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성자/ 제주4.3연구소 이사, ‘육지사는 제주사람’ 회원

‘따라비오름’은 20년 전,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 마지막 오른 오름이다. 제주도에서도 특히 이 구좌읍 일대는 오름으로 겹겹이 둘러싸여서 ‘오름의 왕국’으로 불린다.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산 62번지, 남영목장의 광활한 목초지 억새벌판을 세 개나 넘어서야 모습을 드러내던 곳. 이 오름은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기로 입소문난 곳이다.

늦가을의 따라비오름에는 ‘섬잔대’ 군락지가 있어, 기슭에서 봉우리까지 보랏빛 잔대가 가을볕에 졸고 있었다. 이름이 주는 고운 어감과 꽃모양이 잘 어울리는 꽃이다. 봄의 제비꽃과 비슷하지만 이질에 효험이 있어서 ‘이질풀’이라는 이름이 붙은 꽃이나 꿀이 많은 ‘꽃향유’는 다른 오름에서 군락지로 만났을 때는 퍽 화려했는데 드물게 피니 애잔하고 초라해보였다. 자목련 봉우리처럼 생긴 ‘용담’은 뿌리 맛이 쓰다고 용의 쓸개- 용담이란 이름을 받은 꽃이다. 드물게 정상 가까이에서 발견한 씀바귀꽃의 은은한 금빛은 고려불화에서나 봄직한 색으로 눈을 오래 붙들었다. 가을 오름의 처연함을 아랑곳 않고 핀 ‘구름체꽃’은 구름을 모두락지게 모아 받쳐 든 모양으로 꽃보라색 ‘한라부추’의 빼어난 자태와 함께 청량한 가을하늘을 떠받들 듯 당당하였다.

들꽃이 많아 발걸음이 더디어지던 중 오름 정상에서 보랏빛 꽃무리 사이에서 함초롬히 피어난 물매화를 발견한 순간 가슴이 설레었다. 가을 들꽃들이 지친 보랏빛이나 마른 줄기로 가을의 처연함에 기울어져가고 있을 때, 촉촉이 물오른 줄기와 작은 연잎같은 초록 잎사귀 위로 하얀꽃을 피워내던 물매화. 무심한 듯, 초연한 듯 고고한 그 모습은 ‘오름의 귀부인’이라 불릴 만 했다.

(사진:김수오)

내가 가을에 따라비오름을 꼭 가고 싶었던 것도 ‘거기가면 물매화를 볼 수 있다’던 선배의 귀띔이 있어서였다. 언젠가 강요배 화가의 그림 <달과 물매화>를 본 적이 있었다. 싸한 기운이 느껴지는 오름 둔덕위로 휘영청 보름달이 떠오르고 물매화가 달의 마음을 따라 다투듯 피어나고 있는 그림. 그 앞에서 나는 줄곳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달이 뜨고 이지러지는 그 단순 진리를 따라 가고 싶은, 어느덧 나도 물매화의 마음을 따라가고 있었다. 달빛에 더욱 생생하던 물매화는 그 동안 내 시선이 지나치게 햇빛 쪽으로만 기울어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했던 것이다.

342미터에 불과한 따라비오름을 한라산 정상만큼 어렵게 오른 것은 무심한 발길에 들꽃이 밟힐까 조심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오름 자체가 주는 감촉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정상에 올랐을 때는 주위의 오름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거친 호흡을 가다듬고 모로 누워서 굼부리(분화구)의 유연한 선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오름이 하나의 굼부리를 갖는데 따라비오름은 이름처럼 세 개의 굼부리가 이웃해 있어 능선의 유연성을 더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고운 선과 여체의 부드러움이 총망라된 듯, 따라비오름의 굴곡미는 상당히 관능적이었다. 그 품에 안겨 알몸으로 뒹굴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제주도의 창조신 설문대할망은 제주도와 육지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겠노라고 나들이옷으로 입을 명주 백 필을 요구했다. 제주백성들은 서로서로 명주를 마련하여 모아 바쳤으나 한 필이 모자라 다리를 못 놓았다는 이야기. 이제 생각하면 채우지 못한 명주 한 필로 제주의 자연이 오롯이 보존될 수 있었다. 그 한 필을 채우려는 욕망이 오름을 몇 개나 깎고, 자연동굴을 막아야 가능한 제주도 제2공항을, 육지와의 해저터널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름의 고운 선을 보면 제주 사람의 심성도 저 능선을 닮아 부드럽고 겸손했음을 느낀다. 한 개의 골짜기가 부족하여 호랑이가 나지 않는 산이 되었다는 ‘아흔아홉골’의 전설도 결핍이 주는 소중함을 체득한 제주 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산에서 내려오니 오름은 일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산의 윤곽을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어둠이 서서히 내리며 산의 음영이 짙어지는 것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시간은 내가 원시의 공간에 서서 영겁의 시간과 조우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태어나서 죽고 하는 일들이 한 날 한 시의 일처럼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그 후 여러 오름을 오르면서도 따라비오름을 다시 가지 않았던 것은 그 가을 따라비오름이 내게 주던 정취를 오롯이 간직하고 싶어서이다. 어느만큼 변했을까. 입구를 찾아 헤매며 허리높이까지 자란 억새를 휘저으며 올라가던 따라비오름에도 이제는 관광객을 위한 푯말과 안전판들이 꽂혀있을 것이다. 오름가는 길 만이라도 야생의 상태로 두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비자림의 삼나무 훼손을 본 관광가이드 여성의 울분을 곱씹어본다.

제가 제주도에서 일본인 가이드를 5년 했어요. 제주도가 관광으로 먹고 사는데 내세울 게 뭐가 있습니까? 영국, 프랑스와 같이 경쟁할 수 있는 역사물이나 예술품이 있나요? 제주가 내세울 수 있는 건 자연 뿐입니다. 걔네들이 제주자연을 얼마나 부러워하는 데.... 이런 식으로 제주자연을 파괴하면 앞으로 제주관광의 경쟁력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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