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 재경 제주사회문제협의회 대표

[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제주 4.3은 잊혀진 역사가 아니며 대한민국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제 4.3은 역사적인 평가를 통해 올바른 正名을 기다리고 있다.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의 전개과정

오랫동안 제주 사람들에게 4.3이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섬찟 놀라는 큰 트라우마 같은 것이었다.

오랜 기간 누구의 입에도 올리지 않았던 금지어. 제주지역의 과거 4.3 참여자들은 피해의식 때문에 그렇다쳐도 심지어 희생자의 유가족들조차 아무런 언급도 못하고 입 막고 숨죽여 지내던 시기에 처음으로 1978년 현기영 선생님이 소설 '순이삼촌'의 출간으로 침묵을 깼다. 그 직후 학자, 예술가, 사회운동가, 기자, 일반인 등으로 구성된 일부 재경 어른들과 젊은이들이 모여 「제주사회문제협의회」(약칭 제사협)를 구성하여 몰래 제사도 지내고 토론도 하였다.

그 후 제사협은 재경 대학생들과 함께 외지 대기업만을 위한 탑동매립 반대 투쟁, 모슬포 군사기지 반대 투쟁, 제주 종합개발법 반대 투쟁 등을 선도적으로 이끌었고, 또한 최초로 공개적으로 제주 지역사회에서 4.3을 조사 연구하는 「제주 4.3연구소」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제주 4.3연구소」의 일부 헌신적인 상근자들의 현장 조사 활동이 시작되었는데, 이 당시만 해도 제주 지역에서는 4.3 참가자나 유가족조차 찾아가면 피하거나 부정하는 분, 피해를 볼까봐 왜 찾아왔냐고 화를 내는 분들이 주를 이뤄 조용한 침묵만 흘렀다. 그후 「제주신문사」와 「제민일보」가 4.3 특별연재를 하면서 조사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활동들이 자극제가 되면서 4.3 50주년을 맞이하여 특별법 제정을 위한 활동을 서울의 제사협이 다시 견인하고 제주 지역이 가세하면서 4.3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기 위한 공개적인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2000년 1월 드디어 「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후 4.3은 희생자, 행불자 등을 신고 접수하고 조사하면서 유가족회의 구성과 4.3평화공원 설립과 재단 등도 구성되었다. 70주년을 맞는 2018년에 다시 특별법의 개정 움직임과 정명 작업, 그동안 숨겨져 온 4.3을 우리 대한민국 역사에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과제에 서울지역의 젊은 사람들 「제주사름」과 제주 지역이 함께 열심히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우선 제주도를 역사적으로 살펴보자

제주는 왜구의 노략질에 오랫동안 시달려왔다. 고려 말부터 왜구의 노략질(왜구는 주로 쓰시마 출신들) 때문에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섬에 살면 세금 납부와 역을 피한다는 이유로 空島 정책을 취했지만, 제주도는 큰 섬이라 예외였다.

탐라국은 1105년 고려(숙종 10년)에 복속되었고, 고려 중기이후에는 군사 쿠데타정권이 원에 의해 제거되면서 계속 권력을 유지하려는 일부 군부 잔존 세력이 대몽항쟁이라는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진도 등지를 거쳐 제주에 들어와 제주 땅에서 성을 쌓고 2년간 마지막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제주는 화산섬이어서 토양이 밭농사만 가능하고 바람과 비로 인한 거친 날씨 때문에 생활이 힘든 환경이었고 조선시대에는 귤과 사슴, 전복 등의 해산물, 말이라는 특산물이 나오기 때문에 도민들에게는 또한 더욱 고통스러웠다.

租庸調 중 役이 무거운 부담이지만 특산물이 나는 섬과 같은 독특한 지역은 調가 또한 더욱 큰 부담이었고,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와 가까워서 그들로 인한 피해와 군역도 컸을 것이다. 그래서 제주민들 중 일부는 제주를 떠나 남해안을 떠도는 유민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일부는 약탈하는 즉 해적이 되었고, 중앙 정부는 제주민의 유출을 강제로 막으려 했다.

제주민들의 탈출은 조세와 역, 특산품과 말 등의 공급에 차질이 있을 수밖에 없어 인조 때부터(1629년) 출륙 금지령이 내려졌고 순조 2년(1802년)에 와서야 해제되었으니 그 고통은 매우 심각했다.

조선은 성리학적 가치위에 수직적 계급 사회인데 왕족과 사대부만을 위한 세상이었다.

