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고부자/ 전) 단국대 교수

하나.

제주. 50여 년 전 우리 집. 그때 우리 집 주소는 제주시 오라1동 2440번지였다. 주변이 널찍하고 산과 바다가 한 품, 한 눈에 안기는 최고의 명당 터였다. 우리 할아버지 제주 고을라(高乙羅) 78세손(世孫)께서 처음 터를 잡으신 곳이다. 사람들은 우리 동네를 ‘동산물’ 또는 ‘남새’라고 불렀다. 나 어렸을 때 여섯 성씨(姓氏)에 일곱 가구(家口)였는데, 1962년 육지로 나올 땐 아홉 가구로 늘었다.

우리 집은 큰 마당을 가운데 두고 ‘ㅁ’자 꼴[形態, 模樣]로 문간채, 안거리, 밖거리, 쇠•ᄆᆞᆯ마귀(외양간), 부엌2, 장독대2, 눌굽(낟가리터), 그밖에도 안거리 뒤 ‘우영(작은 터)’엔 작은 과수원까지 붙어있었다. 할아버지 집은 동향인 ‘안거리’, 우린 남향으로 앉은 ‘밖거리’에 한라산이 딱 정면으로 보이는 네[四]칸. 그땐 최고로 넓고 큰 집이였다.

오라리(吾羅里). 그 우리 집. ‘초집[草家]’은 지금 그 흔적조차 없다. 동네는 물론, 그때 그 사람들. 어른은 죽고, 젊은이들은 떠나, 누구도 그 곳에 없다.

둘.

우리 동네는 내(川)가 양쪽으로 둘이 있다. 한라산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250m쯤에 ‘뱅문내’, 오른쪽으로 150m쯤엔 ‘한내’다. ‘내’를 ‘내창’이라 불렀다. 이 두 내창은 제주목사(牧使) 이형상(李衡祥, 1653~1733년)이 1702~1703년에 제주를 순력하고 기록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병담범주(屛潭泛舟)>에도 병문천(屛門川)과, 대천(大川)으로 나와 있다. 이 내창들은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바위와 돌만 앙상한 ‘마른 내[乾川]’였지만, 군데군데 ‘태역밭(잔디)’이 있어 소나 말이 풀을 뜯어 먹기도 했다. 한내는 뱅문내 보다는 폭이 넓은 ‘큰 내[大川]’이며, 큰 바위가 있는 깊은 곳에는 마르지 않는 물이 있었다.

이 내창들의 시작[根源地]은 한라산(漢拏山) 백록담(白鹿潭)이며, 북쪽 제주바다까지 연결된다. 내창의 양쪽에는 밭들이 있고, 너비는 우리 마을 쪽에 있는 곳이 가장 넓었는데, 옛날 시골학교 큰 운동장만 했다. 우린 한내창에서 빨래와 목욕을 했다. 먹을 물[食水]은 육지처럼 우물이 없기 때문에 마을에 파놓은 ‘구룽(웅덩이)’이나 내창에서 여자들이 길어다 먹었다. 물은 어른은 ‘허벅’, 아이들은 ‘대바지’를 ‘대[竹]바구니’에 넣고 등에 지고 날랐다. 내창물 길러 다닐 때. 그 아슬아슬한 ‘행군(行軍)?’에 다행히도 넘어진 일은 없었다.

상상해 보라. 비나 논이 올 때면 맨땅 걷기도 힘든데, 어린 것이 대바지 지고, 불규칙한 엉덕과 돌 위를 걷는 모습을…. 휴! 지금 내가 이 만큼이라도 건장(健壯)한 것은, 버티고 사는 것은, 다 그때, 그럴 때 다져진 체력과 정신 덕분이리라.

