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 재경 제주사회문제협의회 대표

[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한양도성박물관, 그 규모에 놀랐다. 1, 2, 3층을 사용하고 있는데, 특별한 전시물은 없고, 사진 위주로 진열되어 있다.

나라의 도읍을 首善之地, 즉 본보기가 되는 가장 좋은 땅이라 표현하니, 수선전도는 조선의 서울 지도이다. 목판본이며 고산자 김정호가 1800년대 초에 제작한 것이고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위에 3개의 봉우리로 표현된 삼각산과 도봉산, 한성부의 도성안과 밖이 그려져 있다.

조선의 도읍 한양은 풍수사상과 유교이념에 의해 건설된 계획도시이다. 외사산인 북한산, 아차산, 관악산, 덕양산이 경계를 이루고 내사산인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축성된 성곽으로 안팎을 구분하였다. 이 지도는 도성 안팎의 궁궐, 종묘, 사직, 도로, 다리, 동네, 사찰 등의 명칭까지 자세히 표시하고 있다.

이번에 한양도성박물관에서 목판본에 의해 찍힌 인쇄본을 처음 봤는데, 전에 대학 동문회보를 보다가 모교 박물관 소장품에 대한 연재 글에서 우연히 이 지도에 대해 읽은 기억이 있다.
6.25 전란이 끝나고 학교 관계자들이 캠퍼스를 되찾았을 때 이 목판본은 박물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뒷면에는 군화 발자국이 많이 보였는데 인민군, 국군, 미군 군화 발자국이었다고 한다. 시커먼 나무 판대기로 보여서 그냥 버렸던 것 같고 그래서 전란에서도 이 지도는 살아남게 된 것이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고려대 박물관에는 이 지도 외에도 다른 곳에 거의 없는 동궐도, 서궐도처럼 중요한 지도들을 소장하고 있다.

인왕산 일대의 지형. 중간의 곡성 바로 밑에 선바위에 대해서 언젠가 글을 본 적이 있다.
선바위를 도성 안에 넣을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한 논쟁이 태조, 무학대사, 정도전등이 격론이 있었다. 무학은 넣어야 한다고 하고, 정도전은 밖에 두어야 한다는 논쟁이었다.
정도전도 조선의 도읍지를 정하는 문제나 궁궐의 배치에 대해서 강한 의견을 냈던 것을 보면 풍수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 권력의 최고 실세라는 점을 고려하면 무학보다 센 그의 영향력 때문에 태조가 그의 결정을 따르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4대문 역시 유교의 이념인 五常之道의 仁義禮智信의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그리고 도성 안의 보신각. 그러나 북문인 숙정문은 智 글자를 넣지 않았다.

그 글자를 사용하면 도성 안에 음기가 들어와서 도성의 여자들이 음기가 많아져서 도덕적으로 안 좋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북문은 늘 닫아 두었는데, 북쪽은 물을 상징하기도 해서 가뭄일 때만 열었다.

                                                도성연융북한합도

한양도성과 연융대성, 북한산을 합해서 그린 지도이다. 연융대성(鍊戎大城)은 연산군의 놀이터였던 탕춘대(蕩春臺)에서 명칭을 딴 탕춘대성에서 영조때 지도에 보이는 군사훈련장인 연융대가 들어서면서 탕춘대성이 연융대성으로 한때 명칭이 바뀌었다.

탕춘대성은 숙종때 축성되었는데,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해서 도성의 방어력을 증강시킬 필요성 때문이었다. 선혜청 창고와 군량창고인 평창(平倉)이 건설되었고 그 성안에 총융청 기지가 들어섰다. 그런 연유로 오늘날 그 동네의 명칭이 평창동이 된 것 같다. 그리고 탕춘대성과 나란히 보현봉에서 형제봉을 거쳐 북악산을 잇는 성곽도 추진했으나 계획으로만 끝났다.

                                                     북한성도

북한산성과 주변 지형, 그 안의 사찰이나 성문, 장대 등의 위치와 명칭 등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1700년대 초에 숙종은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버려져 있던 옛 백제의 성인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증축하고 그 안에 행궁과 관청, 군사시설, 승병을 위한 사찰 등을 대대적으로 만들어 산속 도시를 건설했다.