노비와 八賤 상놈들(광대, 공장, 백정, 기생, 무당, 승려, 상여꾼 등)과 양인을 포함한 민중들의 삶은 처참했다. 그 중에서도 노비는 반인반물(또는 육인사물)이라 해서 일하는 마소보다 못했다(노비의 숫자는 인이 아닌 구(口)였고, 노비 2~3인 몸값=말 1필)

즉 서구 중세에서도 노예를 '말하는 도구'라 칭했지만, 조선에서도 인간이 아닌 노동하는 도구일 뿐이어서 매매, 상속, 증여, 임대, 저당이 가능했고, 국가에서는 금지했지만 주인의 폭력이 묵인되었다.

17세기말경에는 노비가 기타 상놈들을 포함하면 그 최대 수효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에 도달하다가 이후에 감소했다(18세기이후에는 국가의 증세, 그리고 상품유통 및 화폐경제의 대두로 인한 상업의 발전 이유 때문에 약 30%로 감소)는 글들이 있다. 적어도 조선 중기에는 공노비 사노비의 합계 수치가 조선 인구의 절반이상을 차지하였고 그들 중 일부는 당시 과중한 역을 피해 섬으로 숨어드는 避役의 요소까지 고려하면 제주도 역시 인구 중 공·사노비의 비중이 매우 컷을 것이라는 점은 짐작 가능하다.

이렇게 전체 인구 중 노비의 비중이 높아 조선의 소위 대다수 백성들의 신분적, 경제적 상황이 비참했다. 그래서 흉흉한 민심은 민란으로의 방아쇠가 당겨지기만을 기다리며 심지어 은밀하게 양반 주인을 죽이려는 검계, 살주계까지 형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서 양인 역시 노비와 경제적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아 자신과 가족을 스스로 파는 自賣 현상이나 양반집에 먹는 것을 안정적으로 기대려고 스스로 노비로 들어가는 投託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제주도 특유의 척박한 기후와 토지 환경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파견 온 지방관의 탐학과 서리들의 부패, 그리고 가혹한 세금과 부역, 특산품의 공출을 위한 힘든 노동은 한계점에 도달할 때마다 폭발했다. 그래서 제주도는 조선시대에 민중들의 난, 즉 민란이 많이 일어난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의 많은 제주도 민란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1813년(순조 13년)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탐욕과 횡포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양제해의 난이 있었다.

그리고 1862년(철종 13년)의 임술민란도 진주 민란보다 더욱 진일보해서 지방관의 탐학이 아닌 지나친 세금에 항의함으로써 국가의 근간에 도전했다.

수만 명의 시위대가 3차 봉기까지 이어지면서 뇌물을 착복한 관리와 부호들의 집을 때려 부수고 불을 질렀고 도망친 목사를 대신해 행정까지 맡았고 부패한 서리들을 처단하였다. 물론 이 민란은 제주 성까지 완전히 장악했지만 제주의 독립이나 국가를 뒤집어엎는 혁명이 아니어서 다음 해 중앙의 안핵사가 오면서 목사의 함경도 유배와 부패한 관리들의 처벌, 난의 지도부(강제검 등 22명의 梟首)가 처형되면서 종결되었다.

1898년에도 조세 문제로 남학도인 방성칠 등에 의한 민란이 일어나 독립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내분으로 인해 진압되었다.

그밖에도 뒤이어 1901년에 탐관오리들에 의한 온갖 다양하고 과도한 세금 징수와 천주교와 프랑스 신부들의 힘에 의지한 불량한 천주교 신자들의 테러와 습격, 총격질 등에 반발해 노비 이재수를 장두로 한 반외세적 성격의 민란이 제주를 다시 완전히 장악해 휩쓸었다.

육지지역과 떨어진 지역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강한 공동체 의식과 가혹한 민중 수탈에서 기인한 제주도의 항쟁 전통은 일제 시대에도 1918년 스님들과 약 700명 민중의 무력 항쟁인 법정사 항쟁,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차에 걸쳐 조천리 미밋동산과 조천리 장터에서 일어나 조천과 인근의 함덕 신촌 신흥리 주민들이 가세해 일으킨 조천 만세 운동, 그리고 제주도의 특징적인 해녀와 어민들의 항쟁 등으로 대표된다.

1932년 1월부터 3개월간 연 인원 1만 7.000명이 참가한 국내 최대의 여성 항일투쟁이자 어민 항쟁인 해녀항쟁은 구좌읍과 성산포 지역의 해녀들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의 턱없이 낮은 해산물의 독점적 매입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되었다.

