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유목민 문학의 저항성 김형수(작가)

 

 

0.

나는 처음에 오늘의 주제가 ‘몽골의 <저항>문학’임을 모르고 발제를 맡았다. 해당 주제를 감당하기에는 일단 함량미달임을 고백해두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저항문학이 국가폭력을 전제로 한 개념이라면 몽골문학은 어쩌면 그것이 형성되기 이전의 상태에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근대국가 몽골리아에서 체제와 대결하는 문학으로서의 저항문학이 존재했던 것은 스탈린 시대가 거의 유일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에 대한 공부가 되어 있었다면 오늘의 자리에 매우 유익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한 사회집단의 내부에 형성된 문화적 장치로서의 문학은 생존환경과의 투쟁을 본성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새의 날갯짓이 공기에 대한 저항의 형식을 갖듯이 인간의 생존활동도 저마다의 위협과 싸우는 저항적 존속을 통해 문화유산을 쌓게 된다. 몽골 유목민의 문학도 그런 관점에서 독자적 저항의 궤적을 그려왔음이 틀림없다. 오늘의 자리에서 이를 살펴보는 것은 꽤 새롭고 참신한 시야 확장의 계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유목민의 생존형식 자체를 자기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두고 있는 국가로서 몽골은 무엇에 저항하는 역사를 내부에 간직해 왔을까? 나는 오늘의 주제를 여기에 맞춰두고자 한다.

 

1.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유라시아 대륙은 대대로 유목민들이 지켜온 땅이다. 흉노 이후, 그들을 러시아는 ‘타타르’라 부르고 중국은 ‘오랑캐’라 불렀다. 모두 당대를 대표하는 부족들의 이름이었다. ‘몽골’이라 칭하게 된 것은 칭기스칸의 대몽골제국이 출현한 후부터인데, 역시 그를 배출한 부족 명을 따서 쓴 결과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자주적인 국가 몽골리아, 중국 소수민족에 속하는 내몽고, 러시아에 속하는 브리야트 등을 합하여 몽골사람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느껴지는 생태 환경적 요인에 근원을 둔 유목민으로서의 개성은 세 곳 모두에게 공통되어 나타난다. 문화는 체제가 정하는 것이 아님이 틀림없다.

유라시아 대륙은 고원지대인데, 고원의 생태 형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바이칼 호수(지금은 러시아 령) · 흡수굴 호수 일대의 삼림지대. 이곳에서는 ‘사슴’을 이동수단으로 삼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둘은 그 아래 지역에 속하는 광활한 초원지대. 여기에서는 ‘말’에 의존하는 문화가 발달되었다. 셋, 정착민과 경계를 나누는 고비지대. 이곳 사막 일대에는 ‘낙타 문화’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이상은 모두 칭기스칸에 의해서 통일된 문화를 함께 사용한다는 점 외에도 게르라고 하는 천창 형 주거수단을 갖는 자들의 역사에 속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늘을 향해 창을 내는 이동식 주택은 유목 생활 때문에 생겨난 것이니, 이들의 공통점은 결국 유목민이 된다.

‘유목’은 ‘목축’이 아니다. 이 분야를 대표하는 학자 김호동은 유목을 가리켜 “고정된 거주지와 축사를 갖지 않고, 그 사회의 성원 대다수가 광역적이고 지역적인 이동을 통해 가축을 사육함으로써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식량 생산의 특수한 한 형태”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유목민이란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가축과 함께 이동하면서 가축을 사육하는 것을 기본적인 생존 수단으로 삼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농경 정착민에게 오곡이 필수적이었다면 이들에게는 오축(다섯 가축 : 양, 염소, 소, 말, 낙타)이 하늘의 선물이었다. 곡식이 아니라 가축을 기르며 살았다는 얘기인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동물의 경영자를 ‘천하의 근본’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뿌리’가 아니라 ‘발’을 중심으로 사유한다는 것, 이는 몽골 유목민 문화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예컨대, 인류의 문명은 정착 생활을 기본 단위로 하는 바 유목민의 문화는 자신들의 고유 형식을 ‘야만’으로 규정하는 ‘문명의 패러다임’에 대한 저항을 기본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몽골문학 속에서 면면히 숨 쉬고 있는 ‘이동태’로서의 유목문화가 ‘정착태’로서의 근대 산업문명과 갈등하는 모습은 일견 아메리카 지배하의 인디안 문화를 연상케 한다.

