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의 자립과 독립을 향한 저항 운동 메도루마 슌(소설가·일본 오키나와)

 

시작하며

1945년 3월 하순, 미군이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일본군에 본격적으로 공격을 가하며 상륙작전이 시작됐다. 이후 3개월 동안 오키나와 각 섬에서는 주민이 휩쓸린 지상전이 전개됐다. 미일 군인과 일반 주민을 합쳐 전사자는 20만 명에 이르며, 오키나와 현민 중에서는 4명 중 1명(약 12만 명)이 희생됐다.

오키나와 주민이 사상을 당한 것은 오로지 미군의 공격에 의해서만은 아니었다. 일본군 중에서는 오키나와인에게 편견과 차별 의식을 갖고 스파이 혐의를 씌워서 주민을 학살한 병사도 있었다. 일본군이 주민의 식량을 강탈하고 참호에서 쫒아내는 일도 연이어 일어났다. 참호 밖으로 쫓겨난 주민은 미군의 포격에 그대로 노출됐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포로가 되지 말고 자결하라는 방침을 세웠다. 그것이 주민에게도 강제돼 옥쇄(玉碎)라는 이름의 집단사가 일어났다.

오키나와에서는 지금도 “군대는 주민을 지켜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나눠지고 있다. 이는 오키나와전(沖縄戦) 당시 일본군이 주민에게 가했던 부당한 처사로부터 비롯된 교훈이다. 오키나와전의 경험을 거친 오키나와인은 전쟁이나 군대를 강하게 부정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후의 정치 상황은 오키나와인의 소망을 짓밟는 형태로 진행됐다. 미군 점령 하에 놓인 오키나와는 전후 27년에 걸쳐서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미군 통치를 계속 받았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는 “태평양의 요석”으로 오키나와를 위치시키고, 미군의 전략 거점으로써 미군 기지를 강화해 나갔다. 쇼와 천황(昭和天皇) 히로히토도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바랐다(이른바 ‘천황메시지’가 이를 증명한다).

1950년대 야마토(일본) 각지에서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활발해지자 미국 정부는 자신들의 통치하에 있는 오키나와로 미군기지를 이전시켰다. 그로 인해 야마토의 미군기지는 감소했지만 오키나와에서는 그 반대로 늘어났다. 패전으로부터 73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일본 전체 미군 전용시설의 70% 이상이 오키나와에 집중돼 있다.

미군기지가 집중돼 있어서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에 의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살인, 강간 등의 흉악 범죄를 시작으로 미군기 추락과 차량 사고 등이 일어나 많은 오키나와인이 전후에도 희생됐다. 오키나와인은 미군기지 철수를 요구하는 운동을 계속해, 집회나 데모만이 아니라 미군 시설 건설이나 연습을 실력으로 저지하는 행동을 활발히 펼쳐왔다.

하지만 미일 양국 정부는 오키나와의 호소를 무시하고 미일안전보장조약에 입각해 미군기지 부담을 오키나와에 계속해서 집중시켜 왔다. 미군기지가 근처에 없어서 야마토의 대다수 주민들은 기지 문제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 일본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는 오키나와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그러한 의식이 굳어지면 미일안보체제가 안정될 것이라고 일본 정부는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이에 대항해 오키나와에서는 미군기지가 오키나와에 집중된 현상을 ‘구조적 차별’이라고 비판해 왔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기지부담 경감”에 대해 언급은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다. 중국이나 북조선의 군사적 위협을 선전해서 주민의 공포심을 부추겨서 새로운 미군기지 건설과 자위대의 배치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오키나와의 역사와 현장에 입각해 최근 몇 년 동안 필자가 몰두해온 헬리패드helipad 건설 반대 운동(히가시손 다카에高江)과 헤노코 신기지 건설 반대 운동에 대해 보고하고자 한다.

 

미군 세 명에 의한 강간 사건과 SACO합의

1995년 9월 4일 오후 8시 경, 오키나와 북부의 어느 마을에서 무언가를 사러나갔던 12살 여학생이 미군 병사 세 명에 의해 차로 납치돼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큰 부상을 입은 피해자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오키나와 경찰의 조사에 의해 범인이 미군 병사들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일단 기지 안으로 도망친 미군 병사를 오키나와 경찰이 바로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이 사건의 충격이 오키나와 전토를 뒤흔들었다. 오키나와전으로부터 50년이 경과됐음에도 불구하고 미군 기지가 집중돼 있고 미군에 의한 흉악 범죄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오키나와 현민의 분노가 비등했다. 10월 21일에 열린 현민 대회에는 오키나와 전체에서 8만 5천 명이 참가(주최 측 추산)해 일본복귀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로 기록됐다.

오키나와의 상황을 인식한 미일 양국 정부는 강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를 유지하는 것이 불안정하며 미일안보체제 또한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게 된다. 그렇게 의식한 미일 양국 정부는 오키나와 현민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오키나와에 관한 특별행동위원회(통칭 SACO)를 만들어서 오키나와의 ‘기지 부담 경감’안을 내세웠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이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해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지”로 불리는 미 해병대 후텐마 비행장의 반환이었다.

하지만 반환은 명목뿐으로 실제로는 오키나와현의 다른 장소로 기지를 ‘이설’하는 안이었다. 게다가 후텐마 기지에는 없는 새로운 기능(항만시설이나 장탄장装弾場)이 추가돼 노후화된 기지 대신에 최신의 기지를 만들려는 미일 양국 정부의 의도가 뻔히 들여다 보였다.

SACO 안에서 내세운 합의 중에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가운데 최대 면적을 지닌 북부 훈령장의 과반을 반환하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오키나와 북부에는 얀바루라 불리는 아열대숲이 펼쳐져 있다. 오키나와딱따구리, 얀바루 흰눈썹뜸부기, 얀바루 앞장다리풍뎅이 등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이 지역에만 사는 생물이 다수 생식하고 있는 “동양의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풍요로운 생태계가 펼쳐져 있다.

이 숲을 이용해서 미군은 북부 훈련장(정글 트레이닝 센터)를 만들어 베트남전쟁 무렵부터 게릴라전이나 서바이벌 훈련을 해왔다. 병사의 행동은 헬기와 연동돼 이뤄져서 숲 여기저기에 헬리패드가 만들어져서 이착륙 훈련도 빈번히 이뤄지고 있다.

SACO 합의로는 북부 훈련장의 약 반을 반환하는 대신에 새로 6기의 헬리패드를 건설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그 6기는 히가시손 다카에 지구의 집락을 둘러싸듯이 건설돼 이 지역에서는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다카에 헬리패드 반대 운동

SACO 합의로는 북부 훈련장의 반을 반환하는 대신에 새로 6기의 헬리패드를 건설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하지만 새로 건설될 헬리패드 6기는 히가시손 다카에 지구 집락을 둘러싸듯이 건설될 예정이어서 반대 운동이 지역에서 일어났다.

헬리패드는 다카에 N1지구에 2기, N4 지구에 2기, H지구에 1기, G지구에 1기 이렇게 총 6기가 건설될 예정이라 한다. 다카에구 주민을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펼쳐져 왔는데, 내가 다카에로 가서 반대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 1월 무렵부터다.

당시 N4지구와 N1 지구에서 헬리패드 건설이 착수돼 나무가 벌채되고 자재의 반입이 이뤄지고 있었다. 숲을 베어 직경 45미터 착륙 구역과 주위를 둘러싼 폭 15미터의 장해물이 없는 구역을 만드는 공사다. 착륙 구역은 깊이 50센티로 땅을 파내고 자갈을 채워넣는다. 그렇게 어려운 공사는 아니지만 N1, H, G지구는 숲속의 현장까지 공사용 도로를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서 대량의 수목이 벌채돼 귀중한 동식물의 생식지가 파괴되고 있다.

미군의 최신 수송기인 MV22오스프리도 헬리패드를 이용한다. 중저음 폭음이 소리에 민감한 조류의 생식을 위협하고 엔진으로부터 뿜어져 내려오는 열풍으로 식물에도 심각한 영향이 미칠 것으로 예상됐다. 다카에구 주민도 미군기의 폭음과 추락 위험에 일상이 노출돼 있다.

다카에구는 인구 150명 정도의 작은 집락이다. 지역 주민을 지원하는 시민들이 현 내외로부터 모여서 작업원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운송 자재를 저지하는 투쟁이 연일 계속돼 왔다.

2012년 7월부터 2014년 3월까지는 N4지구 두 곳에서 이뤄지는 헬리패드 건설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여왔다. 보통 오전 6시에 집합해 북부 훈련장 메인 게이트로 들어가려는 작업원과 자재를 막았다. 도로로 이동하는 공사 차량을 몇 킬로 앞에서 확인하고 무전기로 연락을 취해 차량을 멈춰 세우고 설득을 시도했다. 게이트로 들어가지 못 한 작업원은 숲을 통과해서 현장으로 가려 한다. 그들을 쫓아서 숲속에서도 공방이 계속됐다.

메인게이트에서 벌어진 저지 및 감시 활동은 오전 6시부터 밤 9시까지 15시간 동안 이어져서 게이트가 닫힌 후에 차를 세우고 그 안에서 잠을 청한다. 24시간 행동이 며칠이고 이어진다. 현장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워진 작업원들은 기지 안에 숙박소를 만들어 공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필요한 자재를 다른 공사로 위장해서 반입하거나 해서 N4에 헬리패드가 완성됐다. 예정보다 크게 늦은 2014년 3월의 일이다.

 

 

전국에서 500명의 기동대를 파견해서 폭력적으로 공사를 강행하다

공사용 게이트 앞을 시민이 차로 봉쇄한 결과 그 후 N1, H, G지구의 헬리패드 건설은 2년 이상 진행되지 못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2016년 7월 들어서 오키나와현 경찰에 더해 전국에서 500명의 기동대를 오키나와에 파견해 대 탄압 태세로 전환하고 헬리패드 건설을 세 지구에서 강행했다.

7월 22일 이른 아침, N1지구의 공사용 게이트를 막은 시민의 차량을 800명 정도의 경찰관과 기동대원이 습격했다. 차 위에서 저항하는 시민을 끌어 내리고 차량을 철거했다. 기동대원의 폭력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인구 150명 정도의 집락을 그보다 몇 배는 많은 기동대원이 둘러쌌다. 주변 도로에서는 몇 겹의 검문이 이뤄졌고 계엄 태세에 돌입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저항하는 시민은 독창적인 방안을 짜내서 저지/항의 행동을 전개했다. 도로를 차로 봉쇄하고, 농성하며 공사 차량을 막거나, 자재를 나르는 덤프트럭 앞을 차로 서행해 운전하는 등의 도로 위 행동은 수십 킬로 범위에 이르렀다. 자갈을 싣는 채석장에서도 저지 행동이 이어졌다. 경찰 탄압이 나날이 엄중해 지고 체포자가 계속 나왔지만 저항은 끝까지 이어졌다.

작업원이나 자재가 출입하는 공사용 게이트 앞에서는 최후의 저지선으로 시민의 농성이 계속됐다. 수백 명 규모로 시민이 농성을 하면 기동대원도 간단히 손을 댈 수 없다. 하지만 수가 적으면 힘에 밀려서 저항하는 시민에게 폭력이 쏟아진다. 덤프트럭이 채석장을 왕복할 때마다 강제적으로 시민을 탄압하는 행위가 반복됐다.

 

오사카 경찰 기동대원에 의한 ‘토인’ 및 ‘지나인’ 발언

그 과정에서 오사카 경찰의 기동대원이 항의하는 시민을 향해 ‘토인’, ‘지나인’이라고 발언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 모습을 필자가 비디오로 촬영해서 유튜브에 올리고 미디어에도 영상을 제공해 전국적인 뉴스가 됐다.

오키나와는 1879년 이론에 병합되기 전까지 류큐국(琉球国)이라는 하나의 나라였다. 사쓰마번(薩摩藩)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고는 해도 19세기 중반에는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와 수호조약을 맺는 등 외교권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 병합된 후부터는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언어, 생활습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동화될 것을 강요받고 일본인으로부터는 열등한 ‘류큐인’ ‘오키나와인’으로 불리며 차별을 당했다.

내 조부모는 1920년대 오사카에서 일했고 아버지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야마토로 돈을 벌러 간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차별과 편견에 노출돼 괴로워했다. 식당에 들어가려 하면 “류큐인, 조선인 사절”이라는 종이가 붙어있었다고 어릴 적 조부모로부터 들었다.

오사카부 경찰 기동대원이 다카에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을 ‘토인’ ‘지나인’이라 부른 것은 그러한 역사적 체험을 상기시킨다. 오키나와에서 강한 비판 여론이 일어나고 현의회에서도 규탄 결의가 이뤄졌다. 과연 일본 정부도 어물쩍 넘어갈 수 없게 돼 경찰철 수뇌가 사죄하는 사태로 번졌다. 그런 발언을 한 기동대원 두 명도 처분을 받고 오사카로 되돌아갔다.

최근 몇 년 동안 야마토에서는 오키나와를 향한 헤이트스피치가 더욱 폭 넓게 퍼져나가고 있다. 특히 미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오키나와인에 다해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거나, 북조선이나 중국의 공작원과 연결돼 있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있다. 그 중심은 넷우익이라 불리는 민간의 보수 그룹이다.

엄밀히 말하면 경찰은 그런 자들을 단속하는 측에 있다. 오사카부 경찰 기동대원에 의한 ‘토인’ ‘지아인’ 발언은 규제해야 하는 측에 서 있는 공무원이 근무 시간 중에 행한 것으로 지극히 악질적인 행위다. 그렇게 널리 오키나와 차별이 퍼져 있다는 사실에 섬뜩함을 느낀다.

 

숲 속에서의 저지 항의 행동

도로나 채석장에서의 대처와 병행해서 헬리포드 건설 현장에서의 저지, 항의 행동이 다카에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일본 정부, 오키나와 방위국은 북부 훈련장 안으로 시위대가 진입하면 형사특별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면서 항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체포될 수 있음을 내비쳤다. 그런 위협에 기죽지 않고서 많은 시민들이 숲으로 들어가 몇 번이고 공사를 중지시켰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 정부는 항의 행동 리더를 체포해서 운동을 분쇄하려 했다. 2016년 10월 17일, 오키나와 평화운동센터의 야마시로 히로지(山城博治) 의장이 체포됐다. 재료를 두는 곳 주변에 뻗어 있는 철선 하나를 잘랐다는 이유만으로 기물파손죄로 기소됐다. 통상적으로는 가벼운 조사를 받고서 풀려날 정도의 일인데 오키나와 경찰은 야마시로 씨를 노리고서 폭행과 위력업무방해죄의 명목으로 체포를 거듭했다.

야마시로 씨는 혈액암을 앓고 치료 중이었다. 장기 구류는 야마시로 씨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운동의 파괴를 노린 것이었다. 보석 청구를 거듭했음에도 오키나와현 경찰은 5개월 동안 야마시로 씨의 장기 구류를 강행했다. 야마시로 씨는 2017년 3월 18일에 석방된 후 6월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UN인권이사회에서 자신에게 가해진 인권 침해에 대해 호소했다.

다카에 헬리패드는 12월에 본체 부분이 거의 완성돼 12월 22일에는 북부 훈련장의 약 반을 반환하는 식전이 열렸다. 하지만 실상은 사용하지 않는 훈련장을 반환하는 대신에 오스프리를 쓸 수 있는 새로운 헬리패드를 짓고 훈련장을 간결하게 정리해 기능을 강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2017년 10월 11일 히가시손 다카에구의 목초지에 미해병대의 CH 53E 대형수송 헬기가 불시착한 직후에 불타오르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상자는 없었지만 민가로부터 300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장소였다. 새로운 헬리패드가 건설돼 다카에구와 주변에서의 군사 훈련이 빈번해지면 폭음 피해와 사고의 위험성이 증가하리라던 주민의 불안감은 현실이 됐다.

다카에에서의 헬리패드 건설은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의 민의를 짓밟고 경찰 기동대의 폭력을 써서 강행한 것이다. 북부 훈련장에서 단련된 미군 병사들은 베트남이나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등 세계 각지의 전쟁터로 파견돼 살육과 파괴를 반복해 왔다. 그것을 묵인하면 오키나와인이 미군의 침략전쟁에 간접적으로 가담하는 것이 된다. 이를 거부하기 위해서라도 북부 훈련장의 전면 반환을 목표로 한 운동을 재구축해야만 한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저항

1997년 12월 21일, 후텐마기지의 ‘이설’처로 부상한 나고시 헤노코 해상에 헬리패드를 건설하는 안을 두고 나고 시민들의 투표가 진행됐다. 결과는 건설 반대가 다수를 점해서 원래대로라면 이 문제는 깨끗이 해결됐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히가 데쓰야(比嘉鉄也) 시장은 민의를 짓밟고서 ‘이설’을 받아들이겠다고 정부를 향해 표명한 후 사직해 버렸다. 기지 관련 이권을 중심으로 한 이 비열한 행위로 인해 나고 시민은 이후 20년 이상 대립과 혼란 속에서 괴로움을 겪어왔다.

2004년 4월 19일, 일본 정부는 후텐마 기지 ‘이설’을 향해서 헤노코 앞바다에서 해저 지질조사 시공(boring) 조사에 착수했다. 시민들은 자재 보관장으로 예정된 어항(漁港)에서 농성하며 저지 행동을 개시했다. 해상에서도 지질조사 시공 조사를 위해 설치된 철골 구조물 위에 올라가서 저지 행동을 개시했다. 당시는 경비를 하고 있던 해상보안청이 중립적인 자세를 취해서 시민의 실력 투쟁에 의해 시공 조사는 중지됐다.

그 후 세계적으로 미군 재편이 이뤄지는 가운데 후텐마기지의 ‘대체 시설’ 방안도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2006년 5월, 헤노코 곶 연안부에 V자형 활주로 두 개를 만들려는 계획이 일본 정부와 나고시 사이에서 합의됐다. 헤노코 측 사주(砂洲) 안과 오우라만(大浦湾) 일부를 메워서 항만 기능이나 장탄장 등의 새로운 기능을 만드는 것도 드러났다. 단지 비행장 ‘이설’이 아니라 새로운 기지 건설이라는 비판이 퍼져 갔다.

오키나와에서는 후텐마 기지의 ‘현내 이설’ 문제가 일어난 이후 반대 여론이 항상 7할을 넘고 있다. 이미 미군 기지가 집중돼 있는 오키나와 안에서 ‘이설’을 하더라도 정부가 말하는 ‘부담 경감’과는 거리가 멀다는 불만이 가득 쌓여 있다. 그래서 헤노코 ‘이설’을 추진 및 용인하는 측에 서면 선거에서 이길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2010년 현지사 선거에서 당선된 나카이마 히로카즈(仲井真弘多) 씨도 입후보 당시에는 ‘현외 이설’을 주장하고 ‘현내 이설’안에 대해서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 속마음은 의심스러웠다. 실제 나카이 지사는 2013년 12월에 요통 검사로 입원한다는 이유로 도쿄로 가서 일본 정부와 비밀리에 교섭을 거듭해 헤노코 ‘이설’을 위한 매립 작업을 독단으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오키나와현에서는 맹렬한 반발이 일어났고 나카이 지사는 지지를 잃었지만 일본 정부는 2014년 7월 1일에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착수해서 8월부터는 해저 지질 조사 작업을 개시했다. 시민에 의한 저항이 즉시 일어났다. 육지에서는 캠프슈와브(Camp Schwab) 게이트 앞에서 농성이 벌어졌고, 해상에서는 배와 카누를 이용한 저항이 시작됐다.

