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주] 111년 전 여름이 2018년보다 더 뜨겁고 치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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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 111년 전 여름이 2018년보다 더 뜨겁고 치열했다
  • 제주투데이
  • 승인 2018.08.29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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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 C&C국토개발행정연구소 소장

[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백승주 박사/ 서귀포시 대정읍 출신으로 재경 대정포럼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고려대 지방자치법학연구회장과 C&C국토개발행정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올여름 한증막 폭염은 111년 만에 처음 있는 일대 사건이다. 더 짜증스런 폭염을 경험해 본적이 없기에 더욱 그렇게 비쳐졌다. 111년 전 1907년에도 이랬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대한제국 국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더욱이 에어컨 등 냉기를 뿜어낼 냉방기기가 없었기에 무던하게 세월을 보내야 하는 일상이 상책이었지 않았을까 우선 추측해 본다. 역사적으로는 전혀 풍요롭지 못한 삶의 질곡 속에서 일제 강점기로 진입하는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하루 연명하기가 전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현재 우리보다 더 짜증스러운 상황에서 영욕의 한 많은 세상을 살지 않았을까 한다.

역사적으로 1907년 여름이후 일제의 강제 병합을 위한 모사(謀事)들이 본격적으로 하나둘씩 서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한민족사에 천추의 한이 되는 36년이라는 쓰라린 악몽의 세월을 겪게 되는 1910년 강제합병을 위한 일련의 조치들 말이다. 특히 이준 열사 일행의 ‘헤이그 특사파견 사건’을 구실 삼아 대한제국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는 조치도 이루어졌다.

첫째, 1907년 7월 24일에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이완용’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본격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명문화하는 이른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를 근거로 일제는 통감으로 하여금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하게 하고 각 내각 부서에 일본인을 ‘차관’을 배치하여 대한제국의 행정을 통괄하는 소위 ‘차관정치’를 강행하였다. 특히 일제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을 비판하는 한민족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서 ‘신문지법’을 제정·공포하였다.

둘째, 1907년 7월 27일에 집회와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만들어 냈다. 이를 근거로 일제는 ‘황성신문’과 ‘제국신문’ 등을 폐간 조치했다. 일제는 의병을 토벌하거나 계몽운동 단체를 탄압하는 등의 만행 또한 서슴치 않았다.

셋째, 1907년 7월31일에 고종을 승계한 순종이 대한제국의 자위권 상실과 무장 해제를 상징하는 군대 해산 조칙을 내렸다. 이 조칙에 따라 “국사가 다사다난(多事多難)한 때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해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라는 명분을 내걸고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조치를 단행됐다. 이토 통감은 군대 해산에 따른 민심 동요와 대한제국군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제국군에 금족령(禁足令)을 내렸고, 화약과 탄약고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다. 아울러 일제는 본국에 군대 증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서울 이남의 수비를 맡기 위해 보병 12여단이 급파됐다. 13사단은 서울 이북 수비에 배치됐다. 서울에 위수사령부를 마련해 서울 지역을 담당하게 하는 한편, 인천에는 구축함 4척을 대기시켰다. 이어 시위대를 시작으로 한 달 여 남짓한 동안 서울과 지방의 대한제국 군대를 전부 해산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격분한 당시 해산 당한 대한제국군 소속의 군인들이 전국적인 의병활동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의병의 전투력과 조직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물론 일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1908년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강경노선의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일제 각의는 1908년7월 6일 대한제국을 ‘적당한 시기에 병합을 단행한다’는 방침을 정하는 수순을 밟았다. 그 방침에는 일제 헌병과 경찰관을 가능한 많이 대한제국에 파견하는 것과, 대한제국 내 일본인 관리의 권한을 확장토록 하는 조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첫째, 1908년 7월 12일에는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의 처리권이 일제에 위탁하는 소위 ‘기유각서(己酉覺書)’가 체결되었다. 이는 당시 항일 운동 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려는 의도에 따른 조치였음은 물론이다. 각서 교환 형식으로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빼앗음으로서 일제는 일반 경찰권까지 완전히 장악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경찰 체제는 일제 헌병 2,000명과 헌병 보조원 4,000명, 일제 경찰관 2,000명, 대한제국 경찰관 3,200명으로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는 사실상 대한제국의 경찰체제가 병합 목전에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1908년7월23일에 ‘데라우치’가 대한제국 통감으로 부임했다. 이후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갔다. 대한제국인의 옥내외 집회가 금지되었다. 일제는 경비 태세 강화령을 내렸다. 아울러 강제병합 발표 이후에 상황을 대처하기 위한 구체적인 경비 전략도 세웠다.