바로 이들의 문학이 몽골고원에서 펼쳐진 양상을 편의상 ‘중세 이전’과 ‘근대 이후’ 그리고 ‘21세기문학’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볼까 한다.

 

2.

몽골 유목민의 토템과 샤먼 숭배를 강화한 것은 광활한 대지와 극단적인 기후변동의 힘일 것이다. 초원에서는 누구나 막막한 지평선의 한 점을 벗어날 수 없다. 지평선 너머에도 지평선이 있고, 그 너머에도 또 지평선이 있다. 그 어딘가에서 섭씨 40도의 무더위를 가르고 기습해온 소나기는 순식간에 한겨울의 추위를 무색하게 한다. 가파른 자연의 변덕 앞에서 재산이 많다거나 지식이 높다거나 용모가 곱다거나 하는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다. 흔히들 뽐내지만 개인마다 소지한 사회적, 문명적 무장이 그곳에서는 먹혀들 만한 대상을 갖지 못한다. 광활한 대지는 질주의 본능을 충동질하나 육체는 미약하고 공간은 크다. 인간은 오직 유한한 존재의 숙명을 확인하고 고개를 숙여야 할 뿐이다.

이 같은 환경은 매우 풍부한 구비문학의 유산을 낳게 했다. 몽골 유목민들이 전승해온 구비문학 유산은 매우 풍부한 편이다. 오늘날 몽골리아, 내몽고, 브리야트 등지에 흩어져 있는 중세 서사문학의 진수인 <장가르> <게세르> <몽골비사> 등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구비전승문학의 한 전범에 속한다. 원나라 때 채록되어 원전의 대부분을 유실시키지 않은 <몽골비사>는 칭기스칸을 낳은 소위 황금가문을 기리기 위한 ‘비밀의 역사’로서 언뜻 보면 우리의 <용비어천가> 같은 양상이지만 속내는 왕족 찬양의 서사로 기울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하다. 테무진의 아버지가 아내를 약탈하는 이야기, 테무진이 이복형제를 살해한 이야기 등등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두루 놓치지 않고 있는 이 작품은 매우 서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걸작으로 평가된다. 나는 몽골 유목민 문학의 저항성이 기본적으로 이곳에서부터 연원한다고 본다.

 

3.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는 광활한 대지가 간직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역사와 기억에 관련되는 신화, 전설, 민담, 노래 등 서정적 혹은 서사적 구축물들이다. 문명의 축조물들이 완벽하게 지워져버린 텅 빈 대지 위에 유목민들은 기록에 취약하고 구전에 강한 문학을 매우 풍부하게 새겨 놓았다. 대표적으로 소개하고 싶은 것은 ‘낙타 이야기’이다.

 