 

 올 오키나와라는 틀의 탄생과 그 배경

그런 가운데 2014년 11월 16일에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가 이뤄졌다. 일본 정부가 전면적으로 지원하는 가운데 재선을 노리는 나카이마 씨에 대항해 신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측이 세운 후보가 바로 구 자민당 오키나와현 간사장이며 나하 시장인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씨다. 어째서 구 자민당 현연연합(縣聯聯合) 간부였던 오나가 씨가 신기지 건설을 반대하며 입후보를 하게 된 것일까? 그 기저에는 오키나와의 정치, 경제 상황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오키나와에서도 정치의 보수화가 진행돼 왔다. 2006년, 2010년 현지사 선거에서는 ‘혁신의 희망’이라 불리던 이토카즈 게이코(糸数慶子) 씨, 이하 히로마사(伊波洋正) 씨가 연이어 패배했다. 사민당, 공산당, 오키나와사회대중당을 중심으로 한 혁신 공동투쟁이라는 틀로는 일본 정부가 전면적으로 지원하며 자민당과 공민당이 미는 후보를 더 이상 이기기 힘들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거기서 창출된 것이 ‘올 오키나와(All Okinawa)’다. 이는 혁신계 정당과 자민당, 경제계 일부가 헤노코 신기지 건설반대, 오스프리 오키나와 배치 철회를 공통분모로 해서 공동 투쟁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미일안보조약이나 자위대, 헤노코 신기지 이외의 미군기지 현내 이설, 아와세(泡瀬) 간석지 등 대립되는 과제는 보류됐다.

지금까지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 ‘이설’에 찬성하던 자민당이나 경제계 일부가 반대로 돌아선 이유는 무엇일까? 2000년대에 들어서 반환된 미군기지 부지를 잘 이용해 새로운 상업 지구가 개발돼서 세수와 토지의 자산 가치, 고용 등이 전보다 훨씬 큰 폭으로 늘어났다. 미군기지는 새로운 이윤을 창출하는 시설이 아니며 고용도 한정돼 있다. 미군 기지를 반환하게 하고 재개발하는 편이 많은 이익을 창출하고 오키나와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레 퍼져나갔다.

또 하나의 큰 이유는 2001년 9월 11일에 미국에서 일어난 동시다발 공격이다. 뉴욕 무역센터빌딩이나 펜타곤에 납치된 민간기가 돌진한 사건에 오키나와 미군기지도 즉시 반응했다. 기지 게이트나 철조망을 따라 무장한 미군 병사가 서 있어서 오키나와 기지도 공격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긴장감이 현민에게도 퍼졌다.

이 사건은 오키나와의 주요 산업인 관광사업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수학여행을 시작으로 숙박 예약이 연이어 취소돼 피해를 회복하는데 긴 시간이 걸렸다. 그 경험을 통해 오키나와 관광업자들은 관광이 평화산업이며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불안한 곳에 관광객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군사기지와 관광은 서로 맞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키나와 경제는 기지, 공공공사, 관광을 세 축으로 하는 ‘3K 경제’로 불려왔다. 그 중에서 기지와 공공공사가 점하는 비중이 저하되는 한편, 관광사업은 최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일본 국내만이 아니라 한국, 타이완,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미군기지에 의존하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동아시아의 평화적 환경을 구축하고 그 가운데 오키나와의 경제적, 정치적 자립을 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인식을 갖게 된 자민당과 경제계 일부가 헤노코 신기지 건설반대로 돌아서서 혁신세력과 손을 잡고 만들어낸 것이 ‘올 오키나와’이다.

이는 2014년 11월 현지사 선거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나카이마 씨는 전년도에 매립을 승인한 후 현민의 신뢰를 상실한 결과 정치 신인인 오나가 씨가 10만 표 이상의 차로 압승을 거뒀다.

더욱이 ‘올 오키나와’ 세력은 같은 해 12월 14월에 이뤄진 중의원 선거 때도 4선거구 모두에서 승리해 오키나와의 민의가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것임을 명확히 드러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것을 완전히 무시했다. 아베 신죠 수상은 당선된 오나가 지사와 면회를 하는 것조차 거부한 채 공사를 계속 강행하고 있다. 2016년 3월부터 12월에 걸쳐서 매립 승인을 둘러싸고 국가와 현 사이에 벌어진 재판으로 공사가 일시적으로 중지됐지만 그 사이에 다카에 헬리패드 건설이 진행됐다.

또한 다카에 공사가 거의 끝난 12월에 대법원 판결로 오키나와현의 패소가 결정돼 오나가 지사가 매립 취소를 철회해 공사가 다시 시작됐다.

 

강행되고 있는 헤노코 신기지 건설과 이에 항거하는 반대운동

일본 정부와 오키나와 방위국은 당초 오우라만 쪽에서부터 매립을 시작하기 위해 호안 공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도중에 계획을 변경해서 오우라만 측의 호안 공사를 중단하고 헤노코 측의 사주(砂洲) 안에서 별도의 호안공사를 개시했다.

오우라만은 수심이 깊고 활단층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난공사가 예상돼 공사 진행이 늦어질 것이라 예상됐다. 그에 비해 헤노코 쪽 사주 안은 만조 때에도 수심이 4~5미터 밖에 되지 않고 호안 공사가 예정된 장소는 간조 때는 수심이 1미터 이하인 곳도 있다.

일본 정부, 오키나와 방위국은 얕은 여울에서부터 호안 공사를 개시해 매립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음을 현민의 뇌리에 각인시키려 하고 있다. 이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각인시켜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국가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체념과 무력감을 심으려는 것이 목적이다.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일본정부는 강권적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오키나와현이 제출한 암초파쇄 허가 기한이 2017년 3월말로 끝나자, 현은 정부에 공사를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것을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더구나 나고시의 어업협동조합에 고액의 보상금을 지불해서 어업권을 포기하도록 했다.

매립 해역에 생식하는 희소 산호초에 관해서는 조사 결과를 오키나와현에 통고하는 시기를 늦춰서 14군체(群体) 중에서 13군체를 사멸시킨 것도 모자라서 나머지 1군체의 이식을 요구했다. 산호 이식은 대부분 실패한다고 전문가는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현이 이식을 허가하지 않으면 석재를 투하해서 산호를 파괴하고 책임을 현에 전가하려 하고 있다.

행정권한을 구사해서 공사를 막으려 하는 오나가 지사에 맞서 일본 정부는 지사의 권한을 봉하는 선수를 치고 있다. 게이트 앞이나 해상에서의 저지/항의 투쟁에 대해서는 경찰, 기동대, 그리고 해상보안청이라는 권력 장치를 써서 탄압을 가하고 있다. 부상자나 체포자가 다수 속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현 안팎에 많은 시민이 모여 들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린 싸움과 공사 진행으로 인해 시민 사이에는 피로감과 체념이 서서히 퍼져가고 있음도 사실이다. 게이트 앞에서도 바다에서도 저지, 항의 행동에 나서는 참가자 수가 줄어 들곤 있다. 운동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참가자를 늘리는 것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일본 정부, 오키나와 방위국은 6월말까지 헤노코 측 해역을 호안에서 둘러싸 가두고 안쪽에 토사를 채우려 하고 있다. 본격적인 매립이 시작됐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해 11월에 있을 현지사 선거에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이는 이미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2월 4일에 나고시장 선거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2선(8년) 동안 헤노코 신기지 건설에 반대해 왔던 이나미네 스스무(稲嶺進) 씨가 패배했다. 선거에 나온 새로운 후보는 헤노코 신기지 문제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쟁점을 회피한 채 일본 정부와 협력해서 예산을 편성하고 시를 활성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해서 당선됐다.

나고시는 6만 천 명 정도의 인구밖에 없는 소도시다. 그런 곳에 정부의 각료나 국정 여당의 거물 의원이 찾아왔다. 선거 기간 중에 나고시에 온 국회의원은 100명을 넘어선다. 이들 의원은 기업과 산업계 단체를 돌며 표를 모았다. 지방 소도시의 수장 선거에 정부가 이렇게까지 개입한 것은 나고시 외에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는 지방자치를 짓밟고 있다.

나고시장 선거 결과는 호안 공사가 진행된 후 시민들 사이에서 포기하는 마음이 생긴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흐름은 11월에 있을 현지사 선거에서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은 수심이 깊은 오우라만이 난공사 지역으로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노리는 대로 나고시장 선거에 이어서 현지사 선거에서도 패배한다면 반대운동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임이 분명하다.

오키나와 현민이 대립하고 있는 상대는 일본과 미국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국가다. 헤노코에서의 싸움이 곤란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 미군과 자위대가 강화되는 것을 그대로 허용한다면 눈앞에 놓인 현실은 오키나와의 파국뿐이다. 동아시아에서 오키나와가 휘말린 군사 분쟁이 벌어진다면 관광을 중심으로 한 오키나와 경제는 날아가고 말 것이다.

오키나와가 다시 전쟁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되지 않기 위해서는 미군과 자위대의 기지 강화에 반대해 지치지 말고 계속 싸우는 방법 외에는 없다.

 

곽형덕 옮김

【はじめに】

 1945年3月下旬、米軍は沖縄の日本軍に本格的な攻撃を加え、上陸作戦を開始した。以後、3カ月以上にわたり、沖縄の各島では住民を巻き込んだ地上戦が展開された。日米両軍の兵士と一般住民の死者は20万余に及び、沖縄県民の4人に1人(約12万人)が犠牲になったと言われる。

 沖縄住民の死傷は米軍の攻撃によるものだけではなかった。日本軍は沖縄人に偏見と差別を抱き、スパイの疑いをかけて住民を虐殺する兵士もいた。日本軍による住民の食料強奪、壕追い出しも相次いだ。壕を追い出された住民は米軍の砲撃にさらされた。当時の日本軍は、米軍の捕虜にならずに自決しろ、という方針だった。それが住民にも強制されて玉砕という名の集団死を引き起こした。

 沖縄では現在も、「軍隊は住民を守らない」という言葉がふつうに言われる。それは沖縄戦における日本軍の住民に対する仕打ちから導き出された教訓である。沖縄戦の経験を経て沖縄人は、戦争や軍隊に対する強い否定感と平和志向を持つようになった。

 しかし、第2次世界大戦後の政治状況は、沖縄人の願いを踏みにじる形で進んだ。米軍の占領下におかれた沖縄は、戦後27年間にわたって日本から切り離され、米軍統治が続けられた。米国は東アジアにおける共産主義の拡大を阻止する「太平洋の要石」と沖縄を位置づけ、米軍の戦略拠点として基地を強化した。昭和天皇ヒロヒトもみずからの地位を守るためそれを望んだ(天皇メッセージ)。

 1950年代にヤマトゥ(日本)の各地で米軍基地への反対運動が活発になると、米国政府はみずからの統治下にある沖縄に米軍基地を移転した。それによってヤマトゥでは米軍基地が減少していったが、沖縄では逆に増加していった。敗戦から73年を経ようとする今日でも、日本全体の米軍専用施設の70%以上が沖縄に集中している。

 米軍基地の集中は米軍による事件、事故の多発を生む。殺人、強姦などの凶悪事件をはじめ、米軍機の墜落や車両事故などによって、戦後も多くの沖縄人が犠牲になってきた。沖縄人は米軍基地撤去を求める運動を続け、集会やデモだけでなく、米軍の施設建設や演習を実力で阻止する行動も取り組まれてきた。

しかし、日米両政府は沖縄の訴えを無視して、日米安全保障条約に基づく米軍基地の負担を沖縄に集中させ続けている。米軍基地が身近にないヤマトゥの大多数の住民は基地問題に対する関心が薄い。日本全体の安全のためには沖縄の犠牲はやむを得ない。そのような意識を作り出すことによって日米安保体制

が安定すると日本政府は考えているのだ。

それに対し沖縄では、沖縄への基地集中は「構造的差別」であるという批判がなされてきた。日本政府は「沖縄の基地負担軽減」を口にはするが、実際には真逆のことをやっている。中国や北朝鮮の軍事的脅威を宣伝して、市民の恐怖心を煽りつつ、新たな米軍基地の建設と自衛隊の配備拡大を進めている。

このような沖縄の歴史と現状を踏まえつつ、この数年、筆者が沖縄で取り組んできた東村高江のヘリパッド建設反対の運動と、名護市辺野古の新基地建設反対の運動について報告したい。

 

【3人の米兵による強姦事件とSACO合意】

1995年9月4日の午後8時頃、沖縄島北部のある街で買い物に出た12歳の女子小学生が、米兵3人に車で拉致され、強姦される事件が発生した。大けがを負わされた被害者は病院に運ばれ、捜査した沖縄の警察は犯人の米兵たちを割り出した。しかし、いったん基地内に逃げ込んだ米兵に関して、沖縄県警は即座に逮捕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事件の衝撃は沖縄全土を揺るがした。沖縄戦から50年が経過したにもかかわらず、米軍基地が集中し、米兵による凶悪犯罪がくり返されていることに対し、沖縄県民の怒りが沸騰した。10月21日に開かれた県民大会には、沖縄全体で8万5000人が参加(主催者発表)し、日本復帰後最大といわれる規模となった。

沖縄の状況を目にして日米両政府は強い危機感を抱いた。このままでは在沖米軍基地の使用が不安定化し、日米安保体制が根底から揺らいでいく。そのような認識のもと、沖縄県民の怒りを鎮めるために沖縄に関する特別行動委員会(通称SACO)を立ち上げ、沖縄の「基地負担軽減」策を打ち出していった。その最大の目玉となったのが、市街地の中心部に位置し、「世界で最も危険な基地」を言われる米海兵隊・普天間飛行場の返還であった。

しかし、返還とは名ばかりで、実際には沖縄県内の別の場所に「移設」するものだった。しかも、普天間基地にはない新たな機能(港湾施設や装弾場)が付け加えられ、老朽化した基地の代わりに最新の基地を造ろうとする日米両政府の思惑が明らかとなった。

SACOの中で打ち出された合意の中には、沖縄島の米軍基地の中でも最大の面積を持つ北部訓練場の過半の返還もあった。沖縄島北部はヤンバルと呼ばれ、亜熱帯の森が広がっている。ノグチゲラやヤンバルクイナ、ヤンバルテナガコガネなど、世界中でも同地域にしか生息しない生物が多数生息し、「東洋のガラパゴス」と呼ばれる豊かな生態系を持つ。

その森を利用して米軍は北部訓練場(ジャングルトレーニングセンター)を作り、ベトナム戦争の頃からゲリラ戦やサバイバルの訓練を行ってきた。兵士の行動はヘリコプターと連動して行われるため、森の各所にはヘリパッドが造られ、離着陸訓練も頻繁に行われている。

SACOの合意では、北部訓練場の約半分を返還する代わりに、新たに6基のヘリパッドを建設することが条件となっていた。その6基は東村高江区の集落を囲むように建設されるため、地元では反対運動が起こった。

 

【高江におけるヘリパッド建設反対の取り組み】

高江ではN1地区に2基、N4地区に2基、H地区に1基、G地区に1基の計6基のヘリパッド建設計画が打ち出されていた。高江区の住民を中心に反対運動が取り組まれていたが、私が高江に通って反対運動に参加するようになったのは、2012年の1月頃からである。

 当時、N4地区とN1地区でヘリパッド建設が着手され、木々の伐採や資材の搬入が行われていた。森を切り開き、直径45メートルの着陸帯と、周りを囲む幅15メートルの無障害物帯を造る工事である。着陸帯は深さ50センチまで掘り下げられ、砂利が敷き詰められる。それほど難しい工事ではないが、N1、H、G地区は森の中の現場まで工事用道路を造ら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ために大量の樹木が伐採され、貴重な動植物の生息地が破壊される。

ヘリパッドは米軍の最新の輸送機であるMV22オスプレイも使用する。重低音の爆音が音に敏感な鳥類の生息を脅かし、エンジンから吹き降ろす熱風によって植物にも深刻な影響を受けることが予想された。高江区住民も米軍機の爆音と墜落の危険に日々さらされることになる。

高江区は人口150人ほどの小さな集落である。地域住民を支える市民が県内外から集まり、森の中に入ろうとする作業員や運び込まれようとする資材を阻止する行動が連日とりくまれた。

2012年7月から2014年3月まではN4地区の二つのヘリパッド建設に反対する行動を取り組んだ。平均的な1日は午前6時に集合し、北部訓練場のメインゲートから入ろうとする作業員と資材を止めるものだった。道路を移動する工事車両を数キロ先からチェックし、無線機で連絡を取りながら車両を止め、説得活動を行う。ゲートから入れない作業員は森の中を通って現場に向かおうとする。それを追っかけて森の中でも攻防が続いた。

メインゲートでの阻止・監視活動は午前6時から夜の9時まで15時間続き、ゲートが閉まってからは車を止めて中で寝泊まりした。24時間の行動が連日続いた。現場に入るのが難しくなった作業員たちは、基地内に宿泊所を作って工事を進めた。必要な資材は別の工事を装って搬入してあったため、N4の2基のヘリパッドは予定を大幅に遅れたが2014年3月末までに完成した。

 

【全国から500人の機動隊を派遣して暴力的に工事を強行】

その後、N1、H、G地区のヘリパッド建設は、工事用ゲートの前を市民が車で封鎖したため、2年以上にわたって手を付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かし、2016年の7月に入って日本政府は、沖縄県警に加えて全国から500人の機動隊を沖縄に派遣し、大弾圧態勢を敷いて3地区のヘリパッド建設を強行した。

7月22日の早朝、N1地区の工事用ゲートをふさいでいた市民の車両に対し、800人ほどの警察官・機動隊員が襲いかかった。車の上で抵抗する市民は引きずり下ろされ、車両が撤去された。機動隊員の暴力によってけが人が続出した。人口150人ほどの集落はその数倍の機動隊員に取り囲まれた。周辺の道路は何重にも検問が行われ、厳戒態勢が敷かれた。

そういう中でも反対する市民は、創意工夫を凝らして阻止・抗議行動を展開した。道路を車で封鎖し、座り込んで工事車両を止めたり、資材を運ぶダンプカーの車列の前を徐行運転したり、道路上での行動は数十キロの範囲で行われた。砂利を積み込む採石場でも阻止行動が行われた。警察の弾圧が日増しに厳しくなり、逮捕者が何名も出たが、行動は最後まで貫かれた。

作業員や資材が入る工事用ゲートの前では、最後の阻止線として市民の座り込みが続いた。数百人規模で市民が座り込めば、機動隊も簡単には手が出せない。しかし、数が少なければ力尽くで排除され、抵抗する市民には暴力がふるわれる。ダンプカーが採石場から往復するたびに強制排除がくり返された。

 

【大阪府警の機動隊員による「土人」「シナ人」発言】

その過程で、大阪府警の機動隊員が抗議する市民に対し、「土人」「シナ人」と発言する事件が起こった。その様子を筆者がビデオ撮影してユーチューブに投稿し、メディアにも映像を提供したことで、全国的に大きなニュースとなった。

沖縄は1879年に日本に併合されるまで、琉球国という一つの国だった。薩摩藩に実権を握られていたとはいえ、19世紀半ばにはアメリカやフランス、オランダと修好条約を結ぶなど外交権を保持していた。しかし、日本に併合されてからは、政治、経済から言語や生活習慣にいたるまで日本への同化を強いられ、日本人からは一等劣った「琉球人」「沖縄人」として差別された。

私の祖父母は1920年代に大阪で働いており、父も大阪で生まれている。ヤマトゥに出稼ぎに出た多くの沖縄人が、差別と偏見にさらされて苦しんでいる。食堂に入ろうとすると「琉球人、朝鮮人お断り」という張り紙が張られていた、というのは私が子どもの頃に祖父母から聞いた話である。

高江で発せられた大阪府警の機動隊員による「土人」「シナ人」発言は、そのような歴史体験を思い出させるものだった。沖縄では大きな批判が起こり、県議会でも糾弾決議が上がった。日本政府もさすがに問題としないわけにはいかなくなり、警察庁のトップが謝罪する事態となった。発言した機動隊員二人も処分され、大阪に戻された。

この数年、ヤマトゥでは沖縄に対するヘイトスピーチが広がっている。特に米軍基地建設に反対している沖縄人に対し、金をもらってやっているだの、北朝鮮や中国の工作員とつながっているなどのデマが流布されている。その中心となっているのはネトウヨと呼ばれる民間の保守グループだ。