먹는 물은 우리 동네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은 가물면 말라버리기 때문에 동산물을 길러다 먹었다. 빨래는 바로 아래쪽에 있는 길게 뻗은 ‘탁구코트’ 만한 웅덩이에서 했다. 이 물들은 아이들 최상의 신체단련장이기도 했다. 초등학교짜리들 남녀 가리지 않고 또래 서넛이 모이면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신나게 ‘골개비(개구리)헤엄’을 치며 놀았다. 어른들도 여름날 밭에서 일하고 저녁에 집으로 들어갈 때 ‘ᄆᆞᆷ ᄀᆞᆷ고(목욕),’ 여자들은 먹을 물 챙기기도 하는 곳. 제주 여자들 밭에 갈 때도 허벅을 지고 갔다. 몸 감고 올 때 먹을 물 긷고 와야 하니까.

셋.

동산물은 한내창에 있다. 다른 곳에 비해 양쪽 주변이 계곡처럼 깊은데, 냇[川]바닥에서 3∼4층 빌딩쯤 될 것이다. 조금 위쪽으로 버스터미널에서 공항으로 가는 다리가 있다. 이 다리에서 멀리 바닷가 쪽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이 물은 큰 군함 꼴로 남북으로 길고,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았다. 이 물 위쪽으로 허리처럼 잘록하고 폭이 좁은 곳이 있는데, 이상한 소문이 있었다. “물이 깊어 바닥을 알 수 없다, 용궁(龍宮)과 통한다. 일 년에 한번은 반드시 사람이 빠져죽는다. 비 오는 날은 여자 울음소리가 난다”는 거다. 그래서 혼자 빨래나 물 길러 가기, 특히 비 오거나 음산한 날은 매우 꺼려했다.

한내창 따라 40여분 북쪽으로 걸어 내려가면 ‘제주바당(바다)’에 이르는데, 이곳 바닷물과 맞닿은 곳에 ‘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깊다’는 ‘용수(龍水)’가 나온다. 이 용수를 『탐라순력도』의 <병담범주(屛潭泛舟)>에 ‘취병담(翠屛潭)’이라 했다. ‘제주10대 명승지’ 중 하나이며, 예나 지금이나 각종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바로 옆 바다에는 ‘용의 머리와 닮았다’는 ‘용두(龍頭)’와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다섯 명이 잠수(潛水)하는 장면도 있다. 옆에 ‘잠녀(潛女)’라 쓰여 있다. 제주에선 이 곳을 “용두암”이라 했다. 용머리 위에 올라가서 폼 잡고 사진도 찍곤 했는데, 태풍에 용의 머리가 파괴되어 지금 그 몰골이 말이 아니다.

넷.

나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농사짓는 밭 중에 고인돌이 두개나 있었다.

하나는 우리 집 ‘알렼밭’, 또 하나는 외가(外家) 밭이다. 알렼밭은 어른 키 한배 반만 한 높이로 우리 집 뒤쪽 200m 쯤에 있는 ‘돌담’과 붙어있었다. ‘알렼’이란 아랫쪽을 말한다. 외가 밭은 걸어서 15분쯤 가면, 동산물을 지나 조금 아래 서쪽에 있다. 그러니 두 고인돌은 동산물 계곡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있었던 셈이다. 두 곳 모두 돌무더기인 ‘베케’를 바닷가 쪽, 사람으로 치면 등 쪽으로 지고 있다. 정면이 살림집으로는 한라산 쪽 즉, 남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외가댁 것은 높이가 초가지붕 쯤 쌓여 있어 우린 그냥 베케인 줄 알았다.

왜 두 곳 베케가 모두 한라산을 등지고 아래쪽에 있는 건지, 그 잔 돌[石]들이 언제, 그리 그 위로 올라간 건지 궁금하다. 어쩌면 먹고살기에 각박했던 그들 삶의 현실과, 반면에 버릴 수 없는 조상들 삶의 흔적에 대한 경외(敬畏)와 공경심(恭敬心)에서가 아닐까.

알렼밭 것은 없어졌지만, 외가댁 것은 잘 있는지 모르겠다.

다섯.