옛날에, 해가 열두 바퀴씩 도는 것을 신령님이 처음 발견했을 때였다. 열두 해의 특성을 유목민에게 가르치려고 하니 동물에 비유하지 않으면 도대체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래서 동물 열두 마리를 고르기로 하고, 가까이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개부터 시작해서 살이 포동포동한 돼지까지 열한 가지 동물을 골랐는데, 낙타와 쥐가 끼지 못했다. 그 둘이 서로 자기 이름을 걸어달라고 싸우게 되자 신령님이 내기를 걸었다. 아침 햇살을 먼저 본 짐승을 걸어주겠다고 한 것이다. 낙타는 자기가 더 크기 때문에 자신 있게 동녘을 향해 기다리고 섰다. 쥐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리한지라 꾀를 낼 수밖에 없었다. 밤에, 낙타의 혹 위에 올라가보니 해 뜨는 쪽이 낙타 대가리에 가린다. 그때 쥐에게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서쪽을 보고 서게 되었다. 밤이 가고 해가 떠오르자 최초의 빛이 서쪽 산에 드리워졌다. 낙타가 “야, 이제 해가 떠오른다. 곧 빛이 비출 거야.” 하고 즐거워할 때 쥐가 “야, 햇빛이다. 저거 봐라!”하고 소리를 질렀다. 낙타가 돌아다보니 쥐의 말이 맞다. 동쪽에서 뜨는 해는 서쪽 산을 먼저 비춘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낙타는 통탄했다. 이렇게 해서 쥐는 열두 해에 포함되고 낙타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낙타는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그러자 신령님이 낙타를 불러서 타일렀다. “낙타야. 네 몸에는 열두 가지 동물이 다 들어 있어. 그러니, 넌 모든 해를 다 가지면 되잖아.”

(…)

“쥐의 귀, 소의 배, 호랑이의 발굽, 토끼의 코, 뱀의 눈, 말의 갈기, 양의 털, 원숭이의 혹, 개의 넓적다리. 밤새 아홉 개를 맞췄는데, 세 개를 알 수 없잖아. 보오르추도 모르지?”

“용과 닭과 돼지가 남네?”

“그런 거 본 적 있어? 용이 어떻게 생겼는지, 닭은 어찌 생겼으며, 돼지는 무슨 모양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답이 뭔데?”

“용의 몸, 닭의 벼슬, 돼지의 꼬리. 이걸 옹기라트 사람들은 다 알아. 만리장성을 넘으면 성 안이잖아. 장사꾼들이 성 안에 들어가기 전에 늘 옹기라트에서 신세를 지기 때문에 성 안 사정을 잘 알더라고.”

 

이는 내가 소설 <<조드>>를 쓰면서 몽골 유목민에게서 취재한 내용을 고스란히 본문 서사에 반영한 것이다. 아마도 흉노의 유산으로 보이는 십이간지의 동물이 선정되는 자리에 국외자로서의 낙타가 등장하는 부분은 유목민의 사상을 반영하는 탁월한 장치가 아닌가 한다. 열두 가지의 대표 서열에 그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끼지 못하는 장면은 세계의 본체가 체제화 될 수 없음을 웅변하는 ‘중심 해체’의 표본처럼 보인다. 질 들뢰즈가 말한 ‘천 개의 고원’이 이 낙타 이야기의 주제가 되는 셈이다.

그밖에도 몽골 유목민들의 독자적인 시가 장르 형식으로서 <세 가지>라는 게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시조’나 일본의 ‘하이쿠’처럼 짧은 노래로 촌철살인의 주제를 다루는 운문 문학이다. 중요한 점은 여기에 유목민이 제기하는 문명비판적 패러다임으로서 인류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정신사적 모색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4.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가장 궁금하게 여길 것은 아마도 근대문학 이후가 아닐까 한다. 몽골의 근대문학은 1921년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태동하였다. 소련에 이어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한 몽골은 이 시기에 유목봉건문화를 극복하고 사회주의문화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문화예술 영역에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문학이 대두하여 대략 50여 년 동안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항쟁과 인민혁명의 승리 및 비자본주의 발전의 길을 가는 시대정신’의 작품들이 풍미하였다.

근대문학 초창기의 시문학을 대표하는 인물로서는 나착도르치를 들 수 있는데, 나는 몽골 울란바타르대학에서 한 학기동안 ‘한·몽 비교문학’을 강의할 때 몽골의 나착도르치를 한국의 김소월과 비교했다.