本来、警察はそれを取り締まる側にある。大阪府警の機動隊員による「土人」「シナ人」発言は、規制すべき公務員が勤務時間中に行ったものであり、極めて悪質だ。そこまで沖縄差別が広がっていることに慄然とする。

 

【森の中での阻止・抗議行動】

高江では道路や採石場での取り組みと並行して、ヘリパッド建設現場での阻止・抗議行動も取り組まれた。日本政府・沖縄防衛局は、北部訓練場内への進入は刑事特別法に違反するとし、逮捕をちらつかせた。そのような脅しにひるむことなく多くの市民が森に入り、何度も工事を止めた。

危機感を抱いた日本政府は、抗議行動のリーダーを逮捕することで運動つぶしを図ってきた。10月17日、沖縄平和運動センター議長の山城博治さんが逮捕された。資材置き場の周辺に張られた鉄線を1本切ったというだけで、器物損壊の罪を負わされたのだ。本来なら軽い取り調べを受けて解放される程度の案件だが、沖縄県警は山城さんを狙い撃ちし、暴行や威力業務妨害などで逮捕をくり返した。

山城さんは血液のガンを患って治療中の身であった。長期勾留は山城さんの健康悪化と運動の破壊を狙ったものであり、保釈請求がくり返されたが、沖縄県警は5カ月に及ぶ長期勾留を行った。2017年3月18日に釈放されたあと、山城さんは6月にスイス・ジュネーブの国連人権理事会で、自らに加えられた人権侵害について訴えている。

高江のヘリパッドは12月には本体部分がほぼ完成し、12月22日には北部訓練場約半分の返還式典が開かれた。その内実は、使っていない部分を返還する一方で、MV―22オスプレイの使用も可能な新しいヘリパッドを造り、訓練場をコンパクトにまとめて機能を強化するものでしかない。

2017年10月11日、東村高江区の牧草地に米海兵隊のCH―53E大型輸送ヘリコプターが不時着し、直後に炎上する事故が発生した。死傷者はなかったが、民家からは300メートルほどしか離れていない場所だった。新たなヘリパッドが建設されることで高江区と周辺での訓練が増え、爆音被害と事故の危険性が増す、という住民の不安は現実となっている。

高江のヘリパッド建設は、日本政府が沖縄の民意を踏みにじり、警察・機動隊の暴力によって強行された。北部訓練場で鍛えられた米兵たちは、ベトナムやアフガニスタン、イラクなど世界各地の戦場に派遣されて殺戮と破壊をくり返してきた。それを黙認することは、沖縄人が米軍の侵略戦争に間接的であれ加担することになる。それを拒否するためにも、北部訓練場の全面返還をめざす運動が再構築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辺野古新基地建設に反対する行動】

1997年12月21日、普天間基地の「移設」先として浮上した名護市辺野古の海上にヘリポートを建設することをめぐって名護市民投票が行われた。結果は建設反対が多数を占め、本来ならここで問題は解決するはずだった。しかし、当時の比嘉鉄也市長は民意を踏みにじり、政府に対し「移設」受け入れを表明して辞任した。基地関連の利権を目当てにした、この卑劣な行為によって名護市民は以後、20年以上に及ぶ対立と混乱に苦しめられることになった。

 2004年4月19日、日本政府は普天間基地の「移設」に向け、辺野古の沖合で海底ボーリング調査に着手した。市民は資材置き場に予定された漁港に座り込んで阻止行動を開始した。海上でもボーリング調査のために設置された単管やぐらに上り阻止行動を展開した。当時は警備にあたっていた海上保安庁が中立の立場を取ったため、市民の実力闘争によってボーリング調査は中止に追い込まれた。

その後、世界的な米軍再編が進められる中、普天間基地の「代替施設」案も紆余曲折があったが、2006年5月、辺野古岬の沿岸部にV字型2本の滑走路を持つ計画が、日本政府と名護市の間で合意された。辺野古側リーフ内と大浦湾の一部を埋め立て、港湾機能や装弾場など新たな機能を持つことも明らかとなった。単なる飛行場の「移設」ではなく新たな基地の建設だ、という批判が広がっていく。

沖縄では普天間基地の「県内移設」問題が起こって以降、反対する世論が常に7割を超えていた。すでに米軍基地が集中している沖縄の中で「移設」しても、政府がいう「負担軽減」にはならない、という不満が鬱積していた。そのため、辺野古「移設」を推進・容認する立場では選挙に勝てない状況となっていた。

2010年の県知事選挙で当選した仲井真弘多氏も、立候補の際には「県外移設」を主張し、「県内移設」については態度を曖昧にした。その本音は疑わしいものだった。実際、仲井真知事は2013年12月に腰痛の検査入院を理由に東京へ行き、日本政府と秘密裏に交渉を重ねて、辺野古「移設」に向けた埋め立ての承認に踏み切った。

 沖縄県内では猛反発が起こり、仲井真知事は支持を失ったが、日本政府は2014年7月1日に辺野古新基地建設に着手し、8月からは海底ボーリング調査を開始した。市民による阻止・抗議行動も即座に起こった。陸上ではキャンプ・シュワブのゲート前で座り込みが、海上では船とカヌーによる行動が始まった。

 

【オール沖縄という枠組みの誕生とその背景】

 そういう中、2014年11月16日に沖縄県知事選挙が行われた。日本政府が全面的に支援し、再選を目指す仲井真氏に対抗して、新基地建設に反対する側が立てたのは、元自民党沖縄県連幹事長で那覇市長の翁長雄志氏だった。

なぜ元自民党県連の幹部だった翁長氏が、新基地建設反対の立場で立候補したのか。そこには沖縄の政治・経済状況の大きな変化があった。

沖縄でも政治の保守化が進んでいる。2006年、2010年の県知事選挙では「革新のホープ」といわれた糸数慶子氏、伊波洋正氏が相ついで敗北した。社民党・共産党・沖縄社会大衆党を中心とした革新共闘という枠組みでは、日本政府が全面的に支援し、自民党・公明党が推す候補者に勝てないという構図が鮮明となった。

そこで新たに作り出されたのが「オール沖縄」という枠組みである。革新系の政党と自民党、経済界の一部が、辺野古新基地建設反対、MV―22オスプレイの沖縄配備撤回を一致点に共闘を組む方式である。そのために日米安保条約や自衛隊、辺野古新基地以外の米軍基地の県内移設、泡瀬干潟などの対立する課題は棚上げにされた。

それまで普天間基地の辺野古「移設」に賛成していた自民党や経済界の一部が反対に転換したのはなぜか。そこには2000年代に入り、返還された米軍基地の跡地利用がうまくいき、新たな商業地域が開発されることで、税収や土地の資産価値、雇用などが、米軍基地の頃よりも大幅に延びたことがある。米軍基地は新たな利潤を生みだす場ではなく、雇用も限定されている。米軍基地を返還させ、再開発した方が多くの利益を生み出し、沖縄のためになる、という認識が広がった。

もう一つの大きな理由は、2001年9月11日に米国で起こった同時多発攻撃である。ニューヨークの貿易センタービルや米国防総省本庁舎に乗っ取られた民間機が突っ込んだ事件に、沖縄の米軍基地も即座に反応した。基地のゲートやフェンス沿いに武装した米兵が立ち、沖縄の基地も攻撃を受け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緊張が県民にも広がった。

同事件に沖縄の主要産業である観光業は大きな打撃を受けた。修学旅行をはじめとした宿泊予約のキャンセルが相つぎ、その回復に長期間を要した。その経験から沖縄の観光業者の中で、観光は平和産業であり、戦争の不安がある所に観光客は来ない。軍事基地と観光は相容れない、という声が上がるようになった。

沖縄経済は基地・公共工事・観光を3本柱とする「3K経済」といわれてきた。その中で基地と公共工事の占める割合が低下する一方で、観光業は飛躍的に伸びている。日本国内だけでなく韓国や台湾、中国など東アジア諸国からの観光客も急増している。

米軍基地に依存する時代は終わった。これからは東アジアの平和的環境をつくり、その中で沖縄の経済的・政治的自立を図っていくことが重要だ。そういう認識を持つに至った自民党と経済界の一部が辺野古新基地建設反対に転換し、革新勢力と結びついて作り出されたのが「オール沖縄」である。

それは2014年11月の県知事選挙で大成功した。仲井真氏は前年の埋め立て承認で県民の信頼を失っており、新人の翁長氏が10万票以上の大差をつけて圧勝した。

さらに「オール沖縄」勢力は、同年12月14日に行われた衆議院選挙でも4選挙区すべてで勝利し、沖縄の民意が辺野古新基地建設反対であることをはっきり示した。

だが、日本政府はそれを完全に無視した。安倍晋三首相は当選した翁長新知事と面会することすら拒み、工事を強行し続けた。2016年3月から12月にかけて、埋め立て承認をめぐる国と県の裁判で一時的に工事が止まったが、その間に高江のヘリパッド建設が進められた。

そして、高江の工事がほとんど終わった12月に、最高裁の判決で沖縄県の敗訴が決まり、翁長知事は埋め立て承認の取り消しを撤回して工事が再開された。

 

【強行される辺野古新基地建設と反対運動】

日本政府・沖縄防衛局は当初、大浦湾側から埋め立てを始めるため護岸工事を着手した。しかし、途中から計画を変更し、大浦湾側の護岸工事を中断して、辺野古側のリーフ内で別の護岸工事を始めた。

大浦湾は水深が深く、活断層の存在も指摘されている。難工事が予想され、工事の進行が遅れることが予想された。それに対し辺野古側のリーフ内は満潮時でも水深4~5メートルしかなく、護岸工事が予定されている場所は干潮時に1メートル以下になる場所もある。

日本政府・沖縄防衛局は浅瀬の方から護岸工事を進め、埋め立てに向けて工事が進行していることを県民に印象付けようとした。もう後戻りできない所まで工事は進んでいる、と県民に思い込ませ、どんなに頑張っても国には勝てない、という諦めと無力感を生み出すのが狙いだ。

工事を進めるために日本政府は強権的姿勢を剥き出しにしている。沖縄県が出していた岩礁破砕許可の期限が2017年3月末に切れ、県は政府に工事を止めるよう指示した。だが、政府はそれを無視して工事を続けている。さらに、名護市の漁業協同組合に多額の補償金を払って漁業権を放棄させた。

埋め立て海域に生息する稀少サンゴに関しては、調査結果の県への報告を遅らせ、14群体のうち13群体を死滅させたうえで、残り1群体の移植を求めた。サンゴの移植は大半が失敗していると専門家は指摘している。しかし、政府は県が移植を許可しなければ、石材を投下してサンゴを破壊し、責任を県に転嫁しようとしている。

行政権限を駆使して工事を止めようとする翁長知事に対し、日本政府は先手を打って、知事の権限を封じ込めようとしている。ゲート前や海上での阻止・抗議行動に対しては、警察・機動隊と海上保安庁という暴力装置を使い弾圧をかけている。けが人や逮捕者が多数出るなかで、それでも県内外から多くの市民が集まって闘いを継続している。

だが、長期間の取り組みと工事の進行により、市民の間に疲労感や諦めがじわじわと広がっているのも事実だ。ゲート前でも海でも阻止・抗議行動への参加者が減っている。運動を立て直し、参加者を増やしていくことが課題となっている。

現在、日本政府・沖縄防衛局は、6月末までに辺野古側の海域を護岸で囲い込み、内側に土砂を投入しようとしている。本格的な埋め立てが始まったと大々的に宣伝し、11月に行われる県知事選挙で有利な状況を作ろうとしている。それはすでに効果を発揮している。

2月4日に名護市長選挙が行われ、これまで2期8年間、辺野古新基地建設に反対してきた現職の稲嶺進氏が敗北した。新人候補者は、辺野古新基地問題にはいっさい触れず、争点回避を行ったうえで、国と協力して予算を取り、市を活性化させると主張して当選した。

名護市は人口61000人ほどの小都市である。そこに政府の閣僚や国政与党の大物議員が乗り込み、選挙期間中に名護市に来た国会議員は100人を超した。それらの議員は企業や業界団体を回って票を集めた。地方の小都市の首長選挙に政府がここまで介入するのは、名護市以外ではあり得ない。辺野古新基地建設を進めるために、政府は地方自治を踏みにじったのだ。

名護市長選挙の結果は、護岸工事の進行が市民の中にあきらめ感を生み出している現実を示した。この流れは11月の県知事選挙までにさらに強まる可能性が高い。辺野古新基地建設は深場の大浦湾が難工事であり、そう簡単に完成するものではない。しかし、政府の狙い通りに名護市長選挙に続き県知事選挙でも敗北すれば、反対運動は大きな打撃を受ける。

沖縄県民が対峙しているのは、日本と米国という2つの巨大な国家だ。辺野古の闘いの困難さは言うまでもない。しかし、だからといって膝を屈するわけにはいかない。米軍や自衛隊の強化をこのまま許していけば、その先に待っているのは沖縄の破局である。東アジアで沖縄を巻き込んだ軍事紛争が生じれば、観光を中心とした沖縄経済は吹き飛んでしまう。

沖縄が再び戦争の被害者にも加害者にもならないために、米軍と自衛隊の基地強化に反対し、闘い続けるしかない。오키나와의 자립과 독립을 향한 저항 운동

 

 

 

메도루마 슌

 

시작하며

1945년 3월 하순, 미군이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일본군에 본격적으로 공격을 가하며 상륙작전이 시작됐다. 이후 3개월 동안 오키나와 각 섬에서는 주민이 휩쓸린 지상전이 전개됐다. 미일 군인과 일반 주민을 합쳐 전사자는 20만 명에 이르며, 오키나와 현민 중에서는 4명 중 1명(약 12만 명)이 희생됐다.

오키나와 주민이 사상을 당한 것은 오로지 미군의 공격에 의해서만은 아니었다. 일본군 중에서는 오키나와인에게 편견과 차별 의식을 갖고 스파이 혐의를 씌워서 주민을 학살한 병사도 있었다. 일본군이 주민의 식량을 강탈하고 참호에서 쫒아내는 일도 연이어 일어났다. 참호 밖으로 쫓겨난 주민은 미군의 포격에 그대로 노출됐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포로가 되지 말고 자결하라는 방침을 세웠다. 그것이 주민에게도 강제돼 옥쇄(玉碎)라는 이름의 집단사가 일어났다.

오키나와에서는 지금도 “군대는 주민을 지켜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나눠지고 있다. 이는 오키나와전(沖縄戦) 당시 일본군이 주민에게 가했던 부당한 처사로부터 비롯된 교훈이다. 오키나와전의 경험을 거친 오키나와인은 전쟁이나 군대를 강하게 부정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후의 정치 상황은 오키나와인의 소망을 짓밟는 형태로 진행됐다. 미군 점령 하에 놓인 오키나와는 전후 27년에 걸쳐서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미군 통치를 계속 받았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는 “태평양의 요석”으로 오키나와를 위치시키고, 미군의 전략 거점으로써 미군 기지를 강화해 나갔다. 쇼와 천황(昭和天皇) 히로히토도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바랐다(이른바 ‘천황메시지’가 이를 증명한다).

1950년대 야마토(일본) 각지에서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활발해지자 미국 정부는 자신들의 통치하에 있는 오키나와로 미군기지를 이전시켰다. 그로 인해 야마토의 미군기지는 감소했지만 오키나와에서는 그 반대로 늘어났다. 패전으로부터 73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일본 전체 미군 전용시설의 70% 이상이 오키나와에 집중돼 있다.

미군기지가 집중돼 있어서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에 의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살인, 강간 등의 흉악 범죄를 시작으로 미군기 추락과 차량 사고 등이 일어나 많은 오키나와인이 전후에도 희생됐다. 오키나와인은 미군기지 철수를 요구하는 운동을 계속해, 집회나 데모만이 아니라 미군 시설 건설이나 연습을 실력으로 저지하는 행동을 활발히 펼쳐왔다.

하지만 미일 양국 정부는 오키나와의 호소를 무시하고 미일안전보장조약에 입각해 미군기지 부담을 오키나와에 계속해서 집중시켜 왔다. 미군기지가 근처에 없어서 야마토의 대다수 주민들은 기지 문제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 일본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는 오키나와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그러한 의식이 굳어지면 미일안보체제가 안정될 것이라고 일본 정부는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이에 대항해 오키나와에서는 미군기지가 오키나와에 집중된 현상을 ‘구조적 차별’이라고 비판해 왔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기지부담 경감”에 대해 언급은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다. 중국이나 북조선의 군사적 위협을 선전해서 주민의 공포심을 부추겨서 새로운 미군기지 건설과 자위대의 배치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오키나와의 역사와 현장에 입각해 최근 몇 년 동안 필자가 몰두해온 헬리패드helipad 건설 반대 운동(히가시손 다카에高江)과 헤노코 신기지 건설 반대 운동에 대해 보고하고자 한다.

 

미군 세 명에 의한 강간 사건과 SACO합의

1995년 9월 4일 오후 8시 경, 오키나와 북부의 어느 마을에서 무언가를 사러나갔던 12살 여학생이 미군 병사 세 명에 의해 차로 납치돼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큰 부상을 입은 피해자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오키나와 경찰의 조사에 의해 범인이 미군 병사들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일단 기지 안으로 도망친 미군 병사를 오키나와 경찰이 바로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이 사건의 충격이 오키나와 전토를 뒤흔들었다. 오키나와전으로부터 50년이 경과됐음에도 불구하고 미군 기지가 집중돼 있고 미군에 의한 흉악 범죄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오키나와 현민의 분노가 비등했다. 10월 21일에 열린 현민 대회에는 오키나와 전체에서 8만 5천 명이 참가(주최 측 추산)해 일본복귀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로 기록됐다.

오키나와의 상황을 인식한 미일 양국 정부는 강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를 유지하는 것이 불안정하며 미일안보체제 또한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게 된다. 그렇게 의식한 미일 양국 정부는 오키나와 현민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오키나와에 관한 특별행동위원회(통칭 SACO)를 만들어서 오키나와의 ‘기지 부담 경감’안을 내세웠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이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해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지”로 불리는 미 해병대 후텐마 비행장의 반환이었다.

하지만 반환은 명목뿐으로 실제로는 오키나와현의 다른 장소로 기지를 ‘이설’하는 안이었다. 게다가 후텐마 기지에는 없는 새로운 기능(항만시설이나 장탄장装弾場)이 추가돼 노후화된 기지 대신에 최신의 기지를 만들려는 미일 양국 정부의 의도가 뻔히 들여다 보였다.

SACO 안에서 내세운 합의 중에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가운데 최대 면적을 지닌 북부 훈령장의 과반을 반환하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오키나와 북부에는 얀바루라 불리는 아열대숲이 펼쳐져 있다. 오키나와딱따구리, 얀바루 흰눈썹뜸부기, 얀바루 앞장다리풍뎅이 등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이 지역에만 사는 생물이 다수 생식하고 있는 “동양의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풍요로운 생태계가 펼쳐져 있다.

이 숲을 이용해서 미군은 북부 훈련장(정글 트레이닝 센터)를 만들어 베트남전쟁 무렵부터 게릴라전이나 서바이벌 훈련을 해왔다. 병사의 행동은 헬기와 연동돼 이뤄져서 숲 여기저기에 헬리패드가 만들어져서 이착륙 훈련도 빈번히 이뤄지고 있다.

SACO 합의로는 북부 훈련장의 약 반을 반환하는 대신에 새로 6기의 헬리패드를 건설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그 6기는 히가시손 다카에 지구의 집락을 둘러싸듯이 건설돼 이 지역에서는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다카에 헬리패드 반대 운동

SACO 합의로는 북부 훈련장의 반을 반환하는 대신에 새로 6기의 헬리패드를 건설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하지만 새로 건설될 헬리패드 6기는 히가시손 다카에 지구 집락을 둘러싸듯이 건설될 예정이어서 반대 운동이 지역에서 일어났다.

