亞洲第一個民主共和國對台灣形成祖國的迷惘和迷障,讓台灣人民產生期待。但中國民國建國以後,並未實施民主化,且面臨中國共產黨正顛覆中華民國。台灣也被捲入國民黨中國和共產黨中國的內競奪形勢。

二戰後的台灣因為錯失了獨立的良機,光復成為被光復的荒謬現象。在中華民國被中華人民共和國取代後,流亡在台灣的中華民國政府在據佔統治的台灣以反共與反攻的基地,進行一黨化,長期性的戒嚴統治,不只凍結了一九四七年制訂的憲法,更以「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進行軍事統治。

代表盟軍接受,進而據佔統治,再成為在中國的國家被中華民國取代後的流亡地,以反共和反攻基地在二戰後美蘇對抗的冷戰形勢中,台灣和韓國一樣成為反共的前線,受到美國的保護,極端保守的蔣政權體制也因此得以鞏固。

但戒嚴後統治,一黨的長期化獨裁,不斷受到內部民主意識的挑戰,也因此不斷發生統治權力的壓迫,宰制。隨著國內,國際政治情勢的演變,一九七○年代末期發生的美麗島高雄事件,終於一反一九四七年二二八事件被極端壓抑而形成民主化契機,在一九八○年代、一九九○年代完成了全面選舉,政權也在本土化潮流推進中展開台灣國家主體的重建,並致力對社會改造。

 

2、被收押的筆,被噤聲的歌唱

 

  在死滅的年代

  我出生了

 

  瘖啞的台灣史

  被封鎖在沉默的口舌

 

  被收押的筆

  被噤聲的歌唱

 

  悽慘無言的嘴

  在暗夜中流亡的心

 

  生命的印記

  一九四七

─〈一九四七〉

 

我出生的那年,台灣發生二二八事件,許多知識份子文化人被殺害,造成台灣本土的文化真空,政治禁制。事件發生於一九四七年二月二十七日,起因是官方查緝私菸引發的衝突,但實則是中華民國據台統治、台灣行政長官公署的貪污腐敗作為累積的民怨。衝突一張不可收拾,從事發地台北,第二天,二月二十八日就由北往南延伸,甚至擴散到東部。民間力量群起,各地包圍官署。

台灣行政長官公署先是接受各地社會賢達組成的調解委員會反映民間意見,但一面與南京政府聯絡派遣軍隊來台。三月初,軍隊登陸基隆港後,展開血腥鎮壓,更逮捕參與調解委員會的人士。全台的大逮捕屠殺,日後統計達二萬多人。此事件被稱為二二八事件,日治時期養成的台灣人知識份子文化人被屠殺殆盡,祖國意味破滅的力量。

二二八事件藉機殺害了戰後台灣原應參與建設國家的文化力量,台灣人民更因事件的恐部而無法結合起來──直到一九八七年,也就是事件後四十年才重新以公民和平運動的名義充新追索。一九八七年,我參與了這項由台灣人權促進會參與發起的運動,以〈這一天,讓我們種一棵樹〉為祈禱詩,並改寫成歌詞,由作曲家蕭泰然譜曲成〈愛與希望之歌〉,加上另一首歌而成為〈一九四七序曲〉。

二二八事件是戰後台灣死滅的印記,出生於這一年的我和一些同年出生的戰後嬰兒潮世代並曾組成「四七社」,在一九九○年代的十年前,活躍於文化藝術界、文化學術界、社會運動界以及政治界,以「在死滅的年代的生」共同追尋台灣國家重建與社會改造,並期許邁入新世紀的二○○○年台灣的統治權力能因政黨執政的改變而改變,而且實現了。

其實,在禁忌的年代,台灣處於從一九四九年到一九八七年的戒嚴統治,文學藝術的表現受到高壓梏制,被壓抑的台灣本土文學持制一九六○年代中期,才分別由小說家組成的《台灣文藝》、詩人組成的《笠》,逐漸發聲。《笠》的本土詩人群以不戴皇冠,戴斗笠的民眾性立場重新凝視現實經驗。我在一九六○年代末,加入《笠》為成員。