산성의 개축은 수도 방위군인 3군문이 담당했다. 그런데 산성 안에 13개 절을 두었다.

불교를 숭앙하던 고려와 달리 여말에 성리학이 들어오고 나서 새로이 건국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불교를 배척했고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세조를 지나 중종때 부터는 극심한 탄압을 가한다. 사찰의 재건이 전국적으로 금지되었고 젊은 승려들은 새로이 군역을 부담해야 했다. 세조때 창건한 도성 안의 원각사(오늘날 파고다공원 자리)가 헐려서 거기서 나온 목재들로 선박을 건조했으며 그 후 사대문 안에 절이 세워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산성 안에 절을 둔 이유는 산성의 보수와 군역을 담당하게 하려는 사대부들의 얄팍한 이기적인 속셈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조선은 군사력이 얼마 안 갖춰 있어서 일본에 맞서 싸운 사람들은 주로 의병과 승병들이었다. 그래서 사대부들이 다시 승려들을 이용하려고 조선 때 산속에 13개의 절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도 중흥사의 규모는 아주 대규모였다. 결국 우리 불교를 호국 불교라고 부르는 이유도 외침에서의 역할이 막대했던 까닭이다.

몇년 전 친구와 둘이 북한산 금선사에 들러 방장스님과 차를 마시며 조선시대의 불교 이야기를 나눴는데, 당시 승려들의 심한 노역과 억압 상태에 비분강개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삼봉집

진품인지 박물관에 근무하는 직원 여러 명에게 문의했지만, 아마 그럴 것이라는 애매한 대답만 돌아왔다. 누구 하나 뚜렷한 대답을 못하는. 그리 많지도 않은 진열품을 갖고 있음에도 직원들이 너무 한심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다른 의문점들은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누가 언제 그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도성과 그 주변 모습이 상세히 그려져 있는 아마 조선 중후반의 지도이다.

여장의 구조를 알게 된 사진. 숙종 때부터는 총을 사용하기 위한 근거리와 원거리 목표물의 총구가 다르고 화살의 방어와 화살을 쏘기 위한 타구가 있다. 홍예문을 만드는 방식도 알 수 있는 사진이다

근대 이전에는 성이 가장 주요한 방어수단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사에서 성의 역할은 막중했다. 먼저 서양에서 1494년 프랑스 샤를 8세의 이태리 침공 시 이동식 대포가 처음 등장(전쟁사에서 이 사건은 중요한 변화로 규정한다)하면서 그때부터 성이 갖는 전략적 중요성이 급격히 떨어졌다. 그리고 15세기말 이후 대항해시대에 영국에서 시작된 대포를 장착한 함선(이 사건 역시 전쟁사에서 중요한 변화로 규정)은 동양 정벌의 선봉이었다.

이 사진은 아마 겸재 정선의 도성 쪽에서 바라본 '창의문' 그림을 찍은 것인 듯하나. 설명이 없다.

1700년대 초에는 창의문에서 지금의 경복궁 전철역쪽 사이의 동네가 기암과 나무 숲, 계곡임을 말해준다.

정선은 영조 때 진경 산수화로 유명하다. 이제는 조선만이 중화라는 황당한 소중화주의의 거센 영향을 받은 실학이 이 시기에 태동하면서, 회화에서도 더 이상 중국의 모습을 그리지 않고 이 땅의 우리 산하를 그리겠다는 자주적인(?)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영조때 조선에서는 주희가 정립한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해 세상 만물을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으로 구분하여, 호락논쟁이라는 성리학에서의 1500년대 후반의 사단칠정논쟁에 이은 두번째 철학논쟁이 벌어진다.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이라는 것인데, 나쁜 짓만 골라가면서 행한 송시열과 그의 제자들, 즉 서인 중에서도 노론 내부에서 벌어진 落水지방(서울)과 湖西지방(충청) 출신들 간의 논쟁이기도 하다.