헬리패드는 다카에 N1지구에 2기, N4 지구에 2기, H지구에 1기, G지구에 1기 이렇게 총 6기가 건설될 예정이라 한다. 다카에구 주민을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펼쳐져 왔는데, 내가 다카에로 가서 반대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 1월 무렵부터다.

당시 N4지구와 N1 지구에서 헬리패드 건설이 착수돼 나무가 벌채되고 자재의 반입이 이뤄지고 있었다. 숲을 베어 직경 45미터 착륙 구역과 주위를 둘러싼 폭 15미터의 장해물이 없는 구역을 만드는 공사다. 착륙 구역은 깊이 50센티로 땅을 파내고 자갈을 채워넣는다. 그렇게 어려운 공사는 아니지만 N1, H, G지구는 숲속의 현장까지 공사용 도로를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서 대량의 수목이 벌채돼 귀중한 동식물의 생식지가 파괴되고 있다.

미군의 최신 수송기인 MV22오스프리도 헬리패드를 이용한다. 중저음 폭음이 소리에 민감한 조류의 생식을 위협하고 엔진으로부터 뿜어져 내려오는 열풍으로 식물에도 심각한 영향이 미칠 것으로 예상됐다. 다카에구 주민도 미군기의 폭음과 추락 위험에 일상이 노출돼 있다.

다카에구는 인구 150명 정도의 작은 집락이다. 지역 주민을 지원하는 시민들이 현 내외로부터 모여서 작업원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운송 자재를 저지하는 투쟁이 연일 계속돼 왔다.

2012년 7월부터 2014년 3월까지는 N4지구 두 곳에서 이뤄지는 헬리패드 건설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여왔다. 보통 오전 6시에 집합해 북부 훈련장 메인 게이트로 들어가려는 작업원과 자재를 막았다. 도로로 이동하는 공사 차량을 몇 킬로 앞에서 확인하고 무전기로 연락을 취해 차량을 멈춰 세우고 설득을 시도했다. 게이트로 들어가지 못 한 작업원은 숲을 통과해서 현장으로 가려 한다. 그들을 쫓아서 숲속에서도 공방이 계속됐다.

메인게이트에서 벌어진 저지 및 감시 활동은 오전 6시부터 밤 9시까지 15시간 동안 이어져서 게이트가 닫힌 후에 차를 세우고 그 안에서 잠을 청한다. 24시간 행동이 며칠이고 이어진다. 현장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워진 작업원들은 기지 안에 숙박소를 만들어 공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필요한 자재를 다른 공사로 위장해서 반입하거나 해서 N4에 헬리패드가 완성됐다. 예정보다 크게 늦은 2014년 3월의 일이다.

 

 

전국에서 500명의 기동대를 파견해서 폭력적으로 공사를 강행하다

공사용 게이트 앞을 시민이 차로 봉쇄한 결과 그 후 N1, H, G지구의 헬리패드 건설은 2년 이상 진행되지 못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2016년 7월 들어서 오키나와현 경찰에 더해 전국에서 500명의 기동대를 오키나와에 파견해 대 탄압 태세로 전환하고 헬리패드 건설을 세 지구에서 강행했다.

7월 22일 이른 아침, N1지구의 공사용 게이트를 막은 시민의 차량을 800명 정도의 경찰관과 기동대원이 습격했다. 차 위에서 저항하는 시민을 끌어 내리고 차량을 철거했다. 기동대원의 폭력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인구 150명 정도의 집락을 그보다 몇 배는 많은 기동대원이 둘러쌌다. 주변 도로에서는 몇 겹의 검문이 이뤄졌고 계엄 태세에 돌입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저항하는 시민은 독창적인 방안을 짜내서 저지/항의 행동을 전개했다. 도로를 차로 봉쇄하고, 농성하며 공사 차량을 막거나, 자재를 나르는 덤프트럭 앞을 차로 서행해 운전하는 등의 도로 위 행동은 수십 킬로 범위에 이르렀다. 자갈을 싣는 채석장에서도 저지 행동이 이어졌다. 경찰 탄압이 나날이 엄중해 지고 체포자가 계속 나왔지만 저항은 끝까지 이어졌다.

작업원이나 자재가 출입하는 공사용 게이트 앞에서는 최후의 저지선으로 시민의 농성이 계속됐다. 수백 명 규모로 시민이 농성을 하면 기동대원도 간단히 손을 댈 수 없다. 하지만 수가 적으면 힘에 밀려서 저항하는 시민에게 폭력이 쏟아진다. 덤프트럭이 채석장을 왕복할 때마다 강제적으로 시민을 탄압하는 행위가 반복됐다.

 

오사카 경찰 기동대원에 의한 ‘토인’ 및 ‘지나인’ 발언

그 과정에서 오사카 경찰의 기동대원이 항의하는 시민을 향해 ‘토인’, ‘지나인’이라고 발언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 모습을 필자가 비디오로 촬영해서 유튜브에 올리고 미디어에도 영상을 제공해 전국적인 뉴스가 됐다.

오키나와는 1879년 이론에 병합되기 전까지 류큐국(琉球国)이라는 하나의 나라였다. 사쓰마번(薩摩藩)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고는 해도 19세기 중반에는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와 수호조약을 맺는 등 외교권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 병합된 후부터는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언어, 생활습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동화될 것을 강요받고 일본인으로부터는 열등한 ‘류큐인’ ‘오키나와인’으로 불리며 차별을 당했다.

내 조부모는 1920년대 오사카에서 일했고 아버지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야마토로 돈을 벌러 간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차별과 편견에 노출돼 괴로워했다. 식당에 들어가려 하면 “류큐인, 조선인 사절”이라는 종이가 붙어있었다고 어릴 적 조부모로부터 들었다.

오사카부 경찰 기동대원이 다카에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을 ‘토인’ ‘지나인’이라 부른 것은 그러한 역사적 체험을 상기시킨다. 오키나와에서 강한 비판 여론이 일어나고 현의회에서도 규탄 결의가 이뤄졌다. 과연 일본 정부도 어물쩍 넘어갈 수 없게 돼 경찰철 수뇌가 사죄하는 사태로 번졌다. 그런 발언을 한 기동대원 두 명도 처분을 받고 오사카로 되돌아갔다.

최근 몇 년 동안 야마토에서는 오키나와를 향한 헤이트스피치가 더욱 폭 넓게 퍼져나가고 있다. 특히 미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오키나와인에 다해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거나, 북조선이나 중국의 공작원과 연결돼 있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있다. 그 중심은 넷우익이라 불리는 민간의 보수 그룹이다.

엄밀히 말하면 경찰은 그런 자들을 단속하는 측에 있다. 오사카부 경찰 기동대원에 의한 ‘토인’ ‘지아인’ 발언은 규제해야 하는 측에 서 있는 공무원이 근무 시간 중에 행한 것으로 지극히 악질적인 행위다. 그렇게 널리 오키나와 차별이 퍼져 있다는 사실에 섬뜩함을 느낀다.

 

숲 속에서의 저지 항의 행동

도로나 채석장에서의 대처와 병행해서 헬리포드 건설 현장에서의 저지, 항의 행동이 다카에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일본 정부, 오키나와 방위국은 북부 훈련장 안으로 시위대가 진입하면 형사특별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면서 항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체포될 수 있음을 내비쳤다. 그런 위협에 기죽지 않고서 많은 시민들이 숲으로 들어가 몇 번이고 공사를 중지시켰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 정부는 항의 행동 리더를 체포해서 운동을 분쇄하려 했다. 2016년 10월 17일, 오키나와 평화운동센터의 야마시로 히로지(山城博治) 의장이 체포됐다. 재료를 두는 곳 주변에 뻗어 있는 철선 하나를 잘랐다는 이유만으로 기물파손죄로 기소됐다. 통상적으로는 가벼운 조사를 받고서 풀려날 정도의 일인데 오키나와 경찰은 야마시로 씨를 노리고서 폭행과 위력업무방해죄의 명목으로 체포를 거듭했다.

야마시로 씨는 혈액암을 앓고 치료 중이었다. 장기 구류는 야마시로 씨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운동의 파괴를 노린 것이었다. 보석 청구를 거듭했음에도 오키나와현 경찰은 5개월 동안 야마시로 씨의 장기 구류를 강행했다. 야마시로 씨는 2017년 3월 18일에 석방된 후 6월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UN인권이사회에서 자신에게 가해진 인권 침해에 대해 호소했다.

다카에 헬리패드는 12월에 본체 부분이 거의 완성돼 12월 22일에는 북부 훈련장의 약 반을 반환하는 식전이 열렸다. 하지만 실상은 사용하지 않는 훈련장을 반환하는 대신에 오스프리를 쓸 수 있는 새로운 헬리패드를 짓고 훈련장을 간결하게 정리해 기능을 강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2017년 10월 11일 히가시손 다카에구의 목초지에 미해병대의 CH 53E 대형수송 헬기가 불시착한 직후에 불타오르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상자는 없었지만 민가로부터 300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장소였다. 새로운 헬리패드가 건설돼 다카에구와 주변에서의 군사 훈련이 빈번해지면 폭음 피해와 사고의 위험성이 증가하리라던 주민의 불안감은 현실이 됐다.

다카에에서의 헬리패드 건설은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의 민의를 짓밟고 경찰 기동대의 폭력을 써서 강행한 것이다. 북부 훈련장에서 단련된 미군 병사들은 베트남이나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등 세계 각지의 전쟁터로 파견돼 살육과 파괴를 반복해 왔다. 그것을 묵인하면 오키나와인이 미군의 침략전쟁에 간접적으로 가담하는 것이 된다. 이를 거부하기 위해서라도 북부 훈련장의 전면 반환을 목표로 한 운동을 재구축해야만 한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저항

1997년 12월 21일, 후텐마기지의 ‘이설’처로 부상한 나고시 헤노코 해상에 헬리패드를 건설하는 안을 두고 나고 시민들의 투표가 진행됐다. 결과는 건설 반대가 다수를 점해서 원래대로라면 이 문제는 깨끗이 해결됐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히가 데쓰야(比嘉鉄也) 시장은 민의를 짓밟고서 ‘이설’을 받아들이겠다고 정부를 향해 표명한 후 사직해 버렸다. 기지 관련 이권을 중심으로 한 이 비열한 행위로 인해 나고 시민은 이후 20년 이상 대립과 혼란 속에서 괴로움을 겪어왔다.

2004년 4월 19일, 일본 정부는 후텐마 기지 ‘이설’을 향해서 헤노코 앞바다에서 해저 지질조사 시공(boring) 조사에 착수했다. 시민들은 자재 보관장으로 예정된 어항(漁港)에서 농성하며 저지 행동을 개시했다. 해상에서도 지질조사 시공 조사를 위해 설치된 철골 구조물 위에 올라가서 저지 행동을 개시했다. 당시는 경비를 하고 있던 해상보안청이 중립적인 자세를 취해서 시민의 실력 투쟁에 의해 시공 조사는 중지됐다.

그 후 세계적으로 미군 재편이 이뤄지는 가운데 후텐마기지의 ‘대체 시설’ 방안도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2006년 5월, 헤노코 곶 연안부에 V자형 활주로 두 개를 만들려는 계획이 일본 정부와 나고시 사이에서 합의됐다. 헤노코 측 사주(砂洲) 안과 오우라만(大浦湾) 일부를 메워서 항만 기능이나 장탄장 등의 새로운 기능을 만드는 것도 드러났다. 단지 비행장 ‘이설’이 아니라 새로운 기지 건설이라는 비판이 퍼져 갔다.

오키나와에서는 후텐마 기지의 ‘현내 이설’ 문제가 일어난 이후 반대 여론이 항상 7할을 넘고 있다. 이미 미군 기지가 집중돼 있는 오키나와 안에서 ‘이설’을 하더라도 정부가 말하는 ‘부담 경감’과는 거리가 멀다는 불만이 가득 쌓여 있다. 그래서 헤노코 ‘이설’을 추진 및 용인하는 측에 서면 선거에서 이길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2010년 현지사 선거에서 당선된 나카이마 히로카즈(仲井真弘多) 씨도 입후보 당시에는 ‘현외 이설’을 주장하고 ‘현내 이설’안에 대해서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 속마음은 의심스러웠다. 실제 나카이 지사는 2013년 12월에 요통 검사로 입원한다는 이유로 도쿄로 가서 일본 정부와 비밀리에 교섭을 거듭해 헤노코 ‘이설’을 위한 매립 작업을 독단으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오키나와현에서는 맹렬한 반발이 일어났고 나카이 지사는 지지를 잃었지만 일본 정부는 2014년 7월 1일에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착수해서 8월부터는 해저 지질 조사 작업을 개시했다. 시민에 의한 저항이 즉시 일어났다. 육지에서는 캠프슈와브(Camp Schwab) 게이트 앞에서 농성이 벌어졌고, 해상에서는 배와 카누를 이용한 저항이 시작됐다.

 

 올 오키나와라는 틀의 탄생과 그 배경

그런 가운데 2014년 11월 16일에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가 이뤄졌다. 일본 정부가 전면적으로 지원하는 가운데 재선을 노리는 나카이마 씨에 대항해 신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측이 세운 후보가 바로 구 자민당 오키나와현 간사장이며 나하 시장인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씨다. 어째서 구 자민당 현연연합(縣聯聯合) 간부였던 오나가 씨가 신기지 건설을 반대하며 입후보를 하게 된 것일까? 그 기저에는 오키나와의 정치, 경제 상황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오키나와에서도 정치의 보수화가 진행돼 왔다. 2006년, 2010년 현지사 선거에서는 ‘혁신의 희망’이라 불리던 이토카즈 게이코(糸数慶子) 씨, 이하 히로마사(伊波洋正) 씨가 연이어 패배했다. 사민당, 공산당, 오키나와사회대중당을 중심으로 한 혁신 공동투쟁이라는 틀로는 일본 정부가 전면적으로 지원하며 자민당과 공민당이 미는 후보를 더 이상 이기기 힘들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거기서 창출된 것이 ‘올 오키나와(All Okinawa)’다. 이는 혁신계 정당과 자민당, 경제계 일부가 헤노코 신기지 건설반대, 오스프리 오키나와 배치 철회를 공통분모로 해서 공동 투쟁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미일안보조약이나 자위대, 헤노코 신기지 이외의 미군기지 현내 이설, 아와세(泡瀬) 간석지 등 대립되는 과제는 보류됐다.

지금까지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 ‘이설’에 찬성하던 자민당이나 경제계 일부가 반대로 돌아선 이유는 무엇일까? 2000년대에 들어서 반환된 미군기지 부지를 잘 이용해 새로운 상업 지구가 개발돼서 세수와 토지의 자산 가치, 고용 등이 전보다 훨씬 큰 폭으로 늘어났다. 미군기지는 새로운 이윤을 창출하는 시설이 아니며 고용도 한정돼 있다. 미군 기지를 반환하게 하고 재개발하는 편이 많은 이익을 창출하고 오키나와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레 퍼져나갔다.

또 하나의 큰 이유는 2001년 9월 11일에 미국에서 일어난 동시다발 공격이다. 뉴욕 무역센터빌딩이나 펜타곤에 납치된 민간기가 돌진한 사건에 오키나와 미군기지도 즉시 반응했다. 기지 게이트나 철조망을 따라 무장한 미군 병사가 서 있어서 오키나와 기지도 공격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긴장감이 현민에게도 퍼졌다.

이 사건은 오키나와의 주요 산업인 관광사업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수학여행을 시작으로 숙박 예약이 연이어 취소돼 피해를 회복하는데 긴 시간이 걸렸다. 그 경험을 통해 오키나와 관광업자들은 관광이 평화산업이며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불안한 곳에 관광객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군사기지와 관광은 서로 맞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키나와 경제는 기지, 공공공사, 관광을 세 축으로 하는 ‘3K 경제’로 불려왔다. 그 중에서 기지와 공공공사가 점하는 비중이 저하되는 한편, 관광사업은 최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일본 국내만이 아니라 한국, 타이완,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미군기지에 의존하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동아시아의 평화적 환경을 구축하고 그 가운데 오키나와의 경제적, 정치적 자립을 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인식을 갖게 된 자민당과 경제계 일부가 헤노코 신기지 건설반대로 돌아서서 혁신세력과 손을 잡고 만들어낸 것이 ‘올 오키나와’이다.

이는 2014년 11월 현지사 선거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나카이마 씨는 전년도에 매립을 승인한 후 현민의 신뢰를 상실한 결과 정치 신인인 오나가 씨가 10만 표 이상의 차로 압승을 거뒀다.

더욱이 ‘올 오키나와’ 세력은 같은 해 12월 14월에 이뤄진 중의원 선거 때도 4선거구 모두에서 승리해 오키나와의 민의가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것임을 명확히 드러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것을 완전히 무시했다. 아베 신죠 수상은 당선된 오나가 지사와 면회를 하는 것조차 거부한 채 공사를 계속 강행하고 있다. 2016년 3월부터 12월에 걸쳐서 매립 승인을 둘러싸고 국가와 현 사이에 벌어진 재판으로 공사가 일시적으로 중지됐지만 그 사이에 다카에 헬리패드 건설이 진행됐다.

또한 다카에 공사가 거의 끝난 12월에 대법원 판결로 오키나와현의 패소가 결정돼 오나가 지사가 매립 취소를 철회해 공사가 다시 시작됐다.

 

강행되고 있는 헤노코 신기지 건설과 이에 항거하는 반대운동

일본 정부와 오키나와 방위국은 당초 오우라만 쪽에서부터 매립을 시작하기 위해 호안 공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도중에 계획을 변경해서 오우라만 측의 호안 공사를 중단하고 헤노코 측의 사주(砂洲) 안에서 별도의 호안공사를 개시했다.

오우라만은 수심이 깊고 활단층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난공사가 예상돼 공사 진행이 늦어질 것이라 예상됐다. 그에 비해 헤노코 쪽 사주 안은 만조 때에도 수심이 4~5미터 밖에 되지 않고 호안 공사가 예정된 장소는 간조 때는 수심이 1미터 이하인 곳도 있다.

일본 정부, 오키나와 방위국은 얕은 여울에서부터 호안 공사를 개시해 매립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음을 현민의 뇌리에 각인시키려 하고 있다. 이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각인시켜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국가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체념과 무력감을 심으려는 것이 목적이다.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일본정부는 강권적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오키나와현이 제출한 암초파쇄 허가 기한이 2017년 3월말로 끝나자, 현은 정부에 공사를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것을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더구나 나고시의 어업협동조합에 고액의 보상금을 지불해서 어업권을 포기하도록 했다.

매립 해역에 생식하는 희소 산호초에 관해서는 조사 결과를 오키나와현에 통고하는 시기를 늦춰서 14군체(群体) 중에서 13군체를 사멸시킨 것도 모자라서 나머지 1군체의 이식을 요구했다. 산호 이식은 대부분 실패한다고 전문가는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현이 이식을 허가하지 않으면 석재를 투하해서 산호를 파괴하고 책임을 현에 전가하려 하고 있다.

행정권한을 구사해서 공사를 막으려 하는 오나가 지사에 맞서 일본 정부는 지사의 권한을 봉하는 선수를 치고 있다. 게이트 앞이나 해상에서의 저지/항의 투쟁에 대해서는 경찰, 기동대, 그리고 해상보안청이라는 권력 장치를 써서 탄압을 가하고 있다. 부상자나 체포자가 다수 속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현 안팎에 많은 시민이 모여 들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린 싸움과 공사 진행으로 인해 시민 사이에는 피로감과 체념이 서서히 퍼져가고 있음도 사실이다. 게이트 앞에서도 바다에서도 저지, 항의 행동에 나서는 참가자 수가 줄어 들곤 있다. 운동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참가자를 늘리는 것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일본 정부, 오키나와 방위국은 6월말까지 헤노코 측 해역을 호안에서 둘러싸 가두고 안쪽에 토사를 채우려 하고 있다. 본격적인 매립이 시작됐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해 11월에 있을 현지사 선거에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이는 이미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2월 4일에 나고시장 선거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2선(8년) 동안 헤노코 신기지 건설에 반대해 왔던 이나미네 스스무(稲嶺進) 씨가 패배했다. 선거에 나온 새로운 후보는 헤노코 신기지 문제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쟁점을 회피한 채 일본 정부와 협력해서 예산을 편성하고 시를 활성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해서 당선됐다.