而在一九六○年代初期,我在高中就讀時,第一次知道二二八事件的歷史。那是一位學校體育老師於體育課的柔軟操休息時指著學校教室側牆的斑剝孔痕說是二二八事件時均對槍擊參與學生留下的彈痕。這成為歷史的記憶種子,在我胸臆發芽。並成為我最早觸及的二首關於二二八事件的詩:〈不死的鳥〉和〈血腥記憶〉。

 

  死了的故鄉上空

  盤旋著一群鳥

  像飛揚的

  含冤詩篇

  …………

   ─〈不死的鳥〉

 

  遺留在學校磚牆的彈孔

  凝視島的歷史

 

  血腥

  盤旋在空氣之中

  ……

   ─〈血腥記憶〉

 

被喻為亡靈再生的我,懷抱著不死滅的意志走在自己的詩人之途,似乎有一種宿命,我的介入和參與即為這種歷史的宿命所驅使。從一九六○年代到一九七○年代初期的詩集〈鎮魂歌〉以反戰、慰靈開始,到一九七○年代後期的詩集《野生思考》的政治批評,我的詩之志是相對於附和體制的在野詩人立場。

一九五○年代的白色恐怖,是繼二二八大屠殺之後以清除共產潛伏份子為名的政治肅清,在進入一九七○年代才較為平靜。實施戒嚴統治的政治當局以反共的國策,推動國策文學,進入一黨化,控制著整個國度。

 

3、你不能捕獲我恨的足跡

 

  夜黑以後

  現實有一個缺口

  我是打那兒

  逃亡的

 

  雖然你

  像監禁終身犯一樣地

  堅禁著我的一生

 

  然而

  逃亡以後的我

  是自由的

 

  你不能捕獲我愛的掌紋

  你不能捕獲我恨的足跡

    ─〈夢〉

 

我的一九七○年代中後期詩集《野生思考》收錄一首〈夢〉,以「你」指稱戒嚴統治權力,這樣的統治權力幾乎監禁著我的一生。但我以「夢」暗喻作為詩人的我的詩,亦即我的思想與感情。詩裡存在的暗喻,就像從現實缺口逃亡的夢,在夢裡我的語言自由自在地表現。我的愛,意謂我的追尋:我的恨意謂我的批評。因為就在語言的隱喻裡,統治權力無法察覺。

野生思考意味著不被體制馴服的思考。比起我自己一九七○年代初期詩集《鎮魂歌》中的反戰,《野生思考》的政治批評指的統治權力。一九七一年,在聯合國享有代表中國席位的中華民國被解除了代表權,讓予中華人民共和國。在台灣據佔統治的中華民國堅持不以台灣的名義留下聯合國,寧可失去一般國家的身份,而對台灣來說,卻讓台灣連續在國際上失去國際法理的地位。

僅管仍處於戒嚴時期,中華民國也仍在蔣體制時代,但台灣在一九七○年代逐漸從二二八事件以後,白色恐怖的五○年代,甚至六○年代走向掙脫宰制,思考國家地位與存在環境。在文學方面,一九七七年的鄉土文學論戰,政府操縱的一些輿論指控現實介入的文學作品有附和中國共產黨發動革命時期的工農兵文藝現象,引發社會抗議,不再能忍受官方控制。繼而,政治選舉的官方舞弊也受到挑戰,發生群眾抗爭事件,顯示民間力量的覺醒。