제주 잠녀항쟁을 주도한 해녀 5인이 졸업한 하도 강습소 졸업사진. 해녀 시위의 배후로 지목해 야학교사들을 모두 체포하자 세화리 순사 주재소를 습격해 건물을 박살내는 2차 시위가 시작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징병, 징용, 강제 노역, 곡물뿐만 아니라 금속 살림살이 등에 대한 철저한 공출 등으로 도민들은 기아 상태에 내몰려서 야산의 온갖 풀까지 뜯어 먹으며 연명하게 된다.

미군의 반격으로 일본은 옥쇄작전에 들어가면서 오키나와뿐만 아니라 제주도도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계획하고 한라산부터 해안까지 섬 구석구석에서 요새화를 위한 건설작업을 하였다.

비행장과 대공포 진지, 땅굴, 참호, 잠수함 기지 등의 동굴 등을 건설하면서 어린아이에서 부터 노인들까지 강제 대규모 노동력 동원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손꼽아 기다리던 해방이다.

그러나 제주도의 인구는 징병 징용자, 해외 거주자 등 약 6만명 정도가 돌아오면서 인구는 대폭적으로 증가하여 대규모 실직과 생필품 부족, 극심한 흉년, 콜레라도 창궐해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해방과 함께 제주도민들은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꿈에 부풀어 올랐다.

우선 자치 정치 기구의 구성과 자주 교육의 실시를 목표로 마을마다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면, 리 단위까지의 투표를 통해 미군이 진주하기도 전에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건설하였다.

제주 민중이 주력한 또 하나의 목표는 자주교육운동이었다.

1946년까지 1년 동안에 27개 학교와 수많은 강습소 등이 세워지는데 교사들의 상당수는 일본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이었다. 그리고 제주신문도 창간되었다.

이를 통해 자치 의식과 민족 의식을 고양시키고, 학생들은 자치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였다.

미군은 9월 말 항복 접수팀을 시작으로 1945년 9월 28일 제59연대가 제주도에 진주하였다.

어려운 경제 상태에서 미군정은 곡물 수집정책과 귀환자의 재산 압수 방침으로 도민들의 반발을 초래하였고, 그리고 점령지 통치기구의 구축에 착수하면서 그 방법은 일제 식민지배 기구의 계승이어서 행정직과 경찰직에 일제 때의 인사들을 군정 관리와 군정 경찰로 복귀시켜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제주도는 육지와 달리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입법의원 선거에도 참여하여 유연하게 민중 자치와 자주교육을 확립해 나가고 있었는데, 1947년 3.1절 시위는 자치 권력을 탄압하는 미군정과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자치 투쟁과 생존권 투쟁에서 반제자주와 평화항쟁으로의 전환점이 된다.

제주북국민학교 운동장에서 행해진 3.1절 기념식은 미군정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제주 역사상 최고의 인파인 3만명이 모였다. 기념식후 인근의 관덕정으로 향하던 행렬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 애가 다쳐 쓰러졌는데도 그대로 지나치자 그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고, 부근의 경찰들이 총을 쏘면서 단순 구경꾼인 주로 여자와 어린 애 6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미군정은 목포에서 100명의 군정 경찰을 증원받아 대대적인 체포와 구금을 한다.

제주도 민심은 더욱 악화하면서 관공서와 경찰까지 포함한 제주 전체 직장과 상가 중 95%가 참여하는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3월 12일부터 19일까지 8일간 일어났다. 미군정과 우익은 이 기회를 제주도의 좌익 인사들을 일망타진하는 계기로 삼아 군정청과 미군 사령부 인사의 파견, 400명의 군정 경찰을 증파하면서 강경 탄압이 극에 달한다.

강경 진압에 박경훈 도지사가 항의의 표시로 사임하고 민전에 가입하자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극우파들로 행정기관을 개편하고, 극우 서북청년단을 제주도에 파견하면서 제주의 상황을 좌, 우의 대립으로 몰고 간다.

서북청년단은 지독한 테러와 횡포, 강간, 구금 등을 자행하면서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으로 도민들에게 극도의 반발과 증오심을 초래하였다. 경찰의 고문에 따른 3건의 고문치사 사건도 발생해 민심은 폭발직전의 상황으로 변해갔다.