1950년대 초등학교(그땐 ‘초등학교’라 했다) 다닐 때. 가을 곡식 걷어 밭이 비면 가끔 친구들과 알력 밭 그 엉덕 속에 들어가서 놀았다. 그 때 그 ‘엉덕’이 ‘고인돌’이었던 거다. 겉은 제주도 초가지붕처럼 둥글넓적하면서 가운데가 볼록하고 통통한 것이 마치 거북이가 목과 발을 집어넣은 것 같기도 했다. 제일 높은 곳은 작은 어른 키만 하고, 주변은 어른 대여섯이 팔을 두를 정도이다. 그 ‘덮게 돌’ 위에 어른 20명은 앉을 만했다. 돌 색은 거무튀튀하고, 위에는 ‘한해살이풀’이 자라기도 했다. ‘덮게 돌’은 땅과 거의 맞닿아 있고, 아래 땅에는 윗돌을 죽 돌아가며 크기가 소[牛]머리만한 돌들로 받혔다. 한쪽 사분의 일(¼)쯤은 남쪽 베케와 맞물려 있었고, 4분의 3쯤은 마치 ‘주먹코’처럼 밖으로 튀어나왔다. 안은 사람 너댓(4∼5인)이 둘러앉을 수 있을 만하고 아늑했다. 바닥은 평평하나 잔 돌과 흙이 울퉁불퉁 깔려 있었다. 천정은 아이들도 설 수는 없었지만, 앉아 있기에 충분했다. 밭침 돌 사이로 밖이 살짝 보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한라산을 정면으로 보는 편안한 분위기였다. “1948년 제주 4•3사건이나, 한국전쟁 때 공습공보가 올리면 그 속에 숨기도 했다” 한다.

그땐 그 속에서 아무것도 못 봤다. 나 어렸을 때 ‘고인돌’이란 이름은 배워서 알고 있었다만, 제주에도 그런 것이 있다는 걸, 그게 우리 밭에 있는 ‘그 것’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그 엉덕 없어진 후 지금도 그 통통하고 아담하고 귀여운 인상으로만, 아쉬운 맘으로만 남아있다. 철들어 알게 된 수 많은 고인돌들 중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들로는 우리 알렼밭 것 보다 더한 맛을 주는 것은 없다.

지금 그 알력 밭에서 500m쯤 되는 곳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다. 공항과 제주도 동서를 달리는 왕복 4차선이다. 그 엉덕 자리에 집이 들어섰다.

‘동산물 띠[帶]’는 제주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터다. 그 연구는 되어 있는가? 지금 공설운동장이 되어 버린 또 다른 우리 밭 ‘빌레(땅 속에 묻어 있는 바위)’에서 ‘굽 없는 붉은 색 토기’도 나왔다. 주변엔 ‘할망당(할머니 堂)’과, ‘하르방당(할아버지 당)’도, 가물면 없어지지만 ‘엉덕물’도 있었다.

여섯.

50여 년 전 일이다. 여름방학에 제주 집에 갔다.

어머님께서 “알력 밭 디(아래 밭에) 어떤 남자 덜 둘이 엉덕 속에 들어강 무싱건디 햄져(들어가서 무엇인가 하고 있다)”하신다. ‘엉덕’이란 넓게는 큰 돌이나 큰 바위를 말한다. 한편 바위 아래가 파이거나, 드나들 수 있는 곳도 된다. ‘알력밭디 엉덕’은 보통 말하는 엉덕과는 다르다.

궁금하여 알력밭에 갔다. 남자 둘이 엉덕 앞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남자들은 50대와 20대 후반 정도인 듯 했다. 밭 바닥에다 돌인지 쇠 같은 작은 것들, 세모 난 것도 있고 칼 같은 것들 몇 개를 늘어놓았다.

누구냐고, 무엇이냐고, 묻기라도 할 것을…. 그때만도 그저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다. 그때 한마디도 묻지 못했던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 철들어 대충 들은 소문으로 두 남자는 “00대 교수와 학생이고, 유물도 그 대학에 있다”는 거다. 지금도 삶이 급하고, 내 전공이 아니라 확인하진 못 했다. 연구 발표됐으리라.

숙제로 두자. 제주사람, 그 밭주인, 역사를 조금 공부한 학자라는 것만으로도 책임과 의무를 져야 하지 않겠는가?