一九七九年十二月十日,以美麗島雜誌為核心在高雄舉行以人權日為號召的遊行,統治當局未暴先鎮,發生美麗島高雄事件。企圖藉官方控制的新聞媒體製造民主化運動的暴力污名。事件發生後,逮捕許多政治異議份子,其中也包括兩位作家,分別進行軍事審判和一般司法審判。但公開的審判程序,更讓人民看清統治暴力。以美麗島政團為名的許多被監禁的政治異議份子家屬在後來的國會選舉及地方行政首長選舉,得到人民的支持,進入國會或成為地方行政首長。台灣的作家楊青矗和王拓分別在美麗島事件入獄,但激發了更多台灣作家走向社會為民主化運動挺身而出。

一九八四年,參考國際特赦組織(Amnesty International)模式,台灣人權促進會成立,是關懷被監禁在監獄的政治良心犯而設置的。

我和一些台灣的詩人、小說家,加入了台灣人權促進會。這些人大多是《笠》和《台灣文藝》這兩分於一九六四年和「台灣人民自救運動」發生之年創辦的刊物的作家。我並在「台灣人權促進會」擔任執行委員。除了作品,更在行動介入了台灣政治改革運動。

一首我在那時期的詩〈暗房〉,以之喻台灣的現實。

 

  這世界

  害怕明亮的思想

 

  所有的叫喊

  都被堵塞了出口

 

真理

以相反的形式存在著

 

  只要一些光滲透進來

  一切都會破壞

 

一九八○年代,民主化運動和環境保護、勞工運動、人權推動常常併合進行。作為參與者常須走上街頭遊行,從詩隱喻到行動的直接介入,我的文學抗爭有時也直指現象。〈戒嚴風景〉就捕捉了現實:

 

  雨水

  從變色的天空灑下來

  鎮暴部隊的盾牌

  在閃電中發光

  武裝警察的棍棒

  在雷聲中發亮

 

  城市

  出現了一個新的邊界

一邊是手無寸鐵的群眾

一邊是瓦斯催淚彈

  從民生路民權路到民族路

  僵持在潮溼的夜色裡

 

美麗島事件發生,官方藉軍法、司法兩種審判途徑,堅禁了許多政治異議份子,但走向反對專制統治的異議份子更多。我的一九八○年代詩風景,也是詩集《戒嚴風景》中呈現的抗爭意象。從加入台灣人權促進會的人權組織,我從書寫更走向行動的介入和參與。異於一九四七年二二八事件的被壓迫、宰制,一九七九年美麗島事件讓台灣站起來。

 

4、在傾斜的島守護我們尚未誕生的國度

 

  我們構築語言的城堡

  在傾斜的島

  守護我們尚未誕生的國度

 

  某種邪惡的力量

  一直想摧毀我們的構築

  武裝的文化兵團搜巡我們的土地

 

  我們的手在意義的壕溝挖掘發展的甬道

  並且在城堡的周圍密植仙人掌

  刺向天空

       ─〈詩的盾牌〉

 

一九八七年二月二十八日,二二八事件四十週年,我參與組成的台灣筆會成立了。這是一群標榜在野、不附和戒嚴統治體制的作家,包括詩人、小說家、散文家與編輯人組成的團體。我負責起草〈台灣筆會成立宣言〉,並擔任秘書長,後來並擔任會長(1993~1994)。台灣筆會宣言「以作家應該是精神的政府,站在人的立場、堅持公理與正義、信守和平與愛,追求善美與真善,透過文學和藝術的創作,評論和研究,透過社會批評,更透過文化運動,彰顯異異和價值。」並呼籲「所有作家做時代詩人,社會良心;落實本土,開放胸襟;以世界性視野,開拓台灣文學藝術的新領域。」並提出八項文化改革:

 

1、確保作家創作自由;反對任何方式壓制言論自由。

2、維護作家尊嚴;反對黨、政、軍對文藝團體的籠絡和箝制。

3、促進出版、影視、戲劇的發展,反對任何不當檢查,查禁、查扣。

4、開放一切文學藝術資訊,反對一切阻礙思想交流的措施。

5、解除對所有大眾傳播媒體的限制,反對報紙、電視、電台,及其他資訊壟斷。

6、尊重台灣本土歷史、文化,反對任何扭曲、竄改。

7、尊重台灣各地區各種母語、實施雙語教育;反對一切阻礙母語傳播的措施。

8、增加各級學校台灣歷史、文化課程,並設立台灣文學藝術研究機構;反對忽視台灣本土的教育政策。

 

