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공회 성요한 신부(사진=성요한 신부 페이스북

제주퀴어문화축제를 나는 아무래도 반대할 수 없습니다. 헤테로 섹슈얼리티들이 호모섹슈얼리티를 소위 “일반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인권을 폭력적으로 대하고 혐오를 조장하는 수많은 이야기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성애자이며 “이성애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며 동성애는 제 성적지향의 입장에서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들의 자기주장과 법적 정당성의 요구와 이제껏 침해당했던 부당한 혐오와 폭력이 그들에게 더 이상 자행되어서는 안된다고생각합니다.

성서는 철저한 시대의 선물이고 종교적인 배경에서 기록된 것이기에 성서를 근거로 그들을 박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정말 그 말씀을 따르고자 한다면 율법대로 왜 그들을 돌로 치지 않습니까?

대한 민국은 다양한 종교 다양한 문화 다양한 삶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입니다. 그 다양성이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교회 안에 동성애자들이 있음에도 목사님들은 “우리교회엔 동성애자는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목사님이 담임하는 그 교회의 청년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찬양단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찬양하는 신실한 기독청년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성애자입니다. 목사님이 전혀 동성애를 이해하지 못하고 죄악시하는 설교를 하니 목사님과 상담을 할수 없다며 저를 찾아와 만났지요. 제주의 청년입니다.

제주의 모 교회 목사님은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마귀 사냥을 당해 쫓겨났지요. 같은 동료들은 내일 아니라며 암묵적 동의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우린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바탕으로 상대를 이해합니다. 그러니 그 간극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정죄하는 곳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이 동성애자라 하더라도 예수님께 나올 수 있는 길을 편하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동성애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없습니까? 사랑의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안식일법을 깨뜨리며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 하셨지요. 사람이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요. 한 생명을 실족케 하면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퀴어 축제에 반대하시는 한 목사의 글을 읽었습니다. 퀴어들이 오랫동안 자신들의 성적 욕구를 제한당하고 혐오시되고 그걸 넘어 핍박을 당한 역사가 있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한 다양한 종교적 역사적 배경이 있지요. 

오래 전 내 친구는 태어나서 집 밖으로 한발도 나올 수가 없었어요.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의 존재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부끄러움이었고 결국 어느 곳에서도 내 친구를 받아주지 않았지요. 그렇게 그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가족에게조차도 투명인간 아니 없어져야 할 사람으로 살다가 신의 부름을 받고 이 세상에 소풍을 와서는 하늘의 별도 들의 꽃도 새들도 나무도 한번 보지 못하고 소풍을 끝내고 말았지요. 형제들은 교회를 다녔는데 제 친구는 교회를 다니지 못했지요. 부모와 형제들은 동생을 위해 기도만 해 주면 된다 생각했나봐요.

난 알아요. 기독교가 지독히 동성애에 대해 혐오하는 이유를. 그것이 성서에 기반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안타깝지만 성서는 시대의 선물이고 인간은 시대의 일반적 이해와 종교적 교리와 일반적 합의에 구속당하지 않아야 해요. 예수는 당시 유대교의 종교적 전통과 유대인들의 일반적 합의를 넘어서 당시 교회가 죄인 취급하던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의 친구로 십자가 형을 당하셨지요. 

다수가 반대하면 하지 않아야 하고 다수가 찬성하면 해야만 하나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치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다수의 반대를 넘어가려다 죽임을 당했지요. 성소수자의 문제와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측면이 있다고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당시엔 성서를 근거로 백인 다수는 흑인들의 인간적 권리를 무시하고 오히려 그들을 핍박했지요.

한 사회 안에서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부정적 눈을 피해 숨지않고 자신들의 요구를 합법적인 선 안에서 주장하는 퀴어들의 이야기를 우리 사회는 듣지 않아요. 예수님은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했지요. 반대한다는 목사님의 말을 일면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 동의할 수는 없군요.

이들은 법 속에서 정당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해요. 다수의 반대와 정치적 이해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소수이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집단행동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흑인들이 노출되지 않고 운동을 했나요? 난 죽음의 위협이 있음에도 거리행진을 한 흑인들의 주장이 훨씬 진정성있고 아름답게 느껴지는군요.

사회적 합의를 통해 퀴어들의 주장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생각을 존중하지만 우리 사회는 퀴어들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사회적 합의라는 건 이루어낼 수 없어요. 행정과 권력은 다수의 손에 잡혀 있지요. 잘 아시지 않나요? 제주로 언제 들어왔기에 저런 소리를 하느냐?는 이야기는 그리 합리적인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요. 

물론 기존 공동체를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그것도 일면 다수의 기득권의 폭력일 수 있어요. 헤테로들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 호모들을 집어 넣고 우리와 똑같아져라 하는 이 주장은 아무리 부드럽게 말해도 엄청 날카로운 가시이고 폭력이 아닐까요? 4.3의 역사 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속에서 소수의 이야기는 때론 외침이 아니면 들리지 않지요.

최근 제주로 온 예멘인들을 혐오하고 환대하지않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일반화되어 예멘 친구들을 만나보지도 않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난 예멘 난민들을 이 땅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라고” 말하는 지극히 젠틀한척하고 지성적이며 지독하리만큼 근본주의 기독교적인 분도 계시더군요.

케이프 하알루카.('어떻게 지내세요?'라는 의미의 아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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