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남형/ KAIST 영양생리 연구실장, 한국식품연구원 책임연구원, (주)에그바이오텍 대표이사, (주)애드바이오텍 연구소 소장

1. 서언

신약성서 속에 들어 있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4복음이라 하고, 성서에 들어 있지 않은 도마복음을 제5 복음이라 부른다. 도마복음은 1945년 이집트의 나그 함마디(Nag Hammadi)에서 발견된 영지(靈知)주의 문서들 속에 들어 있었으며, 1959년 학자들의 공동번역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도마 복음은 예수사상이 불교사상, 그 중에서도 볍화경의 불성내재론과 흡사하다는 것이며, 예수가 한 이야기들 중 많은 부분들이 유대 전통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인도의 베다나 우파니샤드 혹은 베단타 등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기존 기독교 사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부각시켰다.

도마복음 강의는 2천년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도마 복음의 비밀을 오쇼 라즈니쉬( Osho Rajneesh)가 파해친 내용으로 박노근에 의해 번역된 복음서이다. 순서 없이 흥미 있는 내용부터 읽어 보기로 한다.

2. 제15장 궁극의 시(詩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것 위에 비치는 빛이다.

나는 전체다.

모든 것은 나에게로 돌아 왔다.

나무를 쪼개보라. 거기에 내가 있다.

돌을 들추어 보라.

그러면 거기에서 너희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왜 이런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 민족에게 속하지 않는 것인지?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대답을 못한다. 그는 어디에서 낯선 가르침을 베웠는가 ?

예수의 이 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의 우파니샤드를 알아야 한다. 뿌리가 거기에 있다. 예수의 이와 같은 말을, 이와 관련된 기록을, 구약성서나 다른 유대전통의 기록들에서는 전혀 찾지 못한다.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예수는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유대인으로 살았고, 유대인으로 죽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육체에 관한 사실일 뿐이다. 그것을 제외할 때 예수는 순수한 힌두인(인도)이었다. 왜냐면 우파니샤드 종교의 바탕이 곧 그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베단타에서는 말한다. “신은 창조물이다. 신과 창조물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그는 시인이 시를 창조하는 것처럼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그 관계는 마치 춤추는 자와 춤의 관계와 같다. 그들은 하나가 된다. 춤추는 자가 정지하면 춤은 사라진다. 그리고 춤이 사라지면 그는 더 이상 춤추는 자가 아니다. 우주는 분리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이다. 우주는 시간 속에서 창조되는 것도 아니며 시간 속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매순간 창조된다. 왜냐면 그것은 신의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움직이고, 노래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신은 창조된다. 매 순간 그는 창조하고 있다. 창조는 그의 움직임이며 춤이다" .

이것이 바로 우파니샤드에서 “아함 브라마스미 (Aham Brahmasmi) 나는 신이다”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이러한 비밀을 알게 된 구도자는 “나는 신이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아무도 이것을 신성 모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의 진리인 것이다.

유태인은 절대로 “나는 신이다”라고 말 할 수 없다. 신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 일개의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겠다는 것, 노예가 주인이라고 우기는 것 등은 그들에게는 에고이즘인 것이다. 베단타에서는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이 유태교와 이슬람교에서는 에고이즘이 되는 것이다. 베단타에서는 이것이 에고이즘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면 “나는 신이다”라는 느낌은 ‘나’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가 사라지고 에고가 떨어져나갈 때 그때, 그대는 자신이 전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수의 주장은 우파니샤드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나와 이 존재계는 둘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不二법이기도 하다. 그대들은 어디를 가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나를 발견할 것이다. 형태는 다를지 몰라도 나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라는 뜻이, 나무를 쪼개보라 거기에 내가 있다. 돌을 들추어 보라 나 또한 거기에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모든 것 위에 비추는 빛이다. 예수는 그 자신을 하느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는 자신을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전체이다. 나는 신이다. 그 아들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기독교 성경에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도마복음에서는 “나는 하느님이다. 하느님 아들이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이 근원이요.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오고 모든 것이 나에게로 돌아 온다.” 이것은 순수한 베덴타이다. 그밖에 다른 곳에서는 이런 말을 발견할 수가 없다.