台灣筆會成立後,一九八七年七月十五日,統治當局宣佈解除實施三十八年(1949~1987)。台灣的政治改革逐漸推進。一九八八年,蔣經國去世,蔣氏父子統治結束,由台灣本土出身的李登輝以副總統代總統,並於一九九○年經國民大會選舉當選總統。台灣政治與文化的本土化展開新紀元。

若以一九七九年美麗島高雄事件與一九八○年韓國光州民主化運動相比,大約相同時間。若再推溯一九四七年二二八事件與一九四八年的四三事件,時代也相近。二戰後的韓民族分裂,形成南韓和北朝鮮;而台灣則因中華民國代表盟軍接收,據佔統治,而以流亡來台的政權,形成在台灣的中華民國與海峽對岸中華人民共和國對抗情勢。反共均曾為台灣與韓國專制體制,以維繫政權的藉口,並得力於美國的支持。歷經均四十年的軍事統治,留下許多鎮壓、屠殺的歷史。

台灣原在一八九五年至一九四五年,正因大清帝國割讓給日本殖民統治五十年,而與中國分離,與中國發展出不同的文化形貌與生活方式。二戰後的台灣人,從歡迎中國到拒否中國,從含納中華民國到拒否中華人民共和國,也經歷戰後實際的政治變遷。台灣發展出不同於中華人民共和國的國家認同,戰後從二二八事件,戒嚴長時間的一黨化統治,民主化的發展成為新的獨立於中國之外的主權國家的追尋。儘管長時間經歷文學附庸於類殖民、專制統治的現象,但也激發台灣作家扎根本土,介入並參與民主化與本土化運動。

一九九○年代,除了文學的介入與社會的參與,我除了曾號召組成「四七社」。結合二二八事件出生的同齡參與改革運動者為國家重建和社會改造努力。曾出版共同文集;《重建與改造》、《覺醒與再生》,並在許多報紙、雜誌以專欄評論時事,從事文明批評,出版了《崩壞國家》、《悲情島嶼》、《迷亂時代》、《腐敗國家、腐爛社會》等書。

除了詩之志業。我並曾出任紀念二二八事件的「台灣和平基金會」董事會;紀念為自由殉道的鄭南榕烈士而成立的「鄭南榕基金會」董事長:以及結合學術研究與政治改革的「現代學術研究基金會」董事長。不只在文學上介入,更在行動中參與,作為戰後世代的文學人,而且出生於一九四七年許多知識份子文化人被屠殺的二二八事件發生之年,懷抱著追尋自由的夢。

  〈自由〉這首詩印記著這樣的行句:

 

  這國家也歌頌自由

  對著監獄的狗

 

  戴著腳鐐的隊伍

  走過戒備森嚴的廣場

 

  一步一兵哨裝飾街道

  襯托慶典

 

  動員群眾複誦口號

  強迫異議的份子戴上口罩

 

  自由 自由

  響亮的聲音在冷風中怒吼

 

  持著詩心盾牌,追尋自由,也捍衛自由,這是我作為一個台灣詩人的職志,這也是對台灣走向正常國家懷有理想的台灣作家的道路。

 

5、我的國家只隱藏在我心裡

我的國家

只隱藏在我心裡

 

沒有鐵絲網

沒有警戒兵

 

用樹葉編成的旗幟

飄揚在風中

 

樹身就是旗桿

遍佈島嶼的土地

 

有鳥的歌唱在樹林裡

隨著風的節拍回應自然的呼吸

─〈國家〉

 