나고시는 6만 천 명 정도의 인구밖에 없는 소도시다. 그런 곳에 정부의 각료나 국정 여당의 거물 의원이 찾아왔다. 선거 기간 중에 나고시에 온 국회의원은 100명을 넘어선다. 이들 의원은 기업과 산업계 단체를 돌며 표를 모았다. 지방 소도시의 수장 선거에 정부가 이렇게까지 개입한 것은 나고시 외에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는 지방자치를 짓밟고 있다.

나고시장 선거 결과는 호안 공사가 진행된 후 시민들 사이에서 포기하는 마음이 생긴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흐름은 11월에 있을 현지사 선거에서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은 수심이 깊은 오우라만이 난공사 지역으로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노리는 대로 나고시장 선거에 이어서 현지사 선거에서도 패배한다면 반대운동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임이 분명하다.

오키나와 현민이 대립하고 있는 상대는 일본과 미국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국가다. 헤노코에서의 싸움이 곤란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 미군과 자위대가 강화되는 것을 그대로 허용한다면 눈앞에 놓인 현실은 오키나와의 파국뿐이다. 동아시아에서 오키나와가 휘말린 군사 분쟁이 벌어진다면 관광을 중심으로 한 오키나와 경제는 날아가고 말 것이다.

오키나와가 다시 전쟁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되지 않기 위해서는 미군과 자위대의 기지 강화에 반대해 지치지 말고 계속 싸우는 방법 외에는 없다.

 

곽형덕 옮김

【はじめに】

 1945年3月下旬、米軍は沖縄の日本軍に本格的な攻撃を加え、上陸作戦を開始した。以後、3カ月以上にわたり、沖縄の各島では住民を巻き込んだ地上戦が展開された。日米両軍の兵士と一般住民の死者は20万余に及び、沖縄県民の4人に1人(約12万人)が犠牲になったと言われる。

 沖縄住民の死傷は米軍の攻撃によるものだけではなかった。日本軍は沖縄人に偏見と差別を抱き、スパイの疑いをかけて住民を虐殺する兵士もいた。日本軍による住民の食料強奪、壕追い出しも相次いだ。壕を追い出された住民は米軍の砲撃にさらされた。当時の日本軍は、米軍の捕虜にならずに自決しろ、という方針だった。それが住民にも強制されて玉砕という名の集団死を引き起こした。

 沖縄では現在も、「軍隊は住民を守らない」という言葉がふつうに言われる。それは沖縄戦における日本軍の住民に対する仕打ちから導き出された教訓である。沖縄戦の経験を経て沖縄人は、戦争や軍隊に対する強い否定感と平和志向を持つようになった。

 しかし、第2次世界大戦後の政治状況は、沖縄人の願いを踏みにじる形で進んだ。米軍の占領下におかれた沖縄は、戦後27年間にわたって日本から切り離され、米軍統治が続けられた。米国は東アジアにおける共産主義の拡大を阻止する「太平洋の要石」と沖縄を位置づけ、米軍の戦略拠点として基地を強化した。昭和天皇ヒロヒトもみずからの地位を守るためそれを望んだ(天皇メッセージ)。

 1950年代にヤマトゥ(日本)の各地で米軍基地への反対運動が活発になると、米国政府はみずからの統治下にある沖縄に米軍基地を移転した。それによってヤマトゥでは米軍基地が減少していったが、沖縄では逆に増加していった。敗戦から73年を経ようとする今日でも、日本全体の米軍専用施設の70%以上が沖縄に集中している。

 米軍基地の集中は米軍による事件、事故の多発を生む。殺人、強姦などの凶悪事件をはじめ、米軍機の墜落や車両事故などによって、戦後も多くの沖縄人が犠牲になってきた。沖縄人は米軍基地撤去を求める運動を続け、集会やデモだけでなく、米軍の施設建設や演習を実力で阻止する行動も取り組まれてきた。

しかし、日米両政府は沖縄の訴えを無視して、日米安全保障条約に基づく米軍基地の負担を沖縄に集中させ続けている。米軍基地が身近にないヤマトゥの大多数の住民は基地問題に対する関心が薄い。日本全体の安全のためには沖縄の犠牲はやむを得ない。そのような意識を作り出すことによって日米安保体制

が安定すると日本政府は考えているのだ。

それに対し沖縄では、沖縄への基地集中は「構造的差別」であるという批判がなされてきた。日本政府は「沖縄の基地負担軽減」を口にはするが、実際には真逆のことをやっている。中国や北朝鮮の軍事的脅威を宣伝して、市民の恐怖心を煽りつつ、新たな米軍基地の建設と自衛隊の配備拡大を進めている。

このような沖縄の歴史と現状を踏まえつつ、この数年、筆者が沖縄で取り組んできた東村高江のヘリパッド建設反対の運動と、名護市辺野古の新基地建設反対の運動について報告したい。

 

【3人の米兵による強姦事件とSACO合意】

1995年9月4日の午後8時頃、沖縄島北部のある街で買い物に出た12歳の女子小学生が、米兵3人に車で拉致され、強姦される事件が発生した。大けがを負わされた被害者は病院に運ばれ、捜査した沖縄の警察は犯人の米兵たちを割り出した。しかし、いったん基地内に逃げ込んだ米兵に関して、沖縄県警は即座に逮捕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事件の衝撃は沖縄全土を揺るがした。沖縄戦から50年が経過したにもかかわらず、米軍基地が集中し、米兵による凶悪犯罪がくり返されていることに対し、沖縄県民の怒りが沸騰した。10月21日に開かれた県民大会には、沖縄全体で8万5000人が参加(主催者発表)し、日本復帰後最大といわれる規模となった。

沖縄の状況を目にして日米両政府は強い危機感を抱いた。このままでは在沖米軍基地の使用が不安定化し、日米安保体制が根底から揺らいでいく。そのような認識のもと、沖縄県民の怒りを鎮めるために沖縄に関する特別行動委員会(通称SACO)を立ち上げ、沖縄の「基地負担軽減」策を打ち出していった。その最大の目玉となったのが、市街地の中心部に位置し、「世界で最も危険な基地」を言われる米海兵隊・普天間飛行場の返還であった。

しかし、返還とは名ばかりで、実際には沖縄県内の別の場所に「移設」するものだった。しかも、普天間基地にはない新たな機能(港湾施設や装弾場)が付け加えられ、老朽化した基地の代わりに最新の基地を造ろうとする日米両政府の思惑が明らかとなった。

SACOの中で打ち出された合意の中には、沖縄島の米軍基地の中でも最大の面積を持つ北部訓練場の過半の返還もあった。沖縄島北部はヤンバルと呼ばれ、亜熱帯の森が広がっている。ノグチゲラやヤンバルクイナ、ヤンバルテナガコガネなど、世界中でも同地域にしか生息しない生物が多数生息し、「東洋のガラパゴス」と呼ばれる豊かな生態系を持つ。

その森を利用して米軍は北部訓練場(ジャングルトレーニングセンター)を作り、ベトナム戦争の頃からゲリラ戦やサバイバルの訓練を行ってきた。兵士の行動はヘリコプターと連動して行われるため、森の各所にはヘリパッドが造られ、離着陸訓練も頻繁に行われている。

SACOの合意では、北部訓練場の約半分を返還する代わりに、新たに6基のヘリパッドを建設することが条件となっていた。その6基は東村高江区の集落を囲むように建設されるため、地元では反対運動が起こった。

 

【高江におけるヘリパッド建設反対の取り組み】

高江ではN1地区に2基、N4地区に2基、H地区に1基、G地区に1基の計6基のヘリパッド建設計画が打ち出されていた。高江区の住民を中心に反対運動が取り組まれていたが、私が高江に通って反対運動に参加するようになったのは、2012年の1月頃からである。

 当時、N4地区とN1地区でヘリパッド建設が着手され、木々の伐採や資材の搬入が行われていた。森を切り開き、直径45メートルの着陸帯と、周りを囲む幅15メートルの無障害物帯を造る工事である。着陸帯は深さ50センチまで掘り下げられ、砂利が敷き詰められる。それほど難しい工事ではないが、N1、H、G地区は森の中の現場まで工事用道路を造ら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ために大量の樹木が伐採され、貴重な動植物の生息地が破壊される。

ヘリパッドは米軍の最新の輸送機であるMV22オスプレイも使用する。重低音の爆音が音に敏感な鳥類の生息を脅かし、エンジンから吹き降ろす熱風によって植物にも深刻な影響を受けることが予想された。高江区住民も米軍機の爆音と墜落の危険に日々さらされることになる。

高江区は人口150人ほどの小さな集落である。地域住民を支える市民が県内外から集まり、森の中に入ろうとする作業員や運び込まれようとする資材を阻止する行動が連日とりくまれた。

2012年7月から2014年3月まではN4地区の二つのヘリパッド建設に反対する行動を取り組んだ。平均的な1日は午前6時に集合し、北部訓練場のメインゲートから入ろうとする作業員と資材を止めるものだった。道路を移動する工事車両を数キロ先からチェックし、無線機で連絡を取りながら車両を止め、説得活動を行う。ゲートから入れない作業員は森の中を通って現場に向かおうとする。それを追っかけて森の中でも攻防が続いた。

メインゲートでの阻止・監視活動は午前6時から夜の9時まで15時間続き、ゲートが閉まってからは車を止めて中で寝泊まりした。24時間の行動が連日続いた。現場に入るのが難しくなった作業員たちは、基地内に宿泊所を作って工事を進めた。必要な資材は別の工事を装って搬入してあったため、N4の2基のヘリパッドは予定を大幅に遅れたが2014年3月末までに完成した。

 

【全国から500人の機動隊を派遣して暴力的に工事を強行】

その後、N1、H、G地区のヘリパッド建設は、工事用ゲートの前を市民が車で封鎖したため、2年以上にわたって手を付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かし、2016年の7月に入って日本政府は、沖縄県警に加えて全国から500人の機動隊を沖縄に派遣し、大弾圧態勢を敷いて3地区のヘリパッド建設を強行した。

7月22日の早朝、N1地区の工事用ゲートをふさいでいた市民の車両に対し、800人ほどの警察官・機動隊員が襲いかかった。車の上で抵抗する市民は引きずり下ろされ、車両が撤去された。機動隊員の暴力によってけが人が続出した。人口150人ほどの集落はその数倍の機動隊員に取り囲まれた。周辺の道路は何重にも検問が行われ、厳戒態勢が敷かれた。

そういう中でも反対する市民は、創意工夫を凝らして阻止・抗議行動を展開した。道路を車で封鎖し、座り込んで工事車両を止めたり、資材を運ぶダンプカーの車列の前を徐行運転したり、道路上での行動は数十キロの範囲で行われた。砂利を積み込む採石場でも阻止行動が行われた。警察の弾圧が日増しに厳しくなり、逮捕者が何名も出たが、行動は最後まで貫かれた。

作業員や資材が入る工事用ゲートの前では、最後の阻止線として市民の座り込みが続いた。数百人規模で市民が座り込めば、機動隊も簡単には手が出せない。しかし、数が少なければ力尽くで排除され、抵抗する市民には暴力がふるわれる。ダンプカーが採石場から往復するたびに強制排除がくり返された。

 

【大阪府警の機動隊員による「土人」「シナ人」発言】

その過程で、大阪府警の機動隊員が抗議する市民に対し、「土人」「シナ人」と発言する事件が起こった。その様子を筆者がビデオ撮影してユーチューブに投稿し、メディアにも映像を提供したことで、全国的に大きなニュースとなった。

沖縄は1879年に日本に併合されるまで、琉球国という一つの国だった。薩摩藩に実権を握られていたとはいえ、19世紀半ばにはアメリカやフランス、オランダと修好条約を結ぶなど外交権を保持していた。しかし、日本に併合されてからは、政治、経済から言語や生活習慣にいたるまで日本への同化を強いられ、日本人からは一等劣った「琉球人」「沖縄人」として差別された。

私の祖父母は1920年代に大阪で働いており、父も大阪で生まれている。ヤマトゥに出稼ぎに出た多くの沖縄人が、差別と偏見にさらされて苦しんでいる。食堂に入ろうとすると「琉球人、朝鮮人お断り」という張り紙が張られていた、というのは私が子どもの頃に祖父母から聞いた話である。

高江で発せられた大阪府警の機動隊員による「土人」「シナ人」発言は、そのような歴史体験を思い出させるものだった。沖縄では大きな批判が起こり、県議会でも糾弾決議が上がった。日本政府もさすがに問題としないわけにはいかなくなり、警察庁のトップが謝罪する事態となった。発言した機動隊員二人も処分され、大阪に戻された。

この数年、ヤマトゥでは沖縄に対するヘイトスピーチが広がっている。特に米軍基地建設に反対している沖縄人に対し、金をもらってやっているだの、北朝鮮や中国の工作員とつながっているなどのデマが流布されている。その中心となっているのはネトウヨと呼ばれる民間の保守グループだ。

本来、警察はそれを取り締まる側にある。大阪府警の機動隊員による「土人」「シナ人」発言は、規制すべき公務員が勤務時間中に行ったものであり、極めて悪質だ。そこまで沖縄差別が広がっていることに慄然とする。

 

【森の中での阻止・抗議行動】

高江では道路や採石場での取り組みと並行して、ヘリパッド建設現場での阻止・抗議行動も取り組まれた。日本政府・沖縄防衛局は、北部訓練場内への進入は刑事特別法に違反するとし、逮捕をちらつかせた。そのような脅しにひるむことなく多くの市民が森に入り、何度も工事を止めた。

危機感を抱いた日本政府は、抗議行動のリーダーを逮捕することで運動つぶしを図ってきた。10月17日、沖縄平和運動センター議長の山城博治さんが逮捕された。資材置き場の周辺に張られた鉄線を1本切ったというだけで、器物損壊の罪を負わされたのだ。本来なら軽い取り調べを受けて解放される程度の案件だが、沖縄県警は山城さんを狙い撃ちし、暴行や威力業務妨害などで逮捕をくり返した。

山城さんは血液のガンを患って治療中の身であった。長期勾留は山城さんの健康悪化と運動の破壊を狙ったものであり、保釈請求がくり返されたが、沖縄県警は5カ月に及ぶ長期勾留を行った。2017年3月18日に釈放されたあと、山城さんは6月にスイス・ジュネーブの国連人権理事会で、自らに加えられた人権侵害について訴えている。

高江のヘリパッドは12月には本体部分がほぼ完成し、12月22日には北部訓練場約半分の返還式典が開かれた。その内実は、使っていない部分を返還する一方で、MV―22オスプレイの使用も可能な新しいヘリパッドを造り、訓練場をコンパクトにまとめて機能を強化するものでしかない。

2017年10月11日、東村高江区の牧草地に米海兵隊のCH―53E大型輸送ヘリコプターが不時着し、直後に炎上する事故が発生した。死傷者はなかったが、民家からは300メートルほどしか離れていない場所だった。新たなヘリパッドが建設されることで高江区と周辺での訓練が増え、爆音被害と事故の危険性が増す、という住民の不安は現実となっている。

高江のヘリパッド建設は、日本政府が沖縄の民意を踏みにじり、警察・機動隊の暴力によって強行された。北部訓練場で鍛えられた米兵たちは、ベトナムやアフガニスタン、イラクなど世界各地の戦場に派遣されて殺戮と破壊をくり返してきた。それを黙認することは、沖縄人が米軍の侵略戦争に間接的であれ加担することになる。それを拒否するためにも、北部訓練場の全面返還をめざす運動が再構築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辺野古新基地建設に反対する行動】

1997年12月21日、普天間基地の「移設」先として浮上した名護市辺野古の海上にヘリポートを建設することをめぐって名護市民投票が行われた。結果は建設反対が多数を占め、本来ならここで問題は解決するはずだった。しかし、当時の比嘉鉄也市長は民意を踏みにじり、政府に対し「移設」受け入れを表明して辞任した。基地関連の利権を目当てにした、この卑劣な行為によって名護市民は以後、20年以上に及ぶ対立と混乱に苦しめられることになった。

 2004年4月19日、日本政府は普天間基地の「移設」に向け、辺野古の沖合で海底ボーリング調査に着手した。市民は資材置き場に予定された漁港に座り込んで阻止行動を開始した。海上でもボーリング調査のために設置された単管やぐらに上り阻止行動を展開した。当時は警備にあたっていた海上保安庁が中立の立場を取ったため、市民の実力闘争によってボーリング調査は中止に追い込まれた。

その後、世界的な米軍再編が進められる中、普天間基地の「代替施設」案も紆余曲折があったが、2006年5月、辺野古岬の沿岸部にV字型2本の滑走路を持つ計画が、日本政府と名護市の間で合意された。辺野古側リーフ内と大浦湾の一部を埋め立て、港湾機能や装弾場など新たな機能を持つことも明らかとなった。単なる飛行場の「移設」ではなく新たな基地の建設だ、という批判が広がっていく。

沖縄では普天間基地の「県内移設」問題が起こって以降、反対する世論が常に7割を超えていた。すでに米軍基地が集中している沖縄の中で「移設」しても、政府がいう「負担軽減」にはならない、という不満が鬱積していた。そのため、辺野古「移設」を推進・容認する立場では選挙に勝てない状況となっていた。

2010年の県知事選挙で当選した仲井真弘多氏も、立候補の際には「県外移設」を主張し、「県内移設」については態度を曖昧にした。その本音は疑わしいものだった。実際、仲井真知事は2013年12月に腰痛の検査入院を理由に東京へ行き、日本政府と秘密裏に交渉を重ねて、辺野古「移設」に向けた埋め立ての承認に踏み切った。

 沖縄県内では猛反発が起こり、仲井真知事は支持を失ったが、日本政府は2014年7月1日に辺野古新基地建設に着手し、8月からは海底ボーリング調査を開始した。市民による阻止・抗議行動も即座に起こった。陸上ではキャンプ・シュワブのゲート前で座り込みが、海上では船とカヌーによる行動が始まった。

 

【オール沖縄という枠組みの誕生とその背景】

 そういう中、2014年11月16日に沖縄県知事選挙が行われた。日本政府が全面的に支援し、再選を目指す仲井真氏に対抗して、新基地建設に反対する側が立てたのは、元自民党沖縄県連幹事長で那覇市長の翁長雄志氏だった。

なぜ元自民党県連の幹部だった翁長氏が、新基地建設反対の立場で立候補したのか。そこには沖縄の政治・経済状況の大きな変化があった。

沖縄でも政治の保守化が進んでいる。2006年、2010年の県知事選挙では「革新のホープ」といわれた糸数慶子氏、伊波洋正氏が相ついで敗北した。社民党・共産党・沖縄社会大衆党を中心とした革新共闘という枠組みでは、日本政府が全面的に支援し、自民党・公明党が推す候補者に勝てないという構図が鮮明となった。

そこで新たに作り出されたのが「オール沖縄」という枠組みである。革新系の政党と自民党、経済界の一部が、辺野古新基地建設反対、MV―22オスプレイの沖縄配備撤回を一致点に共闘を組む方式である。そのために日米安保条約や自衛隊、辺野古新基地以外の米軍基地の県内移設、泡瀬干潟などの対立する課題は棚上げにされた。