일곱.

그 후 십여 년이 지났다. 다시 방학 때 제주 집에 갔더니 어머니 “어처구니없다”며 말씀 하신다. 하필이면 제주섬[濟州島]꼴처럼 옆으로 긴 우리 밭 가운데로 2차선 길이 났다. 농사지을 땅은 줄어들고, 웃밭 아래밭으로 두 동강이가 된 거다. 길이 났어도 그 때는 사람이나 차가 덜 다녔다. 그런데 아래쪽 밭에 있던 튀어나와 앉은 엉덕이 밭을 갈 때나, 씨를 부릴 때마다 어머니 신경을 건드렸다. 한 치, 한 뼘도 용납 못하는 우리 어머니. 더 못 참으시고 일을 내셨다. 어느 날 튀어나온 곳들은 망치로 부셔버린 거다. 언제, 어찌, 누가 알았는지, 아버지 이름 방송에 신문에 났다. 우리 집안 속내를 잘 아는 동네 이장이 달려왔다. “삼춘 무사 경 헙디가?(삼촌 왜 그리 하셨습니까?)”하더란다. 우리 어머니 좀 경우(境遇) 바른 어른이신가? “그리 중(重)한 거라면 미리 알려 주던가, ‘팻말’이라도 달아 둘 것이지. 무식한 농군 그게 중한 건 줄 아는가? 내 밭에 곡식 해먹겠다는데 뭐가 잘못이더냐고”호통. “듣고 보니 구구절절 삼촌 말씀 옳다”며 꼼짝 못하고 돌아가신 이장님.

여덟.

또 얼만가 세월이 지났다.

그 고인돌. 형태도 없어져버렸다. 어머님 말씀 “큰 기계(굴삭기) 왕(와서) 신체만체 어시(없이) 부서버렸져“는 거다. 길이 더 넓어졌다. 그 엉덕 부시고는 신문도 방송도 없었단다. 어디다 옮겨 놓기라도 할 것이지 원.

아홉.

‘무지렁이백성’ 한 일은 잘못이라고 신문 방송에 났다더니, 기계로 흔적도 없이 부셔버린 엄청난 유식한 나랏님들 한 짓은 소리 소문 없다. 공무원으로 퇴직하고 평생 남에게 군소리 한번하거나 들은 일 없이 부처님 반 토막처럼 살다 77년도에 68세로 가신 제주 고을라 79세손 우리 아버님, 99년도 86세로 가신 스승이요 신(神)이신 어머님. 칠남매를 바르고 크게 키우시던 우리 부모님. 그때 얼마나 놀라고, 망신스러우셨을까?

열.

제주 떠난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다. 가끔 옛 곳을 가보면 깜짝 놀란다. 그 좋던 것들이, 곳들이 파괴되고 없어져간다. 가장 가슴 아픈 곳은 제주시내 ‘탑바리(탑동) 그 앞 바당’이다.

공무원이셨던 아버님 덕에 영림서(營林署) 관사에서 일곱 살까지 살던 때, 어머니 바느질하는 앞에 앉아 징징대며 운다고 ‘자[尺]쪽’으로 얻어맞다가 ‘차롱착(바구니)’ 하나 들고 ‘피신?’가던 곳, 나 어린발로 걸어 10여분거리에 있던 그 바당. 바닷물 싸면(나가면) 먹을 물 긷고, 채소 씻고, 빨래하고, 더운 몸 씻던 그 곳. ‘먹돌생이(검은 잔돌)’ 뒤집으며 깅이(게), 보말(고동), 굼벗(군부) 잡던 탑바리 그 바당. 먹돌생이를 굴리며 쏴르르 내는 파도 소리하며, 물거품은…. 잔잔한 날이면 그 먹돌생이 사이로 일렁이는 일몰(日沒)은 어떻고….

내가 누구누구처럼 부자라면, 권력이 있다면 다시 그 때로 돌리고 싶은 곳. 오늘도 무지 무식한 나랏님들. 땅 팔고, 허튼 일들 하고나 있지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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