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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벤치에 앉으면 떠오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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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벤치에 앉으면 떠오르는 사람들
  • 제주투데이
  • 승인 2018.07.26 0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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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한솔제지 퇴직. 트레킹작가. 세계 10대 트레일 완주

[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영철/ 한솔제지 퇴직. 트레킹작가. 세계 10대 트레일 완주/ 저서 4권/ 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 동해안 해파랑길/ 영국을 걷다/ 투르 드 몽블랑

일랜드 위클로우 지방의 글렌맬류어 롯지는 앞마당이 노천카페다. 야트막한 산과 강을 끼고 있어 아늑하다. 롯지 1층은 레스토랑 겸 카페이면서 2층 전체는 숙박용 객실로, 가족 전체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낮에는 대부분 손님들이 실내를 마다하고 전망 좋은 노천카페에 앉아 식사하거나 음료를 마신다.

실외 테이블 옆에는 별도의 벤치도 따로따로 몇 개 놓여있다. 식사를 마치고 테이블을 벗어나 잠시 벤치로 옮겨 앉으면 누군가와 함께 있는 듯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벤치 등받이의 조그마한 동판에 쓰인 글귀 때문이다.

In memory of Peter Gorey(1951-2001)

who loved to walk these hills.

이 마을 언덕을 즐겨 걸었던 사람,

피터 고레이를 추억하며.

어두워지면 반대로 1층 실내는 시끌벅적하지만 노천카페는 조용해진다. 하얀색 건물 벽에 걸린 꽃바구니들이 가로등 불빛과 밤하늘 달빛에 어울려 주변에 운치를 더해준다. 낮에 앉았던 바로 옆 벤치에 살며시 앉으면, 누군가에게 등을 기댄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역시, 등받이에 붙은 동판의 글귀 때문이다.

In memory of Brigid Brady

who loved this place.

Come sit with me.

나는 브리짓 브레디,

이곳을 사랑했던 사람이에요.

여기 나와 함께 앉아요.

세인트비스는 잉글랜드 북부의 서쪽 해안마을이다. 사우스헤드와 노스헤드라는 두 개의 절벽이 마을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다. 기다란 백사장이 끝나는 지점부터 두 절벽은 연이어진다. 남벽인 사우스헤드 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은 꽤나 가파르다.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 아이리시 해의 거센 파도가 몰아치고, 반대편 푸른 초원엔 하얀 양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절벽에 막힌 바닷바람이 급격히 솟구쳐 오르며, 절벽 위를 걷는 이들에게 화풀이 하듯 거세게 휘몰아친다.

등 뒤로 세인트비스 마을이 사라질 즈음인 남벽 중턱에 이르면 기다란 벤치 하나가 반겨준다. 배낭을 내려놓고 긴 호흡 두세 번 내쉬고 나면, 멀어지고 희미해졌던 세인트비스 마을과 해안선 정경이 조금은 더 또렷해진다. 잠시 한숨 돌리고 배낭을 짊어지다 보면, 의자 등받이 철판에 새겨진 몇 줄 문장에 눈길이 간다. 도시로 떠난 자식들이 하늘나라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세상 어디나 다 같은 모양이다.

In memory of our parents,

Maenne & Hanna Koehner

who lived in St. Bees for over 40 years.

저희 부모님을 생각해 주세요,

매인과 한나코너 두 분,

이곳 세인트비스에 40년 넘게 사신 분들이랍니다.

세인트비스를 떠난 지 십여 일쯤 지나면 노스요크 무어스 국립공원으로 들어선다. 영국의 황야인 무어 지역을 걷다가 잠시 농가 주택 몇 채와 농장 몇 개가 전부인 시골마을로 들어선다. 휴스웨이트 그린 마을 언저리에 기다란 벤치가 하나 있어 지나는 이들을 쉬어가게 한다.

배낭을 내려놓고, 한숨을 돌리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혹시나 하고 뒤돌아본다. 역시나 벤치 등받이에 동판 하나가 붙어있다. 15년 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어떤 여인의 자취가 여기 이렇게 남아 있다. 누군가의 아내였거나 누군가들의 어머니였을 한 여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모습도 오버랩된다.

Treasured Memories of IAN JEAL

Who Loved This Area. 1944~2001

이곳을 사랑했던 사람,

이안 질의 소중한 추억을 기리며

세인트비스를 떠난 지 15일째 되는 횡단 마지막 날, 드디어 북해 바다를 만났다. 파도치는 절벽을 따라 남쪽으로 마지막 걸음을 옮긴다. 숨이 차올라 올 즈음 역시 홀연히 벤치 하나가 나타나고 역시나 등받이 기다란 동판에 글귀 두 줄이 새겨져 있다. 이번엔 누구의 엄마 아빠인지, 엄마 아빠가 누구인지 이름도 없고 살았던 연도 표기도 없다. 담백한 사랑의 글만 남겼다.

In loving memory of our treasured mum and dad.

Together again and always in our hearts.

저희 엄마 아빠의 소중한 사랑을 기억합니다.

늘 저희들 마음속에 함께 있답니다.

아일랜드나 영국에서 먼 길을 걸을 때면 기다란 벤치를 자주 만나게 된다. 발걸음이 무거워졌다고 느낄 즈음 주위를 둘러보면 어디에선가 홀연히 벤치 하나가 나타난다. 한참 기다렸다는 듯이 어서 와 쉬어가라고 벤치가 손짓해 부른다. 잠시 땀 식히며 앉았노라면 등받이에 새겨진 두어 줄 글귀가 저절로 떠오른다. 그리곤 낯선 이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어떤 삶을 살았을까.

서로 얼마나 그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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