それまで普天間基地の辺野古「移設」に賛成していた自民党や経済界の一部が反対に転換したのはなぜか。そこには2000年代に入り、返還された米軍基地の跡地利用がうまくいき、新たな商業地域が開発されることで、税収や土地の資産価値、雇用などが、米軍基地の頃よりも大幅に延びたことがある。米軍基地は新たな利潤を生みだす場ではなく、雇用も限定されている。米軍基地を返還させ、再開発した方が多くの利益を生み出し、沖縄のためになる、という認識が広がった。

もう一つの大きな理由は、2001年9月11日に米国で起こった同時多発攻撃である。ニューヨークの貿易センタービルや米国防総省本庁舎に乗っ取られた民間機が突っ込んだ事件に、沖縄の米軍基地も即座に反応した。基地のゲートやフェンス沿いに武装した米兵が立ち、沖縄の基地も攻撃を受け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緊張が県民にも広がった。

同事件に沖縄の主要産業である観光業は大きな打撃を受けた。修学旅行をはじめとした宿泊予約のキャンセルが相つぎ、その回復に長期間を要した。その経験から沖縄の観光業者の中で、観光は平和産業であり、戦争の不安がある所に観光客は来ない。軍事基地と観光は相容れない、という声が上がるようになった。

沖縄経済は基地・公共工事・観光を3本柱とする「3K経済」といわれてきた。その中で基地と公共工事の占める割合が低下する一方で、観光業は飛躍的に伸びている。日本国内だけでなく韓国や台湾、中国など東アジア諸国からの観光客も急増している。

米軍基地に依存する時代は終わった。これからは東アジアの平和的環境をつくり、その中で沖縄の経済的・政治的自立を図っていくことが重要だ。そういう認識を持つに至った自民党と経済界の一部が辺野古新基地建設反対に転換し、革新勢力と結びついて作り出されたのが「オール沖縄」である。

それは2014年11月の県知事選挙で大成功した。仲井真氏は前年の埋め立て承認で県民の信頼を失っており、新人の翁長氏が10万票以上の大差をつけて圧勝した。

さらに「オール沖縄」勢力は、同年12月14日に行われた衆議院選挙でも4選挙区すべてで勝利し、沖縄の民意が辺野古新基地建設反対であることをはっきり示した。

だが、日本政府はそれを完全に無視した。安倍晋三首相は当選した翁長新知事と面会することすら拒み、工事を強行し続けた。2016年3月から12月にかけて、埋め立て承認をめぐる国と県の裁判で一時的に工事が止まったが、その間に高江のヘリパッド建設が進められた。

そして、高江の工事がほとんど終わった12月に、最高裁の判決で沖縄県の敗訴が決まり、翁長知事は埋め立て承認の取り消しを撤回して工事が再開された。

 

【強行される辺野古新基地建設と反対運動】

日本政府・沖縄防衛局は当初、大浦湾側から埋め立てを始めるため護岸工事を着手した。しかし、途中から計画を変更し、大浦湾側の護岸工事を中断して、辺野古側のリーフ内で別の護岸工事を始めた。

大浦湾は水深が深く、活断層の存在も指摘されている。難工事が予想され、工事の進行が遅れることが予想された。それに対し辺野古側のリーフ内は満潮時でも水深4~5メートルしかなく、護岸工事が予定されている場所は干潮時に1メートル以下になる場所もある。

日本政府・沖縄防衛局は浅瀬の方から護岸工事を進め、埋め立てに向けて工事が進行していることを県民に印象付けようとした。もう後戻りできない所まで工事は進んでいる、と県民に思い込ませ、どんなに頑張っても国には勝てない、という諦めと無力感を生み出すのが狙いだ。

工事を進めるために日本政府は強権的姿勢を剥き出しにしている。沖縄県が出していた岩礁破砕許可の期限が2017年3月末に切れ、県は政府に工事を止めるよう指示した。だが、政府はそれを無視して工事を続けている。さらに、名護市の漁業協同組合に多額の補償金を払って漁業権を放棄させた。

埋め立て海域に生息する稀少サンゴに関しては、調査結果の県への報告を遅らせ、14群体のうち13群体を死滅させたうえで、残り1群体の移植を求めた。サンゴの移植は大半が失敗していると専門家は指摘している。しかし、政府は県が移植を許可しなければ、石材を投下してサンゴを破壊し、責任を県に転嫁しようとしている。

行政権限を駆使して工事を止めようとする翁長知事に対し、日本政府は先手を打って、知事の権限を封じ込めようとしている。ゲート前や海上での阻止・抗議行動に対しては、警察・機動隊と海上保安庁という暴力装置を使い弾圧をかけている。けが人や逮捕者が多数出るなかで、それでも県内外から多くの市民が集まって闘いを継続している。

だが、長期間の取り組みと工事の進行により、市民の間に疲労感や諦めがじわじわと広がっているのも事実だ。ゲート前でも海でも阻止・抗議行動への参加者が減っている。運動を立て直し、参加者を増やしていくことが課題となっている。

現在、日本政府・沖縄防衛局は、6月末までに辺野古側の海域を護岸で囲い込み、内側に土砂を投入しようとしている。本格的な埋め立てが始まったと大々的に宣伝し、11月に行われる県知事選挙で有利な状況を作ろうとしている。それはすでに効果を発揮している。

2月4日に名護市長選挙が行われ、これまで2期8年間、辺野古新基地建設に反対してきた現職の稲嶺進氏が敗北した。新人候補者は、辺野古新基地問題にはいっさい触れず、争点回避を行ったうえで、国と協力して予算を取り、市を活性化させると主張して当選した。

名護市は人口61000人ほどの小都市である。そこに政府の閣僚や国政与党の大物議員が乗り込み、選挙期間中に名護市に来た国会議員は100人を超した。それらの議員は企業や業界団体を回って票を集めた。地方の小都市の首長選挙に政府がここまで介入するのは、名護市以外ではあり得ない。辺野古新基地建設を進めるために、政府は地方自治を踏みにじったのだ。

名護市長選挙の結果は、護岸工事の進行が市民の中にあきらめ感を生み出している現実を示した。この流れは11月の県知事選挙までにさらに強まる可能性が高い。辺野古新基地建設は深場の大浦湾が難工事であり、そう簡単に完成するものではない。しかし、政府の狙い通りに名護市長選挙に続き県知事選挙でも敗北すれば、反対運動は大きな打撃を受ける。

沖縄県民が対峙しているのは、日本と米国という2つの巨大な国家だ。辺野古の闘いの困難さは言うまでもない。しかし、だからといって膝を屈するわけにはいかない。米軍や自衛隊の強化をこのまま許していけば、その先に待っているのは沖縄の破局である。東アジアで沖縄を巻き込んだ軍事紛争が生じれば、観光を中心とした沖縄経済は吹き飛んでしまう。

沖縄が再び戦争の被害者にも加害者にもならないために、米軍と自衛隊の基地強化に反対し、闘い続けるしかない。 

오키나와의 자립과 독립을 향한 저항 운동

 

 

 

메도루마 슌

 

시작하며

1945년 3월 하순, 미군이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일본군에 본격적으로 공격을 가하며 상륙작전이 시작됐다. 이후 3개월 동안 오키나와 각 섬에서는 주민이 휩쓸린 지상전이 전개됐다. 미일 군인과 일반 주민을 합쳐 전사자는 20만 명에 이르며, 오키나와 현민 중에서는 4명 중 1명(약 12만 명)이 희생됐다.

오키나와 주민이 사상을 당한 것은 오로지 미군의 공격에 의해서만은 아니었다. 일본군 중에서는 오키나와인에게 편견과 차별 의식을 갖고 스파이 혐의를 씌워서 주민을 학살한 병사도 있었다. 일본군이 주민의 식량을 강탈하고 참호에서 쫒아내는 일도 연이어 일어났다. 참호 밖으로 쫓겨난 주민은 미군의 포격에 그대로 노출됐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포로가 되지 말고 자결하라는 방침을 세웠다. 그것이 주민에게도 강제돼 옥쇄(玉碎)라는 이름의 집단사가 일어났다.

오키나와에서는 지금도 “군대는 주민을 지켜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나눠지고 있다. 이는 오키나와전(沖縄戦) 당시 일본군이 주민에게 가했던 부당한 처사로부터 비롯된 교훈이다. 오키나와전의 경험을 거친 오키나와인은 전쟁이나 군대를 강하게 부정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후의 정치 상황은 오키나와인의 소망을 짓밟는 형태로 진행됐다. 미군 점령 하에 놓인 오키나와는 전후 27년에 걸쳐서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미군 통치를 계속 받았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는 “태평양의 요석”으로 오키나와를 위치시키고, 미군의 전략 거점으로써 미군 기지를 강화해 나갔다. 쇼와 천황(昭和天皇) 히로히토도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바랐다(이른바 ‘천황메시지’가 이를 증명한다).

1950년대 야마토(일본) 각지에서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활발해지자 미국 정부는 자신들의 통치하에 있는 오키나와로 미군기지를 이전시켰다. 그로 인해 야마토의 미군기지는 감소했지만 오키나와에서는 그 반대로 늘어났다. 패전으로부터 73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일본 전체 미군 전용시설의 70% 이상이 오키나와에 집중돼 있다.

미군기지가 집중돼 있어서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에 의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살인, 강간 등의 흉악 범죄를 시작으로 미군기 추락과 차량 사고 등이 일어나 많은 오키나와인이 전후에도 희생됐다. 오키나와인은 미군기지 철수를 요구하는 운동을 계속해, 집회나 데모만이 아니라 미군 시설 건설이나 연습을 실력으로 저지하는 행동을 활발히 펼쳐왔다.

하지만 미일 양국 정부는 오키나와의 호소를 무시하고 미일안전보장조약에 입각해 미군기지 부담을 오키나와에 계속해서 집중시켜 왔다. 미군기지가 근처에 없어서 야마토의 대다수 주민들은 기지 문제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 일본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는 오키나와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그러한 의식이 굳어지면 미일안보체제가 안정될 것이라고 일본 정부는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이에 대항해 오키나와에서는 미군기지가 오키나와에 집중된 현상을 ‘구조적 차별’이라고 비판해 왔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기지부담 경감”에 대해 언급은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다. 중국이나 북조선의 군사적 위협을 선전해서 주민의 공포심을 부추겨서 새로운 미군기지 건설과 자위대의 배치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오키나와의 역사와 현장에 입각해 최근 몇 년 동안 필자가 몰두해온 헬리패드helipad 건설 반대 운동(히가시손 다카에高江)과 헤노코 신기지 건설 반대 운동에 대해 보고하고자 한다.

 

미군 세 명에 의한 강간 사건과 SACO합의

1995년 9월 4일 오후 8시 경, 오키나와 북부의 어느 마을에서 무언가를 사러나갔던 12살 여학생이 미군 병사 세 명에 의해 차로 납치돼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큰 부상을 입은 피해자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오키나와 경찰의 조사에 의해 범인이 미군 병사들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일단 기지 안으로 도망친 미군 병사를 오키나와 경찰이 바로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이 사건의 충격이 오키나와 전토를 뒤흔들었다. 오키나와전으로부터 50년이 경과됐음에도 불구하고 미군 기지가 집중돼 있고 미군에 의한 흉악 범죄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오키나와 현민의 분노가 비등했다. 10월 21일에 열린 현민 대회에는 오키나와 전체에서 8만 5천 명이 참가(주최 측 추산)해 일본복귀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로 기록됐다.

오키나와의 상황을 인식한 미일 양국 정부는 강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를 유지하는 것이 불안정하며 미일안보체제 또한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게 된다. 그렇게 의식한 미일 양국 정부는 오키나와 현민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오키나와에 관한 특별행동위원회(통칭 SACO)를 만들어서 오키나와의 ‘기지 부담 경감’안을 내세웠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이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해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지”로 불리는 미 해병대 후텐마 비행장의 반환이었다.

하지만 반환은 명목뿐으로 실제로는 오키나와현의 다른 장소로 기지를 ‘이설’하는 안이었다. 게다가 후텐마 기지에는 없는 새로운 기능(항만시설이나 장탄장装弾場)이 추가돼 노후화된 기지 대신에 최신의 기지를 만들려는 미일 양국 정부의 의도가 뻔히 들여다 보였다.

SACO 안에서 내세운 합의 중에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가운데 최대 면적을 지닌 북부 훈령장의 과반을 반환하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오키나와 북부에는 얀바루라 불리는 아열대숲이 펼쳐져 있다. 오키나와딱따구리, 얀바루 흰눈썹뜸부기, 얀바루 앞장다리풍뎅이 등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이 지역에만 사는 생물이 다수 생식하고 있는 “동양의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풍요로운 생태계가 펼쳐져 있다.

이 숲을 이용해서 미군은 북부 훈련장(정글 트레이닝 센터)를 만들어 베트남전쟁 무렵부터 게릴라전이나 서바이벌 훈련을 해왔다. 병사의 행동은 헬기와 연동돼 이뤄져서 숲 여기저기에 헬리패드가 만들어져서 이착륙 훈련도 빈번히 이뤄지고 있다.

SACO 합의로는 북부 훈련장의 약 반을 반환하는 대신에 새로 6기의 헬리패드를 건설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그 6기는 히가시손 다카에 지구의 집락을 둘러싸듯이 건설돼 이 지역에서는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다카에 헬리패드 반대 운동

SACO 합의로는 북부 훈련장의 반을 반환하는 대신에 새로 6기의 헬리패드를 건설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하지만 새로 건설될 헬리패드 6기는 히가시손 다카에 지구 집락을 둘러싸듯이 건설될 예정이어서 반대 운동이 지역에서 일어났다.

헬리패드는 다카에 N1지구에 2기, N4 지구에 2기, H지구에 1기, G지구에 1기 이렇게 총 6기가 건설될 예정이라 한다. 다카에구 주민을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펼쳐져 왔는데, 내가 다카에로 가서 반대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 1월 무렵부터다.

당시 N4지구와 N1 지구에서 헬리패드 건설이 착수돼 나무가 벌채되고 자재의 반입이 이뤄지고 있었다. 숲을 베어 직경 45미터 착륙 구역과 주위를 둘러싼 폭 15미터의 장해물이 없는 구역을 만드는 공사다. 착륙 구역은 깊이 50센티로 땅을 파내고 자갈을 채워넣는다. 그렇게 어려운 공사는 아니지만 N1, H, G지구는 숲속의 현장까지 공사용 도로를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서 대량의 수목이 벌채돼 귀중한 동식물의 생식지가 파괴되고 있다.

미군의 최신 수송기인 MV22오스프리도 헬리패드를 이용한다. 중저음 폭음이 소리에 민감한 조류의 생식을 위협하고 엔진으로부터 뿜어져 내려오는 열풍으로 식물에도 심각한 영향이 미칠 것으로 예상됐다. 다카에구 주민도 미군기의 폭음과 추락 위험에 일상이 노출돼 있다.

다카에구는 인구 150명 정도의 작은 집락이다. 지역 주민을 지원하는 시민들이 현 내외로부터 모여서 작업원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운송 자재를 저지하는 투쟁이 연일 계속돼 왔다.

2012년 7월부터 2014년 3월까지는 N4지구 두 곳에서 이뤄지는 헬리패드 건설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여왔다. 보통 오전 6시에 집합해 북부 훈련장 메인 게이트로 들어가려는 작업원과 자재를 막았다. 도로로 이동하는 공사 차량을 몇 킬로 앞에서 확인하고 무전기로 연락을 취해 차량을 멈춰 세우고 설득을 시도했다. 게이트로 들어가지 못 한 작업원은 숲을 통과해서 현장으로 가려 한다. 그들을 쫓아서 숲속에서도 공방이 계속됐다.

메인게이트에서 벌어진 저지 및 감시 활동은 오전 6시부터 밤 9시까지 15시간 동안 이어져서 게이트가 닫힌 후에 차를 세우고 그 안에서 잠을 청한다. 24시간 행동이 며칠이고 이어진다. 현장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워진 작업원들은 기지 안에 숙박소를 만들어 공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필요한 자재를 다른 공사로 위장해서 반입하거나 해서 N4에 헬리패드가 완성됐다. 예정보다 크게 늦은 2014년 3월의 일이다.

 

 

전국에서 500명의 기동대를 파견해서 폭력적으로 공사를 강행하다

공사용 게이트 앞을 시민이 차로 봉쇄한 결과 그 후 N1, H, G지구의 헬리패드 건설은 2년 이상 진행되지 못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2016년 7월 들어서 오키나와현 경찰에 더해 전국에서 500명의 기동대를 오키나와에 파견해 대 탄압 태세로 전환하고 헬리패드 건설을 세 지구에서 강행했다.

7월 22일 이른 아침, N1지구의 공사용 게이트를 막은 시민의 차량을 800명 정도의 경찰관과 기동대원이 습격했다. 차 위에서 저항하는 시민을 끌어 내리고 차량을 철거했다. 기동대원의 폭력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인구 150명 정도의 집락을 그보다 몇 배는 많은 기동대원이 둘러쌌다. 주변 도로에서는 몇 겹의 검문이 이뤄졌고 계엄 태세에 돌입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저항하는 시민은 독창적인 방안을 짜내서 저지/항의 행동을 전개했다. 도로를 차로 봉쇄하고, 농성하며 공사 차량을 막거나, 자재를 나르는 덤프트럭 앞을 차로 서행해 운전하는 등의 도로 위 행동은 수십 킬로 범위에 이르렀다. 자갈을 싣는 채석장에서도 저지 행동이 이어졌다. 경찰 탄압이 나날이 엄중해 지고 체포자가 계속 나왔지만 저항은 끝까지 이어졌다.

작업원이나 자재가 출입하는 공사용 게이트 앞에서는 최후의 저지선으로 시민의 농성이 계속됐다. 수백 명 규모로 시민이 농성을 하면 기동대원도 간단히 손을 댈 수 없다. 하지만 수가 적으면 힘에 밀려서 저항하는 시민에게 폭력이 쏟아진다. 덤프트럭이 채석장을 왕복할 때마다 강제적으로 시민을 탄압하는 행위가 반복됐다.

 

오사카 경찰 기동대원에 의한 ‘토인’ 및 ‘지나인’ 발언

그 과정에서 오사카 경찰의 기동대원이 항의하는 시민을 향해 ‘토인’, ‘지나인’이라고 발언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 모습을 필자가 비디오로 촬영해서 유튜브에 올리고 미디어에도 영상을 제공해 전국적인 뉴스가 됐다.

오키나와는 1879년 이론에 병합되기 전까지 류큐국(琉球国)이라는 하나의 나라였다. 사쓰마번(薩摩藩)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고는 해도 19세기 중반에는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와 수호조약을 맺는 등 외교권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 병합된 후부터는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언어, 생활습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동화될 것을 강요받고 일본인으로부터는 열등한 ‘류큐인’ ‘오키나와인’으로 불리며 차별을 당했다.

내 조부모는 1920년대 오사카에서 일했고 아버지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야마토로 돈을 벌러 간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차별과 편견에 노출돼 괴로워했다. 식당에 들어가려 하면 “류큐인, 조선인 사절”이라는 종이가 붙어있었다고 어릴 적 조부모로부터 들었다.

오사카부 경찰 기동대원이 다카에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을 ‘토인’ ‘지나인’이라 부른 것은 그러한 역사적 체험을 상기시킨다. 오키나와에서 강한 비판 여론이 일어나고 현의회에서도 규탄 결의가 이뤄졌다. 과연 일본 정부도 어물쩍 넘어갈 수 없게 돼 경찰철 수뇌가 사죄하는 사태로 번졌다. 그런 발언을 한 기동대원 두 명도 처분을 받고 오사카로 되돌아갔다.

최근 몇 년 동안 야마토에서는 오키나와를 향한 헤이트스피치가 더욱 폭 넓게 퍼져나가고 있다. 특히 미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오키나와인에 다해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거나, 북조선이나 중국의 공작원과 연결돼 있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있다. 그 중심은 넷우익이라 불리는 민간의 보수 그룹이다.

