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82)교황의 내년 북한 방문 성사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에, 문득 프란치스코(1182~1226) 가톨릭 성인의 ‘평화의 기도’가 떠올랐다.

‘평화와 화해의 사도’로서 보여주고 있는 교황의 말씀과 행보가 기도의 내용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히 교황은 2013년 3월 제266대 가톨릭 교황에 선출돼 즉위하면서 자신의 이름(호르헤 마리오 매르고골)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이름에서 따 ‘프란치스코’로 명명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가 교황의 이미지와 오버랩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의 표상이자 평화의 대변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무소유’의 삶을 즐기며 청빈 겸손 소박한 영성(靈性)의 삶을 실현한 성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기도문’ 전문(全文)>.

단어는 쉽고 문장은 간결하다. 기도 전편(全篇)에 흐르는 영혼의 울림은 우렁우렁 천둥소리처럼 크고 간절하고 뜨겁다.

기도문에는 사랑과 용서와 위로와 희망에 대한 간절함이 촘촘하게 배어있다. 일치와 진리와 이해와 기쁨의 이야기도 촉촉하게 스며있다.

그러나 속을 헤집어보면 갈등과 분열과 증오가 거칠게 일어서서 멱살잡이 하는 사회현실에 대한 ‘소리 없는 경고음’도 번득인다.

‘평화의 기도’는 이를 일깨우는 죽비소리다. 부드럽지만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지적인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북한 방문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사회 내부의 분열과 갈등과 증오의 곽란(癨亂)을 어떻게 잡도리해야 하는 지에 대한 일깨움이다.

지난 18일(현지시간) 바티칸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프란치스코 교황과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교황에게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평양초청 의사를 전달했다.

교황은 “북한으로부터 초청장이 오면 무조건 응답해 줄 것이고 나는 갈 수 있다”고 화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의 공식 초청’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사실상의 ‘방북 수락’으로 해석되고 있다.

‘교황 방북’이 성사된다면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세기적 또는 세계적 이벤트가 될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의 평화모드에 혁신적 획을 긋는 전기가 마련되는 것이어서 그렇다.

상징적 의미나 현실성에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 방북’ 이벤트는 문대통령의 유럽 순방 최대 성과로 기록 될 것이다. 교황 방북 후 결과에 따라 최대 수혜자가 될 공산도 크다.

북한은 인권과 종교 탄압 국가로 알려진지 오래다.

이런 나라에 세계 13억 가톨릭교도의 정신적 지주일 뿐 아니라 영향력 있는 세계적 종교지도자이자 인권과 평화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교황이 북한을 방문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신선한 충격이다. 획기적 사건이다.

따라서 김위원장 입장에서는 교황 방문은 교회의 언어로 말하자면 ‘구세주’가 될 것이다.

UN 등 국제적 대북 압박과 제재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외교적 고립에서의 탈피, 정상국가로서의 이미지 쇄신, 비핵화의 진정성 부각에 ‘회심의 카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잘만 활용하면 인권탄압이나 종교 박해 국가 이미지를 희석 시킬 수 있는 ‘꽃놀이 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기회 못지않게 그로서는 위기이자 위험한 도박일 수도 있다.

교황 방북이 신격화한 세습 권력 구조를 흔들거나 약화시키는 돌개바람으로 작용할 수가 있어서다.

교황방문으로 (진행속도에 관계없이) 종교적 동토(凍土)가 풀리면 언제 세습 권력의 축대가 무너지고 범람하는 자유의 물결이 북의 체제를 무너뜨릴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 위험을 모험하거나 감수하면서까지 교황을 초청 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바티칸에서도 교황의 북한 방문은 예삿일이 아니다.

종교의 자유가 없고 ‘악의 축’이라는 인권탄압 국가로 지목받는 북한에 교황이 방문한다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이 얼어붙은 땅에 종교의 씨앗을 뿌리고 따뜻한 신앙의 숨결을 불어넣는 일은 평화와 화해의 사도로서의 신앙적 사명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권탄압에 대한 유형무형의 의미 있는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다. 교황 방북은 그만큼 상징성이 크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앞당기는 촉매제가 된다면 바티칸으로서도 교황 북한 방문을 주저할 일은 아니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언제쯤 교황 방북이 이뤄질 것인가. 내년 5월에서 8월 사이를 점치는 쪽이 많다.

교황은 내년 일본 방문을 하겠다고 이미 밝힌 바 있다. 내년 4월 아키히토 일왕이 퇴위하고 나루히토 왕세자가 즉위한 다음인 5월 이후 순방 가능성이 높다.

중국 천주교 역시 교황에게 초청의사를 전달하고 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로 미뤄 교황의 북한 방문은 이들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 일대 방문과 연결 될 수 있다.

북한 일본 중국을 묶은 패키지 순방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교황의 북한 방문에는 사전 정지작업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많다. 풀어야 할 문제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교황의 해외 방문은 통상적으로 해당국가 정상과 해당 국 가톨릭 주교회의 초청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은 주교회의는 고사하고 천주교 사제가 한 명도 없다. 사실상 종교가 없는 나라인 셈이다.

바티칸에서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할지가 열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북한이 교황 북한 방문에 앞서 인권이나 종교분야 등에서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하고 바티칸과의 수교 등 획기적 관계 개선의 가능성을 전망하기도 한다.

낙관적 ‘교황 방북 시나리오‘다.

과정이야 어떻든 프란치스코 교황 방북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면

한반도, 특히 북한에는 미증유(未曾有)의 종교적 정신적 지각변동이 올 것이다.

(긍정적으로만 생각하여) 그렇게 된다면 화해와 평화의 물결이 손 맞잡아 춤추고 진리와 희망이 얼싸안고 입 맞추며 어둠을 사르는 빛과 기쁨과 믿음과 일치가 하나로 어깨동무하는 성 프란치스코 ‘평화의 기도’간구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 이는 한반도의 운명을 가르는 핵심 키워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내년 북한 방문 가능성에 내외의 이목과 관심이 집중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참고로 덧붙인다면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문’은 20세기 초 프랑스의 한 지방 잡지에 실렸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작자 미상의 기도문 발표 이후 바티칸에서 성 프란치스코 이미지와 함께 사용함으로써 ‘성 프란치스코 평화의 기도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작자가 누구이든 ‘평화의 기도문’은 시공(時空)을 초월해 오늘에도 사람들에게 평화와 사랑과 용서와 희망을 간구하는 아름다운 기도문으로 애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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