우파니샤드에서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한 말이다. “ 나는 전체이다. 모든 것의 근원이다. 모든 것은 나에게서 오고 모든 것이 내 안으로 녹아든다. 너의 에고를 던져버리고 내 발 아래로 오라.” 예수가 한 말은 크리슈나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과 똑같다.

3. 제5장. 가장 이상한 말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금식을 행하면 너희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자선을 하면

너희는 너희의 영혼을 사악하게 할 것이다.”

이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는 것은 인간이 진실되지 못하고 거짓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거짓된 인간은 그가 어떤 행위를 해도 허위일 수밖에 없다. 그대가 기도를 한다 해도 그대는 잘 못된 이유를 가지고 기도를 한다. 그대 자체가 잘 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무엇이 올바른 행위일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올바른 존재가 되는 가에 있다.

존재는 그대 내면의 가장 깊은 정수를 의미하고, 행위는 그대가 하는 표면적이고 주변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행위는 바깥세상과의 관계를 의미하고,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 관계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는 그대 내면에 있는 본래의 자기를 의미한다. 존재 없이는 살아 있을 수 없다. 행위는 이차적인 것이며 없어도 되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 하는 일 없이 비활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존재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존재는 아주 본질적인 것이다. 예수, 크리슈나, 붓다 이들 모두는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절, 교회, 사원, 조직, 종파나 종교지도자들은 모두 행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죄란 무엇인가? 예수의 용어에 의하면 죄란 극단적인 것. 극단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한 가운데 머무는 것만이 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극단적인 것 속에서 그대는 반은 선택하고 나머지 반은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란 전체이다.

단식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적으로 마음은 극단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음식을 탐하는 사람은 쉽게 단식할 수 있다. 그러나 늘 균형 있는 식생활을 해 온 사람은 단식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 이유로는 단식에 대한 생리학적. 심리학적 측면을 살펴봐야 한다. 생리학적 면에서 필요 이상으로 살이 쪘기 때문에 단식하기 쉬운 것이고, 심리학적으로는 단식을 통해서 다시 음식 맛을 느끼며 다시 먹을 수 있고 식욕이 되돌아온다. 불교에서는 극단적인 것을 피하고 중도사상을 강조하는데, 중도란 최적화(Optimization)을 의미한다.

기도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대개 기도를 무엇을 구하는 것, 무엇을 요구하는 것, 무엇을 불평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원하는 것이 있고, 신은 그것을 이루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대는 무엇을 부탁하러 신의 문 앞으로 간다. 이런 기도는 구걸 행각이다. 이때 기도는 하나의 수단이 되며, 그대가 기도를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죄이다.

그리고 자선을 할 때도 잘 못된 이유를 가지고 베풀기 때문에 선을 행 할 수 없다. 불교에서 무 주상 보시 , 즉 자선했다는 그 자체 생각도 없는, 무언가 대가도 전혀 바라지 않는 나눔이 최고라는 의미이다.

4. 제2장. 평화, 그리고 불과 검과 전쟁.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을 분열시키고 불과 검과 전쟁을 주러 왔음을 알지 못한다.”

예수가 온 이래로 세상이 평화로운 적이 없었다. 그는 세상 속에 무언가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갈등과 분열을 만들었다.