엄밀히 말하면 경찰은 그런 자들을 단속하는 측에 있다. 오사카부 경찰 기동대원에 의한 ‘토인’ ‘지아인’ 발언은 규제해야 하는 측에 서 있는 공무원이 근무 시간 중에 행한 것으로 지극히 악질적인 행위다. 그렇게 널리 오키나와 차별이 퍼져 있다는 사실에 섬뜩함을 느낀다.

 

숲 속에서의 저지 항의 행동

도로나 채석장에서의 대처와 병행해서 헬리포드 건설 현장에서의 저지, 항의 행동이 다카에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일본 정부, 오키나와 방위국은 북부 훈련장 안으로 시위대가 진입하면 형사특별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면서 항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체포될 수 있음을 내비쳤다. 그런 위협에 기죽지 않고서 많은 시민들이 숲으로 들어가 몇 번이고 공사를 중지시켰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 정부는 항의 행동 리더를 체포해서 운동을 분쇄하려 했다. 2016년 10월 17일, 오키나와 평화운동센터의 야마시로 히로지(山城博治) 의장이 체포됐다. 재료를 두는 곳 주변에 뻗어 있는 철선 하나를 잘랐다는 이유만으로 기물파손죄로 기소됐다. 통상적으로는 가벼운 조사를 받고서 풀려날 정도의 일인데 오키나와 경찰은 야마시로 씨를 노리고서 폭행과 위력업무방해죄의 명목으로 체포를 거듭했다.

야마시로 씨는 혈액암을 앓고 치료 중이었다. 장기 구류는 야마시로 씨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운동의 파괴를 노린 것이었다. 보석 청구를 거듭했음에도 오키나와현 경찰은 5개월 동안 야마시로 씨의 장기 구류를 강행했다. 야마시로 씨는 2017년 3월 18일에 석방된 후 6월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UN인권이사회에서 자신에게 가해진 인권 침해에 대해 호소했다.

다카에 헬리패드는 12월에 본체 부분이 거의 완성돼 12월 22일에는 북부 훈련장의 약 반을 반환하는 식전이 열렸다. 하지만 실상은 사용하지 않는 훈련장을 반환하는 대신에 오스프리를 쓸 수 있는 새로운 헬리패드를 짓고 훈련장을 간결하게 정리해 기능을 강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2017년 10월 11일 히가시손 다카에구의 목초지에 미해병대의 CH 53E 대형수송 헬기가 불시착한 직후에 불타오르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상자는 없었지만 민가로부터 300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장소였다. 새로운 헬리패드가 건설돼 다카에구와 주변에서의 군사 훈련이 빈번해지면 폭음 피해와 사고의 위험성이 증가하리라던 주민의 불안감은 현실이 됐다.

다카에에서의 헬리패드 건설은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의 민의를 짓밟고 경찰 기동대의 폭력을 써서 강행한 것이다. 북부 훈련장에서 단련된 미군 병사들은 베트남이나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등 세계 각지의 전쟁터로 파견돼 살육과 파괴를 반복해 왔다. 그것을 묵인하면 오키나와인이 미군의 침략전쟁에 간접적으로 가담하는 것이 된다. 이를 거부하기 위해서라도 북부 훈련장의 전면 반환을 목표로 한 운동을 재구축해야만 한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저항

1997년 12월 21일, 후텐마기지의 ‘이설’처로 부상한 나고시 헤노코 해상에 헬리패드를 건설하는 안을 두고 나고 시민들의 투표가 진행됐다. 결과는 건설 반대가 다수를 점해서 원래대로라면 이 문제는 깨끗이 해결됐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히가 데쓰야(比嘉鉄也) 시장은 민의를 짓밟고서 ‘이설’을 받아들이겠다고 정부를 향해 표명한 후 사직해 버렸다. 기지 관련 이권을 중심으로 한 이 비열한 행위로 인해 나고 시민은 이후 20년 이상 대립과 혼란 속에서 괴로움을 겪어왔다.

2004년 4월 19일, 일본 정부는 후텐마 기지 ‘이설’을 향해서 헤노코 앞바다에서 해저 지질조사 시공(boring) 조사에 착수했다. 시민들은 자재 보관장으로 예정된 어항(漁港)에서 농성하며 저지 행동을 개시했다. 해상에서도 지질조사 시공 조사를 위해 설치된 철골 구조물 위에 올라가서 저지 행동을 개시했다. 당시는 경비를 하고 있던 해상보안청이 중립적인 자세를 취해서 시민의 실력 투쟁에 의해 시공 조사는 중지됐다.

그 후 세계적으로 미군 재편이 이뤄지는 가운데 후텐마기지의 ‘대체 시설’ 방안도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2006년 5월, 헤노코 곶 연안부에 V자형 활주로 두 개를 만들려는 계획이 일본 정부와 나고시 사이에서 합의됐다. 헤노코 측 사주(砂洲) 안과 오우라만(大浦湾) 일부를 메워서 항만 기능이나 장탄장 등의 새로운 기능을 만드는 것도 드러났다. 단지 비행장 ‘이설’이 아니라 새로운 기지 건설이라는 비판이 퍼져 갔다.

오키나와에서는 후텐마 기지의 ‘현내 이설’ 문제가 일어난 이후 반대 여론이 항상 7할을 넘고 있다. 이미 미군 기지가 집중돼 있는 오키나와 안에서 ‘이설’을 하더라도 정부가 말하는 ‘부담 경감’과는 거리가 멀다는 불만이 가득 쌓여 있다. 그래서 헤노코 ‘이설’을 추진 및 용인하는 측에 서면 선거에서 이길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2010년 현지사 선거에서 당선된 나카이마 히로카즈(仲井真弘多) 씨도 입후보 당시에는 ‘현외 이설’을 주장하고 ‘현내 이설’안에 대해서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 속마음은 의심스러웠다. 실제 나카이 지사는 2013년 12월에 요통 검사로 입원한다는 이유로 도쿄로 가서 일본 정부와 비밀리에 교섭을 거듭해 헤노코 ‘이설’을 위한 매립 작업을 독단으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오키나와현에서는 맹렬한 반발이 일어났고 나카이 지사는 지지를 잃었지만 일본 정부는 2014년 7월 1일에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착수해서 8월부터는 해저 지질 조사 작업을 개시했다. 시민에 의한 저항이 즉시 일어났다. 육지에서는 캠프슈와브(Camp Schwab) 게이트 앞에서 농성이 벌어졌고, 해상에서는 배와 카누를 이용한 저항이 시작됐다.

 

 올 오키나와라는 틀의 탄생과 그 배경

그런 가운데 2014년 11월 16일에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가 이뤄졌다. 일본 정부가 전면적으로 지원하는 가운데 재선을 노리는 나카이마 씨에 대항해 신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측이 세운 후보가 바로 구 자민당 오키나와현 간사장이며 나하 시장인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씨다. 어째서 구 자민당 현연연합(縣聯聯合) 간부였던 오나가 씨가 신기지 건설을 반대하며 입후보를 하게 된 것일까? 그 기저에는 오키나와의 정치, 경제 상황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오키나와에서도 정치의 보수화가 진행돼 왔다. 2006년, 2010년 현지사 선거에서는 ‘혁신의 희망’이라 불리던 이토카즈 게이코(糸数慶子) 씨, 이하 히로마사(伊波洋正) 씨가 연이어 패배했다. 사민당, 공산당, 오키나와사회대중당을 중심으로 한 혁신 공동투쟁이라는 틀로는 일본 정부가 전면적으로 지원하며 자민당과 공민당이 미는 후보를 더 이상 이기기 힘들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거기서 창출된 것이 ‘올 오키나와(All Okinawa)’다. 이는 혁신계 정당과 자민당, 경제계 일부가 헤노코 신기지 건설반대, 오스프리 오키나와 배치 철회를 공통분모로 해서 공동 투쟁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미일안보조약이나 자위대, 헤노코 신기지 이외의 미군기지 현내 이설, 아와세(泡瀬) 간석지 등 대립되는 과제는 보류됐다.

지금까지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 ‘이설’에 찬성하던 자민당이나 경제계 일부가 반대로 돌아선 이유는 무엇일까? 2000년대에 들어서 반환된 미군기지 부지를 잘 이용해 새로운 상업 지구가 개발돼서 세수와 토지의 자산 가치, 고용 등이 전보다 훨씬 큰 폭으로 늘어났다. 미군기지는 새로운 이윤을 창출하는 시설이 아니며 고용도 한정돼 있다. 미군 기지를 반환하게 하고 재개발하는 편이 많은 이익을 창출하고 오키나와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레 퍼져나갔다.

또 하나의 큰 이유는 2001년 9월 11일에 미국에서 일어난 동시다발 공격이다. 뉴욕 무역센터빌딩이나 펜타곤에 납치된 민간기가 돌진한 사건에 오키나와 미군기지도 즉시 반응했다. 기지 게이트나 철조망을 따라 무장한 미군 병사가 서 있어서 오키나와 기지도 공격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긴장감이 현민에게도 퍼졌다.

이 사건은 오키나와의 주요 산업인 관광사업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수학여행을 시작으로 숙박 예약이 연이어 취소돼 피해를 회복하는데 긴 시간이 걸렸다. 그 경험을 통해 오키나와 관광업자들은 관광이 평화산업이며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불안한 곳에 관광객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군사기지와 관광은 서로 맞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키나와 경제는 기지, 공공공사, 관광을 세 축으로 하는 ‘3K 경제’로 불려왔다. 그 중에서 기지와 공공공사가 점하는 비중이 저하되는 한편, 관광사업은 최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일본 국내만이 아니라 한국, 타이완,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미군기지에 의존하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동아시아의 평화적 환경을 구축하고 그 가운데 오키나와의 경제적, 정치적 자립을 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인식을 갖게 된 자민당과 경제계 일부가 헤노코 신기지 건설반대로 돌아서서 혁신세력과 손을 잡고 만들어낸 것이 ‘올 오키나와’이다.

이는 2014년 11월 현지사 선거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나카이마 씨는 전년도에 매립을 승인한 후 현민의 신뢰를 상실한 결과 정치 신인인 오나가 씨가 10만 표 이상의 차로 압승을 거뒀다.

더욱이 ‘올 오키나와’ 세력은 같은 해 12월 14월에 이뤄진 중의원 선거 때도 4선거구 모두에서 승리해 오키나와의 민의가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것임을 명확히 드러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것을 완전히 무시했다. 아베 신죠 수상은 당선된 오나가 지사와 면회를 하는 것조차 거부한 채 공사를 계속 강행하고 있다. 2016년 3월부터 12월에 걸쳐서 매립 승인을 둘러싸고 국가와 현 사이에 벌어진 재판으로 공사가 일시적으로 중지됐지만 그 사이에 다카에 헬리패드 건설이 진행됐다.

또한 다카에 공사가 거의 끝난 12월에 대법원 판결로 오키나와현의 패소가 결정돼 오나가 지사가 매립 취소를 철회해 공사가 다시 시작됐다.

 

강행되고 있는 헤노코 신기지 건설과 이에 항거하는 반대운동

일본 정부와 오키나와 방위국은 당초 오우라만 쪽에서부터 매립을 시작하기 위해 호안 공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도중에 계획을 변경해서 오우라만 측의 호안 공사를 중단하고 헤노코 측의 사주(砂洲) 안에서 별도의 호안공사를 개시했다.

오우라만은 수심이 깊고 활단층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난공사가 예상돼 공사 진행이 늦어질 것이라 예상됐다. 그에 비해 헤노코 쪽 사주 안은 만조 때에도 수심이 4~5미터 밖에 되지 않고 호안 공사가 예정된 장소는 간조 때는 수심이 1미터 이하인 곳도 있다.

일본 정부, 오키나와 방위국은 얕은 여울에서부터 호안 공사를 개시해 매립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음을 현민의 뇌리에 각인시키려 하고 있다. 이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각인시켜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국가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체념과 무력감을 심으려는 것이 목적이다.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일본정부는 강권적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오키나와현이 제출한 암초파쇄 허가 기한이 2017년 3월말로 끝나자, 현은 정부에 공사를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것을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더구나 나고시의 어업협동조합에 고액의 보상금을 지불해서 어업권을 포기하도록 했다.

매립 해역에 생식하는 희소 산호초에 관해서는 조사 결과를 오키나와현에 통고하는 시기를 늦춰서 14군체(群体) 중에서 13군체를 사멸시킨 것도 모자라서 나머지 1군체의 이식을 요구했다. 산호 이식은 대부분 실패한다고 전문가는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현이 이식을 허가하지 않으면 석재를 투하해서 산호를 파괴하고 책임을 현에 전가하려 하고 있다.

행정권한을 구사해서 공사를 막으려 하는 오나가 지사에 맞서 일본 정부는 지사의 권한을 봉하는 선수를 치고 있다. 게이트 앞이나 해상에서의 저지/항의 투쟁에 대해서는 경찰, 기동대, 그리고 해상보안청이라는 권력 장치를 써서 탄압을 가하고 있다. 부상자나 체포자가 다수 속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현 안팎에 많은 시민이 모여 들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린 싸움과 공사 진행으로 인해 시민 사이에는 피로감과 체념이 서서히 퍼져가고 있음도 사실이다. 게이트 앞에서도 바다에서도 저지, 항의 행동에 나서는 참가자 수가 줄어 들곤 있다. 운동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참가자를 늘리는 것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일본 정부, 오키나와 방위국은 6월말까지 헤노코 측 해역을 호안에서 둘러싸 가두고 안쪽에 토사를 채우려 하고 있다. 본격적인 매립이 시작됐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해 11월에 있을 현지사 선거에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이는 이미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2월 4일에 나고시장 선거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2선(8년) 동안 헤노코 신기지 건설에 반대해 왔던 이나미네 스스무(稲嶺進) 씨가 패배했다. 선거에 나온 새로운 후보는 헤노코 신기지 문제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쟁점을 회피한 채 일본 정부와 협력해서 예산을 편성하고 시를 활성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해서 당선됐다.

나고시는 6만 천 명 정도의 인구밖에 없는 소도시다. 그런 곳에 정부의 각료나 국정 여당의 거물 의원이 찾아왔다. 선거 기간 중에 나고시에 온 국회의원은 100명을 넘어선다. 이들 의원은 기업과 산업계 단체를 돌며 표를 모았다. 지방 소도시의 수장 선거에 정부가 이렇게까지 개입한 것은 나고시 외에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는 지방자치를 짓밟고 있다.

나고시장 선거 결과는 호안 공사가 진행된 후 시민들 사이에서 포기하는 마음이 생긴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흐름은 11월에 있을 현지사 선거에서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은 수심이 깊은 오우라만이 난공사 지역으로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노리는 대로 나고시장 선거에 이어서 현지사 선거에서도 패배한다면 반대운동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임이 분명하다.

오키나와 현민이 대립하고 있는 상대는 일본과 미국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국가다. 헤노코에서의 싸움이 곤란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 미군과 자위대가 강화되는 것을 그대로 허용한다면 눈앞에 놓인 현실은 오키나와의 파국뿐이다. 동아시아에서 오키나와가 휘말린 군사 분쟁이 벌어진다면 관광을 중심으로 한 오키나와 경제는 날아가고 말 것이다.

오키나와가 다시 전쟁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되지 않기 위해서는 미군과 자위대의 기지 강화에 반대해 지치지 말고 계속 싸우는 방법 외에는 없다.

 

곽형덕 옮김

【はじめに】

 1945年3月下旬、米軍は沖縄の日本軍に本格的な攻撃を加え、上陸作戦を開始した。以後、3カ月以上にわたり、沖縄の各島では住民を巻き込んだ地上戦が展開された。日米両軍の兵士と一般住民の死者は20万余に及び、沖縄県民の4人に1人(約12万人)が犠牲になったと言われる。

 沖縄住民の死傷は米軍の攻撃によるものだけではなかった。日本軍は沖縄人に偏見と差別を抱き、スパイの疑いをかけて住民を虐殺する兵士もいた。日本軍による住民の食料強奪、壕追い出しも相次いだ。壕を追い出された住民は米軍の砲撃にさらされた。当時の日本軍は、米軍の捕虜にならずに自決しろ、という方針だった。それが住民にも強制されて玉砕という名の集団死を引き起こした。

 沖縄では現在も、「軍隊は住民を守らない」という言葉がふつうに言われる。それは沖縄戦における日本軍の住民に対する仕打ちから導き出された教訓である。沖縄戦の経験を経て沖縄人は、戦争や軍隊に対する強い否定感と平和志向を持つようになった。

 しかし、第2次世界大戦後の政治状況は、沖縄人の願いを踏みにじる形で進んだ。米軍の占領下におかれた沖縄は、戦後27年間にわたって日本から切り離され、米軍統治が続けられた。米国は東アジアにおける共産主義の拡大を阻止する「太平洋の要石」と沖縄を位置づけ、米軍の戦略拠点として基地を強化した。昭和天皇ヒロヒトもみずからの地位を守るためそれを望んだ(天皇メッセージ)。

 1950年代にヤマトゥ(日本)の各地で米軍基地への反対運動が活発になると、米国政府はみずからの統治下にある沖縄に米軍基地を移転した。それによってヤマトゥでは米軍基地が減少していったが、沖縄では逆に増加していった。敗戦から73年を経ようとする今日でも、日本全体の米軍専用施設の70%以上が沖縄に集中している。

 米軍基地の集中は米軍による事件、事故の多発を生む。殺人、強姦などの凶悪事件をはじめ、米軍機の墜落や車両事故などによって、戦後も多くの沖縄人が犠牲になってきた。沖縄人は米軍基地撤去を求める運動を続け、集会やデモだけでなく、米軍の施設建設や演習を実力で阻止する行動も取り組まれてきた。

しかし、日米両政府は沖縄の訴えを無視して、日米安全保障条約に基づく米軍基地の負担を沖縄に集中させ続けている。米軍基地が身近にないヤマトゥの大多数の住民は基地問題に対する関心が薄い。日本全体の安全のためには沖縄の犠牲はやむを得ない。そのような意識を作り出すことによって日米安保体制

が安定すると日本政府は考えているのだ。

それに対し沖縄では、沖縄への基地集中は「構造的差別」であるという批判がなされてきた。日本政府は「沖縄の基地負担軽減」を口にはするが、実際には真逆のことをやっている。中国や北朝鮮の軍事的脅威を宣伝して、市民の恐怖心を煽りつつ、新たな米軍基地の建設と自衛隊の配備拡大を進めている。

このような沖縄の歴史と現状を踏まえつつ、この数年、筆者が沖縄で取り組んできた東村高江のヘリパッド建設反対の運動と、名護市辺野古の新基地建設反対の運動について報告したい。

 

【3人の米兵による強姦事件とSACO合意】

1995年9月4日の午後8時頃、沖縄島北部のある街で買い物に出た12歳の女子小学生が、米兵3人に車で拉致され、強姦される事件が発生した。大けがを負わされた被害者は病院に運ばれ、捜査した沖縄の警察は犯人の米兵たちを割り出した。しかし、いったん基地内に逃げ込んだ米兵に関して、沖縄県警は即座に逮捕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事件の衝撃は沖縄全土を揺るがした。沖縄戦から50年が経過したにもかかわらず、米軍基地が集中し、米兵による凶悪犯罪がくり返されていることに対し、沖縄県民の怒りが沸騰した。10月21日に開かれた県民大会には、沖縄全体で8万5000人が参加(主催者発表)し、日本復帰後最大といわれる規模となった。

沖縄の状況を目にして日米両政府は強い危機感を抱いた。このままでは在沖米軍基地の使用が不安定化し、日米安保体制が根底から揺らいでいく。そのような認識のもと、沖縄県民の怒りを鎮めるために沖縄に関する特別行動委員会(通称SACO)を立ち上げ、沖縄の「基地負担軽減」策を打ち出していった。その最大の目玉となったのが、市街地の中心部に位置し、「世界で最も危険な基地」を言われる米海兵隊・普天間飛行場の返還であった。