이처럼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 ‘데라우치’ 통감은 1908년 8월 16일 이완용을 만나서 일제가 마련한 ‘한일합병조약안’을 서둘러 강행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이완용은 1908년8월 22일 어전회의에서 조정대신들의 동의와 순종으로부터 허락을 받아냈고, 바로 그날 ‘데라우치’와 합병조약을 체결하였다. 물론 조약 체결 사실은 곧바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셋째,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철두철미한 계략에 따라 대한제국은 공개적으로 일제에 강제병합 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392년 태조 이성계로부터 27대 519년간 이어온 조선왕조는 사라졌다. 대한제국은 급기야 일제 식민지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즉, 1897년 근대 주권국가 형성을 목표로 세계만방에 알렸던 대한제국은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꿈을 접은 채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를 이름 하여 ‘경술년의 국치’라고 한다.

지금 2018년 대한민국의 여름도 전혀 예사롭지 않다. 폭염 기세 속에 최저임금제 논란 등으로 인한 민생문제가 크게 부각되는 가운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또한 크게 요동치고 있다. 한마디로 국내외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상황이 요동치는 가운데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정상화를 도모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111년 전후와 마찬가지로 소위 ‘4대강국’, 즉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한반도 주변에 진(陣)을 치고 있는 상황이 뚜렷하게 각인되고 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하여야 할 운명적 현안문제에 대하여 이들 또한 관계가 있다는 투로 보무(步武)도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제시하고 외교전선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계략 만들기에 골몰하는 형세다. 외교적 친소(親疎)관계 여부에 따라 이들 상호간에 ‘합종연횡책(合從連衡策)이 구사될 개연성 또한 크게 부각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여차하면 이들의 주판알로 자신들의 셈법과 계산된 논리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우려스러움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더욱이 우리를 긴장시키는 것은 이들 주변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 또한 111년 전의 그것과 비교하여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단지 100여년이란 시간적 경과를 제외하면, 여러 방면에서 유유상종(類類相從)한 전략적 실체들이 드러나 있는 형국이다. 어떤 것은 그제나 이제나 말할 정도로 매우 유사하다. 어떤 것은 우리의 국력에 비추어 그들의 행세나 위세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과도한 것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특히 남북한 대치상황의 극복을 위한 남북문제도 전혀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려 하고 있으나 예상외로 전혀 간단치 않을 뿐만 아니라 쉽게 결론날 것 같지 않은 모양새다. 정부 차원에서 국민적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데도 한계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비핵화 문제 또한 그렇다. 대통령의 통치권 차원에서 어떻게 한다고 하기보다는 특히 미국 대통령이 어떻게 처분하느냐에 달려 있는 이슈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일제에 항거하며 풍전노숙(風前露宿)하다가 여순 감옥에서 옥사하신 안중근 의사께서는 그의 유언장을 통해 ‘학문을 발전시키고 실업(實業)을 진흥시켜 자유독립(自由獨立)을 이루어 주기만 하면 여한(餘恨)이 없겠다’는 간곡한 유지(遺志)를 남겼다. 그의 사후(死後)에 대한민국이 어떻게 가야하고 어떤 위상을 견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유지를 몇 마디 유언장에 담아서 남겼다. 그러나 앞서의 현실 상황에 비추어 그의 유지를 충분히 받들지 못했구나 하는 자괴감을 갖기에 충분해 보인다.

만약 안중근 의사께서 당장 살아서 돌아와서 우리 면전에 선다면 2018년 여름 대한민국이 처한 정치·경제 상황이나 걷잡을 수 없이 만연된 사회병리 현상들을 보면서 노발대발 했을지 모른다. 우리를 나무랄지 모른다. 뭘 했냐고. 2018년 대한민국의 여름도 이제 태풍이 예고된 가운데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가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굳이 바라건대 여름이 가기 전에 왜 우리 모두는 111년 전 여름과 마찬가지로 단지 시공만 초월한 채, 줏대 없이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게 이렇게 허우적거려야 하는지를 뒤돌아보았으면 한다.

안중근 의사께서 유지로 남겼던 미래를 위한 학문의 발전도, 잘 먹고 사는 산업의 육성발전도, 국력의 신장도 유지를 잘 받들지 못한 채로 왜 이렇게 초라하게 되었는지 되돌아 봤으면 한다. 특히 이제나 저제나 외세에 마냥 의탁하여 허우적거려야 되는지를 꼼꼼하게 짚어 보았으면 한다. 111년 전 대한제국 선민(先民)들이 맞았던 여름과 2018년 대한민국 국민이 경험하고 있는 여름이 어찌도 이리 흡사하고 처절한지를 되새겨 봤으면 한다.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 속에 계속 진화해 나간다는 사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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