 

한겨울 살을 에는 추위에 눈과 얼음으로 덮여

수정빛 은빛으로 반짝이며 빛나는 대지

한여름 좋은 시절에 꽃과 잎이 피어나고

철새들 멀리서 날아와 끼룩대는 대지

이는 나 태어난 고향, 아름다운 몽골 땅

(…)

흉노 이래 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던 곳

푸른 몽골 시대(몽골제국 시대)에 힘차게 일어선 곳

나착도르치 <나 태어난 고향> 일부

 

우리로 보면 신중현의 노래 <아름다운 강산>이 연상되는, 그러면서 한편으로 지극히 체제 순응주의 같은 이 시가문학조차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는 유목정신의 정당성이 뿌리 깊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당대의 서사문학으로는 로도이담바가 쓴 <<타미르 강의 맑은 물>>이 있다. 1950년대에 이미 북한에서 번역 출간된 적이 있는 이 작품이 서울에서는 2000년대 이후에야 민음사에 의해 출간되었다. 유목 사회의 의적을 다루는 이 소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최대 성과로서, 장편서사문학의 미덕이라 할 문체미학 외에도 유목민의 풍속, 세태, 생활묘사 등 민족 미학적 가치가 높아서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마치 홍명희 <<임꺽정>> 같은 반열에 속한다 할 만하다. 물론 여기에 근대 사회주의적 가치관이 반영되어 반봉건 반이데올로기적 성향이 그들의 토속성과 종교성을 청산 대상으로 취급하는 한계는 분명히 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세대의 문학작품으로서 나는 중편소설 <늙은 늑대의 울음>을 감동적으로 읽었다. 또한 데. 처어덜의 시들도 유목민의 가치관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성과에 속한다.

 

먼 땅을 향해 봄 두루미가 대열을 이루고 날아갈 때

황금빛 제비는 그 뒤를 따라간다고 한다.

폭풍우 속을 거슬러 날아가다 작은 날개가 지치면

두 날개를 펼치고 날갯짓하는 두루미 등 위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한다.

(…)

넓은 세상을 함께 날아서

먼 길을 여행 온 새들이여- 인간들이여

-데. 처어덜 <먼 길을 가는 새들이여 인간들이여> 일부

 

유목민의 감수성과 이동태의 삶을 긍정하는 많은 문학 유산들은 그들에게 고유한 대지 정신 때문에 이내 소련 정부와 심각한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된다. 중요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몽골문학은 구 소련 문화의 한 구성부분으로 한창 부흥을 누리던 때 영적이고 종교 지향적인 움직임 특히 조상(칭기스칸 세대)의 역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기억 투쟁(조선어를 말살하던 일제 강점기의 민족문학을 연상해도 될 것이다)이 시도되면서 엄청난 탄압의 시대를 겪어야 했다. 사적 유물론을 신봉하는 국가 소련은 유목사회를 독자적 사회경제체체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유목사회는 출발부터 약탈경제를 전제로 성립된 체제라 해서 유목민의 토대를 제도적으로 해체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몽골의 작가들은 그에 맞서서 초원의 역사에서 가장 자긍심을 주었던 칭기스칸에 대한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로 인해 특히 소련에게 정치 군사적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꽤 많은 작가들이 죽음의 탄압을 받았다.

 

5.