しかし、返還とは名ばかりで、実際には沖縄県内の別の場所に「移設」するものだった。しかも、普天間基地にはない新たな機能(港湾施設や装弾場)が付け加えられ、老朽化した基地の代わりに最新の基地を造ろうとする日米両政府の思惑が明らかとなった。

SACOの中で打ち出された合意の中には、沖縄島の米軍基地の中でも最大の面積を持つ北部訓練場の過半の返還もあった。沖縄島北部はヤンバルと呼ばれ、亜熱帯の森が広がっている。ノグチゲラやヤンバルクイナ、ヤンバルテナガコガネなど、世界中でも同地域にしか生息しない生物が多数生息し、「東洋のガラパゴス」と呼ばれる豊かな生態系を持つ。

その森を利用して米軍は北部訓練場(ジャングルトレーニングセンター)を作り、ベトナム戦争の頃からゲリラ戦やサバイバルの訓練を行ってきた。兵士の行動はヘリコプターと連動して行われるため、森の各所にはヘリパッドが造られ、離着陸訓練も頻繁に行われている。

SACOの合意では、北部訓練場の約半分を返還する代わりに、新たに6基のヘリパッドを建設することが条件となっていた。その6基は東村高江区の集落を囲むように建設されるため、地元では反対運動が起こった。

 

【高江におけるヘリパッド建設反対の取り組み】

高江ではN1地区に2基、N4地区に2基、H地区に1基、G地区に1基の計6基のヘリパッド建設計画が打ち出されていた。高江区の住民を中心に反対運動が取り組まれていたが、私が高江に通って反対運動に参加するようになったのは、2012年の1月頃からである。

 当時、N4地区とN1地区でヘリパッド建設が着手され、木々の伐採や資材の搬入が行われていた。森を切り開き、直径45メートルの着陸帯と、周りを囲む幅15メートルの無障害物帯を造る工事である。着陸帯は深さ50センチまで掘り下げられ、砂利が敷き詰められる。それほど難しい工事ではないが、N1、H、G地区は森の中の現場まで工事用道路を造ら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ために大量の樹木が伐採され、貴重な動植物の生息地が破壊される。

ヘリパッドは米軍の最新の輸送機であるMV22オスプレイも使用する。重低音の爆音が音に敏感な鳥類の生息を脅かし、エンジンから吹き降ろす熱風によって植物にも深刻な影響を受けることが予想された。高江区住民も米軍機の爆音と墜落の危険に日々さらされることになる。

高江区は人口150人ほどの小さな集落である。地域住民を支える市民が県内外から集まり、森の中に入ろうとする作業員や運び込まれようとする資材を阻止する行動が連日とりくまれた。

2012年7月から2014年3月まではN4地区の二つのヘリパッド建設に反対する行動を取り組んだ。平均的な1日は午前6時に集合し、北部訓練場のメインゲートから入ろうとする作業員と資材を止めるものだった。道路を移動する工事車両を数キロ先からチェックし、無線機で連絡を取りながら車両を止め、説得活動を行う。ゲートから入れない作業員は森の中を通って現場に向かおうとする。それを追っかけて森の中でも攻防が続いた。

メインゲートでの阻止・監視活動は午前6時から夜の9時まで15時間続き、ゲートが閉まってからは車を止めて中で寝泊まりした。24時間の行動が連日続いた。現場に入るのが難しくなった作業員たちは、基地内に宿泊所を作って工事を進めた。必要な資材は別の工事を装って搬入してあったため、N4の2基のヘリパッドは予定を大幅に遅れたが2014年3月末までに完成した。

 

【全国から500人の機動隊を派遣して暴力的に工事を強行】

その後、N1、H、G地区のヘリパッド建設は、工事用ゲートの前を市民が車で封鎖したため、2年以上にわたって手を付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かし、2016年の7月に入って日本政府は、沖縄県警に加えて全国から500人の機動隊を沖縄に派遣し、大弾圧態勢を敷いて3地区のヘリパッド建設を強行した。

7月22日の早朝、N1地区の工事用ゲートをふさいでいた市民の車両に対し、800人ほどの警察官・機動隊員が襲いかかった。車の上で抵抗する市民は引きずり下ろされ、車両が撤去された。機動隊員の暴力によってけが人が続出した。人口150人ほどの集落はその数倍の機動隊員に取り囲まれた。周辺の道路は何重にも検問が行われ、厳戒態勢が敷かれた。

そういう中でも反対する市民は、創意工夫を凝らして阻止・抗議行動を展開した。道路を車で封鎖し、座り込んで工事車両を止めたり、資材を運ぶダンプカーの車列の前を徐行運転したり、道路上での行動は数十キロの範囲で行われた。砂利を積み込む採石場でも阻止行動が行われた。警察の弾圧が日増しに厳しくなり、逮捕者が何名も出たが、行動は最後まで貫かれた。

作業員や資材が入る工事用ゲートの前では、最後の阻止線として市民の座り込みが続いた。数百人規模で市民が座り込めば、機動隊も簡単には手が出せない。しかし、数が少なければ力尽くで排除され、抵抗する市民には暴力がふるわれる。ダンプカーが採石場から往復するたびに強制排除がくり返された。

 

【大阪府警の機動隊員による「土人」「シナ人」発言】

その過程で、大阪府警の機動隊員が抗議する市民に対し、「土人」「シナ人」と発言する事件が起こった。その様子を筆者がビデオ撮影してユーチューブに投稿し、メディアにも映像を提供したことで、全国的に大きなニュースとなった。

沖縄は1879年に日本に併合されるまで、琉球国という一つの国だった。薩摩藩に実権を握られていたとはいえ、19世紀半ばにはアメリカやフランス、オランダと修好条約を結ぶなど外交権を保持していた。しかし、日本に併合されてからは、政治、経済から言語や生活習慣にいたるまで日本への同化を強いられ、日本人からは一等劣った「琉球人」「沖縄人」として差別された。

私の祖父母は1920年代に大阪で働いており、父も大阪で生まれている。ヤマトゥに出稼ぎに出た多くの沖縄人が、差別と偏見にさらされて苦しんでいる。食堂に入ろうとすると「琉球人、朝鮮人お断り」という張り紙が張られていた、というのは私が子どもの頃に祖父母から聞いた話である。

高江で発せられた大阪府警の機動隊員による「土人」「シナ人」発言は、そのような歴史体験を思い出させるものだった。沖縄では大きな批判が起こり、県議会でも糾弾決議が上がった。日本政府もさすがに問題としないわけにはいかなくなり、警察庁のトップが謝罪する事態となった。発言した機動隊員二人も処分され、大阪に戻された。

この数年、ヤマトゥでは沖縄に対するヘイトスピーチが広がっている。特に米軍基地建設に反対している沖縄人に対し、金をもらってやっているだの、北朝鮮や中国の工作員とつながっているなどのデマが流布されている。その中心となっているのはネトウヨと呼ばれる民間の保守グループだ。

本来、警察はそれを取り締まる側にある。大阪府警の機動隊員による「土人」「シナ人」発言は、規制すべき公務員が勤務時間中に行ったものであり、極めて悪質だ。そこまで沖縄差別が広がっていることに慄然とする。

 

【森の中での阻止・抗議行動】

高江では道路や採石場での取り組みと並行して、ヘリパッド建設現場での阻止・抗議行動も取り組まれた。日本政府・沖縄防衛局は、北部訓練場内への進入は刑事特別法に違反するとし、逮捕をちらつかせた。そのような脅しにひるむことなく多くの市民が森に入り、何度も工事を止めた。

危機感を抱いた日本政府は、抗議行動のリーダーを逮捕することで運動つぶしを図ってきた。10月17日、沖縄平和運動センター議長の山城博治さんが逮捕された。資材置き場の周辺に張られた鉄線を1本切ったというだけで、器物損壊の罪を負わされたのだ。本来なら軽い取り調べを受けて解放される程度の案件だが、沖縄県警は山城さんを狙い撃ちし、暴行や威力業務妨害などで逮捕をくり返した。

山城さんは血液のガンを患って治療中の身であった。長期勾留は山城さんの健康悪化と運動の破壊を狙ったものであり、保釈請求がくり返されたが、沖縄県警は5カ月に及ぶ長期勾留を行った。2017年3月18日に釈放されたあと、山城さんは6月にスイス・ジュネーブの国連人権理事会で、自らに加えられた人権侵害について訴えている。

高江のヘリパッドは12月には本体部分がほぼ完成し、12月22日には北部訓練場約半分の返還式典が開かれた。その内実は、使っていない部分を返還する一方で、MV―22オスプレイの使用も可能な新しいヘリパッドを造り、訓練場をコンパクトにまとめて機能を強化するものでしかない。

2017年10月11日、東村高江区の牧草地に米海兵隊のCH―53E大型輸送ヘリコプターが不時着し、直後に炎上する事故が発生した。死傷者はなかったが、民家からは300メートルほどしか離れていない場所だった。新たなヘリパッドが建設されることで高江区と周辺での訓練が増え、爆音被害と事故の危険性が増す、という住民の不安は現実となっている。

高江のヘリパッド建設は、日本政府が沖縄の民意を踏みにじり、警察・機動隊の暴力によって強行された。北部訓練場で鍛えられた米兵たちは、ベトナムやアフガニスタン、イラクなど世界各地の戦場に派遣されて殺戮と破壊をくり返してきた。それを黙認することは、沖縄人が米軍の侵略戦争に間接的であれ加担することになる。それを拒否するためにも、北部訓練場の全面返還をめざす運動が再構築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辺野古新基地建設に反対する行動】

1997年12月21日、普天間基地の「移設」先として浮上した名護市辺野古の海上にヘリポートを建設することをめぐって名護市民投票が行われた。結果は建設反対が多数を占め、本来ならここで問題は解決するはずだった。しかし、当時の比嘉鉄也市長は民意を踏みにじり、政府に対し「移設」受け入れを表明して辞任した。基地関連の利権を目当てにした、この卑劣な行為によって名護市民は以後、20年以上に及ぶ対立と混乱に苦しめられることになった。

 2004年4月19日、日本政府は普天間基地の「移設」に向け、辺野古の沖合で海底ボーリング調査に着手した。市民は資材置き場に予定された漁港に座り込んで阻止行動を開始した。海上でもボーリング調査のために設置された単管やぐらに上り阻止行動を展開した。当時は警備にあたっていた海上保安庁が中立の立場を取ったため、市民の実力闘争によってボーリング調査は中止に追い込まれた。

その後、世界的な米軍再編が進められる中、普天間基地の「代替施設」案も紆余曲折があったが、2006年5月、辺野古岬の沿岸部にV字型2本の滑走路を持つ計画が、日本政府と名護市の間で合意された。辺野古側リーフ内と大浦湾の一部を埋め立て、港湾機能や装弾場など新たな機能を持つことも明らかとなった。単なる飛行場の「移設」ではなく新たな基地の建設だ、という批判が広がっていく。

沖縄では普天間基地の「県内移設」問題が起こって以降、反対する世論が常に7割を超えていた。すでに米軍基地が集中している沖縄の中で「移設」しても、政府がいう「負担軽減」にはならない、という不満が鬱積していた。そのため、辺野古「移設」を推進・容認する立場では選挙に勝てない状況となっていた。

2010年の県知事選挙で当選した仲井真弘多氏も、立候補の際には「県外移設」を主張し、「県内移設」については態度を曖昧にした。その本音は疑わしいものだった。実際、仲井真知事は2013年12月に腰痛の検査入院を理由に東京へ行き、日本政府と秘密裏に交渉を重ねて、辺野古「移設」に向けた埋め立ての承認に踏み切った。

 沖縄県内では猛反発が起こり、仲井真知事は支持を失ったが、日本政府は2014年7月1日に辺野古新基地建設に着手し、8月からは海底ボーリング調査を開始した。市民による阻止・抗議行動も即座に起こった。陸上ではキャンプ・シュワブのゲート前で座り込みが、海上では船とカヌーによる行動が始まった。

 

【オール沖縄という枠組みの誕生とその背景】

 そういう中、2014年11月16日に沖縄県知事選挙が行われた。日本政府が全面的に支援し、再選を目指す仲井真氏に対抗して、新基地建設に反対する側が立てたのは、元自民党沖縄県連幹事長で那覇市長の翁長雄志氏だった。

なぜ元自民党県連の幹部だった翁長氏が、新基地建設反対の立場で立候補したのか。そこには沖縄の政治・経済状況の大きな変化があった。

沖縄でも政治の保守化が進んでいる。2006年、2010年の県知事選挙では「革新のホープ」といわれた糸数慶子氏、伊波洋正氏が相ついで敗北した。社民党・共産党・沖縄社会大衆党を中心とした革新共闘という枠組みでは、日本政府が全面的に支援し、自民党・公明党が推す候補者に勝てないという構図が鮮明となった。

そこで新たに作り出されたのが「オール沖縄」という枠組みである。革新系の政党と自民党、経済界の一部が、辺野古新基地建設反対、MV―22オスプレイの沖縄配備撤回を一致点に共闘を組む方式である。そのために日米安保条約や自衛隊、辺野古新基地以外の米軍基地の県内移設、泡瀬干潟などの対立する課題は棚上げにされた。

それまで普天間基地の辺野古「移設」に賛成していた自民党や経済界の一部が反対に転換したのはなぜか。そこには2000年代に入り、返還された米軍基地の跡地利用がうまくいき、新たな商業地域が開発されることで、税収や土地の資産価値、雇用などが、米軍基地の頃よりも大幅に延びたことがある。米軍基地は新たな利潤を生みだす場ではなく、雇用も限定されている。米軍基地を返還させ、再開発した方が多くの利益を生み出し、沖縄のためになる、という認識が広がった。

もう一つの大きな理由は、2001年9月11日に米国で起こった同時多発攻撃である。ニューヨークの貿易センタービルや米国防総省本庁舎に乗っ取られた民間機が突っ込んだ事件に、沖縄の米軍基地も即座に反応した。基地のゲートやフェンス沿いに武装した米兵が立ち、沖縄の基地も攻撃を受け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緊張が県民にも広がった。

同事件に沖縄の主要産業である観光業は大きな打撃を受けた。修学旅行をはじめとした宿泊予約のキャンセルが相つぎ、その回復に長期間を要した。その経験から沖縄の観光業者の中で、観光は平和産業であり、戦争の不安がある所に観光客は来ない。軍事基地と観光は相容れない、という声が上がるようになった。

沖縄経済は基地・公共工事・観光を3本柱とする「3K経済」といわれてきた。その中で基地と公共工事の占める割合が低下する一方で、観光業は飛躍的に伸びている。日本国内だけでなく韓国や台湾、中国など東アジア諸国からの観光客も急増している。

米軍基地に依存する時代は終わった。これからは東アジアの平和的環境をつくり、その中で沖縄の経済的・政治的自立を図っていくことが重要だ。そういう認識を持つに至った自民党と経済界の一部が辺野古新基地建設反対に転換し、革新勢力と結びついて作り出されたのが「オール沖縄」である。

それは2014年11月の県知事選挙で大成功した。仲井真氏は前年の埋め立て承認で県民の信頼を失っており、新人の翁長氏が10万票以上の大差をつけて圧勝した。

さらに「オール沖縄」勢力は、同年12月14日に行われた衆議院選挙でも4選挙区すべてで勝利し、沖縄の民意が辺野古新基地建設反対であることをはっきり示した。

だが、日本政府はそれを完全に無視した。安倍晋三首相は当選した翁長新知事と面会することすら拒み、工事を強行し続けた。2016年3月から12月にかけて、埋め立て承認をめぐる国と県の裁判で一時的に工事が止まったが、その間に高江のヘリパッド建設が進められた。

そして、高江の工事がほとんど終わった12月に、最高裁の判決で沖縄県の敗訴が決まり、翁長知事は埋め立て承認の取り消しを撤回して工事が再開された。

 

【強行される辺野古新基地建設と反対運動】

日本政府・沖縄防衛局は当初、大浦湾側から埋め立てを始めるため護岸工事を着手した。しかし、途中から計画を変更し、大浦湾側の護岸工事を中断して、辺野古側のリーフ内で別の護岸工事を始めた。

大浦湾は水深が深く、活断層の存在も指摘されている。難工事が予想され、工事の進行が遅れることが予想された。それに対し辺野古側のリーフ内は満潮時でも水深4~5メートルしかなく、護岸工事が予定されている場所は干潮時に1メートル以下になる場所もある。

日本政府・沖縄防衛局は浅瀬の方から護岸工事を進め、埋め立てに向けて工事が進行していることを県民に印象付けようとした。もう後戻りできない所まで工事は進んでいる、と県民に思い込ませ、どんなに頑張っても国には勝てない、という諦めと無力感を生み出すのが狙いだ。

工事を進めるために日本政府は強権的姿勢を剥き出しにしている。沖縄県が出していた岩礁破砕許可の期限が2017年3月末に切れ、県は政府に工事を止めるよう指示した。だが、政府はそれを無視して工事を続けている。さらに、名護市の漁業協同組合に多額の補償金を払って漁業権を放棄させた。

埋め立て海域に生息する稀少サンゴに関しては、調査結果の県への報告を遅らせ、14群体のうち13群体を死滅させたうえで、残り1群体の移植を求めた。サンゴの移植は大半が失敗していると専門家は指摘している。しかし、政府は県が移植を許可しなければ、石材を投下してサンゴを破壊し、責任を県に転嫁しようとしている。

行政権限を駆使して工事を止めようとする翁長知事に対し、日本政府は先手を打って、知事の権限を封じ込めようとしている。ゲート前や海上での阻止・抗議行動に対しては、警察・機動隊と海上保安庁という暴力装置を使い弾圧をかけている。けが人や逮捕者が多数出るなかで、それでも県内外から多くの市民が集まって闘いを継続している。

だが、長期間の取り組みと工事の進行により、市民の間に疲労感や諦めがじわじわと広がっているのも事実だ。ゲート前でも海でも阻止・抗議行動への参加者が減っている。運動を立て直し、参加者を増やしていくことが課題となっている。

現在、日本政府・沖縄防衛局は、6月末までに辺野古側の海域を護岸で囲い込み、内側に土砂を投入しようとしている。本格的な埋め立てが始まったと大々的に宣伝し、11月に行われる県知事選挙で有利な状況を作ろうとしている。それはすでに効果を発揮している。

2月4日に名護市長選挙が行われ、これまで2期8年間、辺野古新基地建設に反対してきた現職の稲嶺進氏が敗北した。新人候補者は、辺野古新基地問題にはいっさい触れず、争点回避を行ったうえで、国と協力して予算を取り、市を活性化させると主張して当選した。

名護市は人口61000人ほどの小都市である。そこに政府の閣僚や国政与党の大物議員が乗り込み、選挙期間中に名護市に来た国会議員は100人を超した。それらの議員は企業や業界団体を回って票を集めた。地方の小都市の首長選挙に政府がここまで介入するのは、名護市以外ではあり得ない。辺野古新基地建設を進めるために、政府は地方自治を踏みにじったのだ。

名護市長選挙の結果は、護岸工事の進行が市民の中にあきらめ感を生み出している現実を示した。この流れは11月の県知事選挙までにさらに強まる可能性が高い。辺野古新基地建設は深場の大浦湾が難工事であり、そう簡単に完成するものではない。しかし、政府の狙い通りに名護市長選挙に続き県知事選挙でも敗北すれば、反対運動は大きな打撃を受ける。

沖縄県民が対峙しているのは、日本と米国という2つの巨大な国家だ。辺野古の闘いの困難さは言うまでもない。しかし、だからといって膝を屈するわけにはいかない。米軍や自衛隊の強化をこのまま許していけば、その先に待っているのは沖縄の破局である。東アジアで沖縄を巻き込んだ軍事紛争が生じれば、観光を中心とした沖縄経済は吹き飛んでしまう。

沖縄が再び戦争の被害者にも加害者にもならないために、米軍と自衛隊の基地強化に反対し、闘い続けるしか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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