台灣已在一九九○年代中期進入民主化時代,但台灣的國家條件仍因中華民國與中華人民共和國糾葛的國家意理而未盡充分形成。現在的台灣面臨的威脅是中華人民共和國以其推翻、取代中華民國政府而主張併吞台灣。台灣人民因接受中華民國代表盟軍接收而據佔統治,而面對這種困境。從一九七一年被逐出聯合國,一九七○年代起被許多國家斷絕正常國交,而陷入國際外交的困境。台灣的民主化成果也隨之受到威脅。

追求延續一個不屬於中國的正常獨立國家是所有有自由之愛、民主之夢的台灣人的憧憬。我們要一個國家,但我們並不追求國家主義。二戰後以來,經歷二二八事件,多少台灣人知識份子文化人受到殺害;經歷一九五○年代白色恐怖,統治當局以反共之名殺害異議份子以鞏固其絕對統治權力。一九六○年代,台灣人民自救運動受到壓制;一九七○年代的鄉土文學戰爭、中壢事件、美麗島高雄事件,都接續展開爭取民主化的努力。一九八○年代的努力,更迫便類殖民的外來統治當局解除戒嚴令,逐漸全面化民主選舉,而於二○○○年改變了中國國民黨一黨長期以虛構、殘餘,他者的中國意理壟斷獨佔統治的局面。

二戰後以來的台灣,就像韓國一樣,長期在反共體制之下,面對統治權力據以宰制政治,迫害人權的條件,這樣的條件雖因蘇聯解體、東歐自由化的影響而改變,但美蘇對抗轉變為美中對抗,東亞的形勢仍然存在著後冷戰時代新形成的困局,台灣與韓國在美中前線各自面對統治權力可能影響國民人權、自由的威脅,台灣的文學工作者和韓國的文學工作看都仍處於民主化、自由化的光影交錯的形勢中。

這讓我想起一九八○年代末期,在台灣與韓國、日本的詩人們以亞洲詩人會議以每兩年分別在台灣、韓國、日本舉行,並出版《亞洲現代詩集》,有一年我以〈穿越亞洲歷史的光與影〉的報告。述及台灣與韓國時,我提到下列的意見:

 

「台灣與韓國的戰後社會發展則呈現了內部的動亂和紛爭。……韓國在戰後的南北分裂,甚至南韓本身在民主化顛沛里程,也是歷盡滄桑。韓國和台灣,從殖民地統治解放出來的戰後社會,各自陷入內部自我傾軋的經驗,從兩國內政困境上所顯現的對立和不安,也各自出現在詩人的作品裡。在喪失歸咎於外來殖民地統治政權的新現實裡,展現出來的愴痛也是深刻的。」

「亞洲在發展中,從太平洋戰爭經驗的歷史陰影既出來的亞洲各國,各自在戰後的世界發展。……台灣和韓國,雖然從殖民地統治解放出來,被編入戰勝國的連結關係,卻無法建立出真正符合公理和正義的社會內部政治秩序。」

「穿越亞洲歷史的光與影,才能真正邁向一個和平與福祉的亞洲,才能真正邁向一個和平與福祉的世界。詩人就是為了探索這些語言而存在的;詩就是使這些語言光亮著才有真正的價值。」

 

在思考台灣戰後脫離被日本殖民統治,繼而在國民黨中國類殖民統治,經由民主化努力而逐漸走向台灣國家重現和社會改造的歷程,懷抱著向右向左都是我的自由的信念,自由、民主人權的價值不斷我心目中國家的意義,也啟諭著我作為一個詩人的職志。

歷史曾經在台灣也在韓國烙印許多傷痕,當政治家們以法秩序建構我們各自的國家,文化意義在詩人的心目中應該成為明燈,為詩人的憧憬探路。亞洲在發展中,不能只重視經濟的發展,不能只追求物質主義;更應該重視文化的優質化與進步性,憧憬精神論的昇華。在二十一世紀已開展的時際,深願透過歷史的深層觀照,憧憬更具有福祉的新未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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