만주족 오랑캐를 사람으로 볼 것이냐 아니냐의 논쟁인데, 결국 한족 국가가 멸망해서 이제 세상에는 중화, 문명이 더 이상 조선밖에 없다는 황당한 자주 의식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당시 조선에서의 18세기 사상이라는 점은 너무 어이없다. 서양에서는 이 시기에 인간 이성을 예찬한 계몽사상이 발전하는 시기인였다.

이런 병적인 중화주의, 자민족중심주의는 예술에도 영향을 끼쳐 진경산수화라는 장르를 낳게 됐고, 이후 김홍도, 신윤복 등으로 이어진다.

창의문(彰義門). 자하(紫霞)가 많이 껴서 자하문이라 불리기도 했다. 북소문이지만 북대문인 숙정문이 늘 닫혀 있어 북쪽으로 연결되는 주요한 문이었다.창의(彰義). 義를 밝힌다, 義를 드러낸다는 뜻의 이 문을 지나서 인조반정의 무리들이 광해군을 타도하고 새 정권을 세웠고 이 문의 누각에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기념하여 새겼다. 결국 선조와 더불어 조선시대 최악의 군주인 인조와 그 무리들이 집권하면서 이 땅의 민중들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고통을 겪고 50만명이 청으로 끌려간다.

                       일제때 사라진 돈의문(서대문) 성 밖의 모습

위의 두 책은 언젠가 소개 글을 읽었던 적이 있다. 1900년대 초기 조선의 모습을 서양인들이 기록한 서적이다. 이 중 한명은 대원군 집안의 묘를 도굴하기도 했다.

             도성안의 방위와 치안을 책임지는 삼군문의 관할 구역 지도
그 밖의 주변 경기지역은 서북쪽이 총융청, 동남쪽은 수어청이 담당했다.

낙산은 낙타산의 줄임말이다. 성의 건설은 태조 때 돌과 흙으로 엉성하게 건설했었는데, 세종 때 전부 석성으로 수축했고 다시 숙종 때 지금처럼 사각형 모양의 돌로 단단히 쌓았으며 순조 때 다시 손을 봤다.

조선 전기까지 있었던 향, 소, 부곡에 거주하는 천민들은 농사 외에 나라에서 필요한 귀금속과 철, 종이, 실, 먹, 도자기 등의 다양한 물건들을 만들면서 통행의 제한과 양인들보다 더 심한 세금과 부역을 담당하고 있어서 성의 건설은 주로 농한기에 양인들을 끌어와 부역으로 강제적으로 동원해서 시켰다.

궁궐의 건설은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쪽 사람들이 맡았고, 도성은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와 국경 인근을 제외한 서북과 동북쪽 사람들을 동원해서 시켰다.

농한기는 주로 겨울이어서 추운 날씨와 이들의 대규모 숙식도 큰 문제여서 매우 열악했을 것이다.

그래서 도망자와 사망자도 꽤 있었던 것 같다. 도망가면 추적해 잡아와서 매질을 가하였고, 두 번 도망가면 죽임 즉 참수형에 처하였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면 그 지휘자는 매질과 문책을 당했고, 16명이상이면 매질 후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당시 백성들의 고통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이런 피와 땀의 고통 위에서 한양도성은 건설된 것이다.

그리고 사용된 돌과 목재도 세종 때는 도성 근처에서 채굴하지 못하게 해서 주로 노원과 과천쪽 에서 채석하여 공사가 지연되고 사상자도 많이 발생하자, 도성 인근의 정릉 부근과 창의문 혜화문(동소문) 주변 등으로 채석장을 확대하였다. 낙산에 올라서 동쪽을 봤더니 건너편 언덕위에 집들이 있고 그 아래에 큰 암벽이 채석된 것 같은 모습이 보였는데, 아마도 그곳 역시 당시 이용된 채석장일 것이다.

                                         낙산 동쪽 성밖의 모습

좌로 부터 안산, 그리고 내사산인 인왕산과 북악산에 둘러싸인 도성 안 서울 시내 모습.
서울대병원 뒤의 숲 지역이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고, 그 뒤쪽 너머가 정궁인 경복궁이다.

               내사산인 북악산과 진산인 북한산에 둘러싸인 서울 시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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