'탄압이면 항쟁이다'

미 군정은 제주도를 도민 중 70%이상이 좌익인 '빨갱이 섬'으로 단정해서 '제2의 모스크바'라고 규정하여 남로당 조천지부 비밀 모임을 습격하여 48년 1월 22일 106명을 체포하였다.

2월에도 도민들의 시위와 경찰서 공격 등을 계기로 미군정, 경찰, 서북청년단은 290명을 체포하고 무자비한 탄압과 억압을 자행하자 도민들 사이에도 이들 기관을 공격하여 바로잡자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남로당 내에서도 온건파와 강경파간의 노선투쟁이 벌어지면서 '신촌회담'에서 강경파가 득세했는데 3월에 다시 6일과 14일 경찰의 고문으로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남한만의 단독선거 저지'를 통한 '자주독립통일국가의 수립'이라는 목표와 함께 산으로 들어가면서 항쟁은 시작된다.

당시 산에 올라간 사람들은 약 300-360명 정도였는데 48년 4월 3일 새벽 1시에 한라산과 제주 지역의 89개 오름에 일제히 봉화가 오르면서 산 밑에 사람들과 더불어 약 1,500명이 도내 20개 경찰지서 중 10개를 공격한다. 경찰 지서 외에 서청 관사와 국민회와 대동청년단 등의 우익 인사 집을 선별하여 기습하면서 아래 호소문과 '시민 동포들에게!'라는 호소문을 배포했다.

그 호소문에서는 4.3항쟁의 목표가 민중 생존권을 위한 자위적인 것이며, 단독 정부를 반대하고 통일 독립과 민족 해방의 '민족 자주화 투쟁"임을 밝히면서 자신들의 적은 미제와 그에 빌붙은 주구임을 언급하였다.

이 당시 무장대의 무기는 빈약하여 일본군이 남긴 소총 28정과 권총 2정, 그리고 죽창, 칼, 사제 폭발물, 몽둥이 같은 것이어서 미군정과 경찰의 무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여서 그동안 3.1절 항쟁 이후의 민중들의 피해에 비해서 소극적인 보복 공격이었다.

이 항쟁이후 마을에 남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봉화를 올리거나 삐라를 뿌리는 평화적인 지지 투쟁이 계속 이어져 5.10 단선은 완벽히 저지 되었다.

오라리 방화 사건을 미군정이 사전에 계획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 사진을 다시 그린 그림.

방화하는 시간 미군정은 하늘에서 헬리콥터에 대기해 있다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동안 국방 경비대는 중립을 지켰는데, 미군정은 4월 27일 경비대의 진압 작전 투입을 결정하였으나 미군정의 허가를 받고 9연대장 김익렬은 무장대와의 대화를 통한 해결을 모색하였다.

4월 28일 구억 국민학교에서 김익렬과 무장대 총 지휘관인 김달삼 간에 회담이 열렸고, 회담은 성공적이어서 72시간 안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강경 진압을 통해 초토화를 원한 미군정은 제주시 위의 오라리지역을 경찰이 무장대로 위장하여 공격케 하고 또한 애월리 기습, 그리고 입산한 200명의 귀순자를 인솔해오던 군인들이 무장대로 위장한 경찰로부터 공격을 당하면서 4.28 평화회담은 깨졌다.

이후 5월 1일 미군정과 제주 도민들을 극히 혐오한 극우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과 김익렬간의 해결 방안을 둘러싼 격렬한 난장판 회의이후 김익렬은 보직이 변경되어 제주도를 떠나게 되고, 그 후 산 위의 무장대들은 이후 부임한 박진경 중령과도 협상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의 지휘관들은 무참한 학살의 만행을 저질러 4.3의 희생자가 약 3만명(물론 무장대로부터의 피해도 군과 경찰의 학살에 비해서는 작지만 존재한다)을 헤아리게 된다.

5.10 선거의 파탄과 함께 미 군함의 해안 봉쇄와 군의 대대적인 토벌이 시작된다.

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부터 다음 해 2월까지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했다. 해안마을에 소개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협조자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학살극이 자행되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몰래 산으로 입산하는 피난민이 늘었고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로 보내졌다. 이 4개월 동안 중산간 마을 95%가 방화로 인해 초토화되면서 마을 자체가 사라진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른다.

