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김봉현/ 16회 외무고시 합격, 전 호주대사, 국립외교원 겸임교수, 제주대학교 초빙교수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그림자가 아직도 한반도에 길게 늘어져 있다. 전쟁이 중단된 지 벌써 70년이 되었지만 한반도의 평화는 아직도 멀게만 느껴진다. 최근 남북한간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새로이 조성되고 있어 냉전의 마지막 자락에 서 있는 우리 모두가 평화에 대한 설레임을 가지게 되었지만 북한의 과거 행태를 보면 아직 안심할 수는 없으리라.

한국전쟁의 모진 풍파 속에서 우리 모두 최소한 하나씩은 가슴 아픈 사연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의 삼촌인 김창근은 전쟁이 발발하자 다른 형제들과 함께 참전하였다. 형제들 모두 부상당하였지만 그는 특히 부상이 심하였다. 1951년 여름 지리산에 남아 있던 북한군의 잔당들과 교전 중에 중상을 입고 마산의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당시 신혼이었던 필자의 모친은 시동생이 마산 병원으로 후송되었다는 통보를 받아들고 황급히 면회를 갔다. 마산 앞바다 모래밭에 끝없이 펼쳐진 야전 텐트가 병원이라는 이름으로 부상병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면회를 가서 펑펑 울기만 하다가 돌아 왔다.

김창근 상병은 부상이 완쾌되지 않았지만 밀려오는 부상병들 때문에 할 수 없이 몇 달 만에 의가사 제대를 하고 고향인 제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들 무슨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구좌면 상도리의 가난한 부모가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당시의 어렵고 험악한 상황을 여기서 상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

제주시에서 신혼살림을 하고 있던 형님과 형수가 유일한 피난처였다. 최소한 잠자리와 먹을 것은 있었다. 특히, 형수를 잘 따랐다. 그러나 완쾌되지 않은 부상은 계속 그를 괴롭혔고, 시름시름 앓다가 제주에 귀환한지 6개월 만에 21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때를 회고하는 필자의 모친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노래도 잘하고 여러 가지 재주가 많았다고 한다. 70여 년 전의 일이건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신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약도 쓰지 못한 채 죽어가는 시동생을 보는 그 마음은 굳이 설명을 들어보지 않아도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김창근 상병은 전쟁 중에 입은 부상으로 사망하였음에도 국군묘지에 안장되지 못하고 일반 묘지에 묻혔다. 당시에는 이를 일일이 따질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필자의 모친은 이를 항상 마음 아프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1950년대를 거쳐서 70년대, 80년대 가난한 제주에서 삶의 고단함은 한동안 이를 잊게 해 주었다. 그러던 중 2000년대에 들어와서 한 숨을 돌린 모친은 필자를 비롯한 자식들에게 김 상병에 관한 과거를 전해주면서 국군묘지에 묻힐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필자는 해외 근무를 하면서 별로 도움을 드리지 못하였지만 나머지 형제들은 열심히 나서서 방법을 찾아 나갔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1950년의 혼란스러운 전쟁 중에 기록이 제대로 보관되어 있기가 힘들었을 것으로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모친의 마지막 남은 소망인 김창근 상병의 국군묘지 안장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무려 10년에 걸친 노력 끝에 기록을 찾아냈다.

그러나 기록을 찾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직계 가족이 신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상병의 부모, 배우자, 자식을 제외하고는 신청할 수가 없다는 답이 돌아 왔다. 급기야 모친은 분노를 표하고 말았다. 전쟁 중에 국가를 위하여 부상당하고 사망한 것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냐? 기록이 있으면 조건을 갖춘 것이지 무슨 부모, 자식을 찾느냐? 부모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결혼을 못하였으니 배우자, 자식이 있을 턱이 없는데 무슨 그 따위 황당한 조건을 다는 것이냐?

이를 풀기 위해서 부가적인 노력이 들었다. 간절함의 앞에 불가능은 없다. 드디어 지난 2018년 10월 9일 김 상병은 제주시 노형동에 위치한 충혼묘지에 안장되었다. 충혼 묘지는 아름다웠다. 탁 트인 전망 속에 멀리 바다가 보였다. 그 날 안장식 내내 필자의 모친은 ‘육군상병 김창근의 묘’라는 묘비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빗방울이 한두 개 흩어져 내렸다. 비를 피할 곳이 없는지 둘러보았다. 모친은 아랑곳 하지 않고 눈물 속에 계속 기도를 하였다. 이제 비로소 불쌍한 영혼이 조그마한 위로를 받게 되었다고 기뻐하면서..

필자의 모친은 평생 마음에 남아 있던 응어리가 이제 조금은 풀어졌다고 하였지만, 그 소박한 소원 성취만으로 한국전쟁으로 참혹하게 스러져간 영혼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한국전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나?

한국전쟁은 냉전의 산물이라고 감정 없이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달리 표현하면 공산주의와 자유주의간의 이념 투쟁이라고 한다. 그래서 민초들의 희생과 고난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인가?

이념의 투쟁이었든, 권력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었든 간에 전쟁을 일으킨 사람과 집단을 용서할 수는 없다. 공산주의 이념의 어설픈 단어만으로 생명 살상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자기가 믿는 이념을 실현하고자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섣부른 공산주의자들을 역사는 수없이 목격해 왔다. 러시아 공산 혁명, 중국의 국공내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그리고 한국전쟁, 이러한 이념투쟁의 잔상은 과연 무엇인가? 슬픔이라는 답 외에는 달리 답할 길이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사회 전체를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과연 어떠한 이념이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겠는가? 공산주의자들 스스로도 과연 그러한지 확신할 수 없는 성급한 믿음 속에서 수많은 인간들을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이는 “아니면 말고”라는 말 이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인류가 꿈꾸는,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너무나 간단하다. 남을 배려해 주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남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행동이 결국 자기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모든 인간들이 공유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공산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이념의 광풍 속에서 힘없이 스러져간 스물 한 살의 김창근 상병에게 위로와 함께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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