그는 투쟁을 통해서 성장은 이루어진다고 한다. 싸움을 통해서 내면의 중심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 전쟁을 통해서 평화는 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그의 말을 해석하지 말라. 예수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의 비유이다. 기독교는 그의 말을 문자 그대로 취했고 요점을 놓쳤다. 그래서 크리스찬들은 손에 칼을 잡았고 쓸데없이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을 죽였다. 왜냐면 예수의 말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전쟁을 하는 교회, 십자군이 되었다. 크리스찬들은 이슬람교도들과 힌두교도들, 불교도들만 아니라 중남미 원주민들을 선교라는 미명 아래 학살을 자행했다. 그들은 어디서든지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핵심을 놓친 것이다. 예수는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가 말한 것은 이 세상의 검이 아니었다. 다른 세계의 검을 가져왔다. 검은 하나의 상징이다. 그대는 그 검에 의해 둘로 갈라져야 한다. 왜냐면 그대 안에서 땅과 하늘이 만나기 때문이다. 이 세상과 하늘나라. 그들은 그대의 내면에서 만나고 있다. 그대의 한 부분은 진흙과 먼지에 속하고 또한 부분은 신성에 속한다. 그대가 바로 만남의 지점이며, 예수는 그대를 조각내기 위해 검을 가져왔다. 그 검으로 그대를 자를 때 세상에 속하는 것은 땅으로 떨어지고 신성에 속하는 것은 신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불은 매우 오래된 회교의 상징이며 힌두교의 상징이기도 하다. 힌두교에서는 항상 내면의 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내면의 불이 완전히 타오르게 될 때 돌연 그대는 변형된다. 이 불은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불인 것이다. 특정한 온도에 이르면 갑자기 변형 된다. 영혼과 몸이 분리된다. 그 검이 쓰여진 것이다.

불교에서의 유체이탈을 의미한다. 이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투쟁이 필요하다. 그대는 싸워야만 하며 갈등과 마찰을 만들어 내야 한다. 마찰이란 말은 내면의 전쟁에 대한 알맞은 용어이다. 자기 자신을 정복한 사람, 자아 정복자는 내적 갈등이 없다. 전쟁은 끝났다.

5. 제6장. 길 잃은 양.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하늘나라는 마치 백 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와도 같다.

그 중 한 마리가 가장 큰 양 한마리가 길을 잃었다. 그는 아흔 아홉 마리를 그대로 두고 그 길 잃은 양 한마리를 찾아 나섰다. 지칠대로 지쳐 양을 찾은 후 그는 그 양에게 말했다. 나는 다른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

양의 세계에서 가장 큰 이란 뜻은 가장 좋은 것, 가장 우수한 것을 의미한다. 양은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떼지어 움직인다. 평범한 의식을 가진 군중을 의미한다.

인간은 신에게 도달할 수 없지만 신은 인간에게 올 수 있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신을 찾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준비하고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 첫번째 준비가 먼저 개인이 되는 것이다. 길을 잃는 일이다. 사회에 반역적으로 되는 일이다. 그래야만 그대는 에고를 얻을 수 있다. 먼저 군중을 초월해야 한다. 그것이 길을 잃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공식화되고 구격화된 제한된 영역을 가진 사회를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그대는 독립하게 되며 그다음에 에고를 버렸을 때 그대는 대양이 된다. 전체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신의 광대무변함이 존재한다.

역설적으로 신은 반역적으로 되는 자를 더 사랑한다. 예수는 길 잃은 양이었고 붓다도 마하비라도 길 잃은 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평범한 길을 가는 동안 예수나 붓다는 길을 잃고 신은 그들을 찾아 나섰다. 신은 그들을 향해 달려 온 것이다.

6. 결론

도마복음서에서 우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부분만

옮겨 놨다. 법화경에서는 일체중생 (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 하여 모든 사람들은 다 불성을 지녀 부처님이 될 성질이 있다고 설파한다.

불성은 인간이 날 때부터 나타납니다. 불성이란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해 존재하는 부처님의 종자입니다. 보통 삼인불성(三因 佛性)이라 하여 태어나면서 갖추고 있는 불성(정인正因), 배움으로서 그 불성이 발휘되게 하는 불성(요인 了因), 일상의 행동위에 스스로 실행해 보아서 그 실행에 의해 그것이 자기의 것으로 되어간다는 불성(연인 緣因)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이 앎으로 인해 크게 되고 실행함으로 인해 다시 커지고 이것이 완전히 갖추어지면 이른바 진정한 보살의 행이니 결국은 부처님 경지에도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의 불성내재론 입니다. 도마 복음은 예수사상이 불교사상, 그 중에서도 법화경의 불성내재론과 흡사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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