그렇다면 몽골의 21세기문학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20세기 말엽 페레스트로이카로 시작된 변혁의 물결이 일자 몽골은 곧장 민주화를 선언하고 나온다. 1989년, 1990년에 절정을 맞는 학생운동을 경험한 세대들은 곧장 몽골의 사회체제를 변화시킨 민주화세력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의 문학적 진출은 크게 전통주의와 현대주의로 분화되는데, 한국문학에 비유하면 ‘현대문학파’와 ‘문지파’의 치열한 대립은 있지만 ‘창비파’는 미처 형성되지 못했다. 김수영 식으로 지적하면 참다운 전통도 참다운 현대도 획득하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이 역시 유목민의 미학을 당대문학으로 승화시키며 매우 세련된 작품들을 얻어낸다. <계간 아시아> 등 한국의 문예지에 소개된 작품들 중 을지터거스의 단편 <수족관>, 칠라자브의 시 <아버지> 등은 한국문단에도 꽤 신선한 파장을 일으킨다. 특히, 도서출판 자음과모음에서 출간된 아요르잔의 소설 <눈의 전설>은 신화성과 현대성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걸작으로 흡사 마르께스의 소설을 연상시킨다는 호평을 얻는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때도 유목문화적 유산이 정서적 흐름의 복판을 관통한다는 사실이니, 그것이 바로 몽골 21세기문학의 특성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몽골의 문학적 환경은 소비에트 해체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환멸과 함께 시작된 급격한 변화의 물결에 사로잡히며, 거의 모든 시인이 유목민적 서정성에 기초한 전통적 시가 경향과 도시생활 중심의 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과도한 경사에 참여하여 서로 충돌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로 인해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난 많은 시인들이 “다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린다”는 평을 받을 때 군계일학의 모습을 보여 온 시인이 우리앙카이였다. 광주 국립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주최한 아시아문학페스티벌에서 제1회 아시아문학상을 수상한 우리양카이는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오랑캐라는 부족명을 필명으로 삼게 된 ‘현자 지향’의 시인이다. 그는 오늘날, 유목문학만이 최고라고 고집을 피우거나 서양의 모더니즘 조류를 무조건 따라가지 않고 오직 현대 몽골의 영혼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했다는 평을 듣는 한편, 연륜을 더해갈수록 사람은 새로워야 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젊은 시인들과의 교류를 계속하면서, 후학들로부터 유목민 감수성에 현대적 사유를 얹은 시인, 몽골의 시에 직관과 통찰의 영토를 개척한 시인이라 하여 존경을 받는다.

 

나뭇잎이 부딪칠 때 들려오는 소리는 너의 말인가 바람의 말인가

 

나무를 둘러싼 이 고요는 너의 것인가 떠나간 철새들이 남긴 빈 공간인가

 

낙타처럼 생긴 가을의 색깔은 너의 색인가 마음에 내리는 비의 색인가

 

너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너무나 고요하구나 너의 고요는 귀에는 들리지 않고 눈과 심장에만 닿는구나

 

너와 이야기를 나누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럴수록 나는 말하고 싶다

 

물어도 답이 없지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처럼 아니 모든 것을 다 아는 현자처럼 나의 물음에 너는 질문을 던질 뿐이다

-우리양카이, <나무> 전문

 

6.

오늘날 지상의 거의 모든 예술에서 드러나고 있는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인간의 시야에서 대지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문명의 어항’ 속으로 도피해버린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든 도시에서 창작된 소설에는 자연의 무대가 없고 시에서는 대지를 호흡하는 노래가 없다. 인간이 갖는 근원적인 욕구들이 우리의 본성을 구성할진대, 춥고 배고프고 무섭고 전율하는 욕구들은 모두 우리가 대지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그러나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고, 무섭지 않으려고 만들어낸 문명이 우리의 삶에서 대지를 내쫓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그리하여 마치 공상과학영화의 외계인들이 맑은 공기와 물이 그리워 지구를 찾는 것처럼 문명의 어항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필시 자신들의 얼굴에서 사라져버린 대지의 그림자를 그리워하는 시점에 우리가 몽골 유목민의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논의가 진행되는 때와 장소의 특수성은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는 고원의 산천과 초지 형상이 고스란히 살아 있으면서 사방을 둘러싼 거대 수평선이 광활한 시야를 제공한다. 몽골고원의 건조지대에서 ‘물’을 숭상하며 살아온 유목민들은 그래서 제주도를 13세기의 파라다이스로 생각했다. 몽골제국의 군대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수들을 제주도로 보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불어, 거친 자연과 바다를 끼고 살았던 제주도 주민들은 환경 특성상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에 내재한 ‘생명적 자연주의’를 자신의 문화의 근원으로 섬긴다. 생각해 보면, 디지털 세계에서는 ‘사라진 문명’이 언제나 ‘신화적 복원’의 거점이 된다. 오늘날 인간 중심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샤머니즘과 친화하는 까닭을 추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것들은 모두 몽골 유목민 문학에 내재된 반(反)문명으로서의 저항성이 인류 대안적 정신문화의 유력한 근거지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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