대부분의 집안이 먼 친척 하나라도 희생되지 않은 집이 없고, 어떤 가족들은 갓난애까지 앉은 채 거의 전 가족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학교 운동장이나 백사장에 불려나와 몰살당하기도 했다

토벌대 진압군은 중산간 지역의 마을들을 모두 불 태우고 해안가 지역으로 내려가라고 했지만, 제대로 통보를 못 받은 곳도 많았다. 집이 불에 타거나 무차별 진압작전에 겁먹고 무조건 군경을 피해 산간의 굴이나 숲에 숨은 사람들과 그리고 무장대를 따라갔다가 산을 내려왔지만 집이 불타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숨은 곳 등을 찾아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을 저질렀다.

그리고 군경은 자신들이 중산간 지역 마을을 불지름으로써 해안 부락에 내려온 가족을 호적을 대조하며 사라진 사람을 찾아 '도피자 가족'이라고 학살하였다.

무장대로 인한 피해도 군경보다는 현격하게 작은 수치이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처음에는 경찰과 악질적인 만행을 저지른 서북청년단과 같은 우익 청년단과 인사들에 대해 행해졌으나 48년 11월 이후 군경의 무차별 토벌이후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고 토벌대를 돕는 사람들까지 살해했다.

무장대 복장으로 위장한 군경은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쳐서 잠재적인 무장대 지원자를 찾아내기 위해 쇼를 해서 학살하기도 했다.

양민들 입장에서는 밤에 갑자기 들이닥친 무장대가 '반동분자'를 숙청하는 상황에서 무장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는데도 이런 위장 쇼까지 하면서 학살했다.

은신했던 약 120명의 마을 주민들은 훗날 발각되어 다시 살길을 찾아 15킬로 떨어진 영실 근처 볼레오름으로 숨었는데 토벌대의 추격으로 대부분 정방폭포로 끌려가 학살되었다.

제주도의 수많은 대량 학살 유적터 중의 하나

철모르는 어린 애를 양과자로 몰래 꼬여서 도피한 부모나 형제들이 숨은 곳을 묻고 학살한 경우도 많았다.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집창 훈련 중인 대한청년단 단원들, 무장대로부터의 공격을 막기 위한 돌담 건설을 강요받아 쌓는 주민들, 남제주군 민보단 간부 수련회 모습, 관덕정 앞 광장에 매달린 무장대 총책 이덕구 시신, 보초를 서는 여성 민보단원, 무장대 습격을 막기 위한 돌담

무장대에 대한 동조자를 가려내는 심문.

학살 등의 무시무시한 결과가 이어진다.

대학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양민들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쓴 의로운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도민들은 그들의 행위에 고마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

문형순 경찰서장, 조남수 목사, 남원 신흥리 김성홍 구장 등

이들은 그 후 연좌제로 인해 가족들 모두 고통을 겪는다. 그런데 현재 이러한 기록도 안남은 사람들은 앞으로 있을 수도 있는 배상에서도 근거가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1914년 생인 할머니는 49년 1월 12일 한밤중에 갑자기 날아든 총탄에 아래턱을 맞아 평생 무명천으로 턱을 감싸고 혼자 사시다 2004년 돌아가셨다. 턱이 없어 말도 못하고 음식도 제대로 못 씹어 늘 위장병과 영양실조 상태로 1주일에 이틀은 병원에 가시는 한 평생 후유증과 트라우마를 가지고 사셨다. 돌봐줄 사람이 없어 언니가 사는 동네로 옮겨 선인장 열매나 톳을 따거나 품팔이를 하면서 사셨는데, 평생 음식 먹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고 늘 무명천을 감싸고 사셨다.

사시던 집을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보존하고 있다.

제주도는 약 3만명이라는 대규모 희생자와 행방불명자들로 인해 많은 원혼을 달래는 민간 신앙으로서 굿들이 열렸고, 많은 마을들이 같은 날 동시에 마을 주민들이 대량 학살을 당해서 제삿날이 같은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같은 날에 시골 마을의 굴뚝에서 제사음식을 만드는 연기가 이곳저곳에서 피어오르기도 했다.

2000년 1월「제주 4.3특별법」이 비로소 50년 이상 지나 김대중정부 때 제정 공포되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과 유골 발굴 수습 등의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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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이 마을도 당시 300명이 넘는 큰 희생자가 있었음에도 과감히 다시는 서로 갈등을 되풀이 하지 말자는 뜻에서 이 비를 세웠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이제야 비로소 지극한 슬픔의 땅에 지극한 눈물로 지극한 화해의 말을 새기나니. 지난 50여년이 길고 한스러워도 앞으로 올 날들이 더 길고 밝을 것을 믿기로 하자.(중략)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한번쯤 여기 와서 고개를 숙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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