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전라도를 떠도는 4·3영령이여, 편히 쉬소서"

②"4·3학살을 막았던 항쟁...제주가 '반란' 쓰면 안돼"

③끝나지 않은 상처와 갈등...여순사건은 계속 진행중

10·19 여수순천사건(이하 여순사건) 70주기가 지나갔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4·3희생자유족회청년회는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2박3일의 일정으로 여수와 순천을 순례하면서 여순사건 70주기 행사에 참석했다.

본지 기자도 유족회 등과 여순 순례길에 동참했다. 여순사건은 제주4·3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두 사건은 분리된 일이 아닌 한몸과 같은 일이었으며, 한국 현대사를 뒤흔들어놓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족회가 이번 순례길에 오른 이유기도 하다. 제주4·3과 함께 다뤄져야 할 이야기가 기억 속에서 잊혀가고 있었다.

◎여순사건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12개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항쟁에 나서자, 이승만 정부는 대대적인 제주도 토벌을 계획했다. 정부는 10월 8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10월 15일부터 16일 사이 육군본부에 제주 진압을 위해 여수 제14연대에 제주도 파병을 명령했다.

그러자 지창수 상사 휘하의 병사들이 연대 병기고와 탄약고를  접수하고, 2,500여명의 군인들을 소집해 14연대 봉기군을 꾸렸다. 봉기군은 2~3일만에 여수와 순천 시내를 장악했으며, 많은 시민들이 그들을 지지하면서 그 영향은 전남 동부지역에 퍼져나갔다.

▲여수, 순천에서 봉기를 일으킨 14연대를 진압하기 위하 작전을 펼치고 있는 정부진압군의 모습@사진출처 라이프 사진전

봉기군의 강령은 두 가지였다. 제주도 파병에 따른 동족상잔을 반대하고, 미군은 즉시 한반도에서 철퇴할 것.

그러자 정부는 10월 22일 여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즉각 진압군을 투입했다. 육해공 전 부대를 투입시킨 진압작전은 사실상 전쟁과 다름없었고, 순천과 여수는 불바다가 됐다. 결국 23일 순천이, 27일 여수가 완전히 진압됐다. 이후 정부 진압군은 14연대 봉기군을 도왔던 여순 시민들을 '부역자'로 몰아 남녀노소와 관계없이 무차별 사살했다. 이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민간인 희생자는 3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까지 정부의 피해조사에 따르면 1949년 1월 10일까지 인명피해는 총 5,530명(사망 3,392명, 중상 2,0556명, 행방불명 82명)이며, 가옥 피해는 8,554호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시민단체와 전라남도 당국은 행방불명인이나 알려지지 않은 학살까지 포함하면 최소 1만1천여명 이상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순사건 당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모습. 그 뒤로 미군이 이를 차갑게 지켜보고 있다.@사진출처 라이프 사진전

여순사건은 좌우익의 대립이 극렬하던 시기, ▲정치적 혼란, ▲토지문제 등 사회·경제적 어려움, ▲친일세력의 재등장, ▲군·경의 대립 등 다양한 문제가 복합적으로 이뤄져 발생했다. 최근까지 '여순반란사건'으로 불리던 이 일이 '여순사건'으로 이름이 바뀐 것도 이런 연유다.

이를 잘 드러내는 것이 당시 10월 24일 봉기를 일으켰던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가 여수인민보(여수일보)로 보도한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 성명서다. 이 성명서를 근거로 많은 역사가들은 여순사건이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항거이자 항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1948년 당시 여수 시내에 게시됐던 14연대 봉기군의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교묘히 이용해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인민위원회 등을 '빨갱이'로 몰아 반드시 처단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런 프레임을 한국 교육과 사회, 문화에 뿌리깊게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빨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한국 전역을 '레드포비아'로 '감염'시킨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빨갱이라는 명단에 오르면 누구든지 죽여 마땅하게 여겨졌다. 한국 현대사 암흑기이자, 광범위한 왜곡의 역사가 시작됐던 것이다.

정당한 '항쟁'이 '반란'이나 '국가전복',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뒤집어쓰면서 지금까지도 한국 현대사는 깊은 갈등의 골을 남기고 있다.

◎시민들이 도왔던 항쟁..."당시 역사 바로 인식해야"

18일 오전 광주형무소 옛터를 방문한 제주4·3희생자유족회는 여순 순례에 나섰다. 

유족회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여수시 연등동에 위치한 인구부 전투지였다. 

왼쪽으로 구부러진 지형이라고 해서 붙여진 인구부는 여순사건 당시 정부 진압군과 저항군인 14연대가 치열하게 전투했던 격전지다. 1948년 10월 24일 두 군대가 정면으로 붙은 이 싸움에서 진압군 총사령관이 14연대의 총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후퇴했다.

▲여수시 연등동에 위치한 인구부전투지에서 4.3희생자유족회와 여순산건 순례자들이 주철희 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사진 김관모 기자

지역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던 14연대와 여수시민들의 도움 때문에 진압군은 빈번히 패하면서 여수 공략에 실패했다. 왜 당시 여수시민들은 '반군'이라고 일컬어지던 14연대를 도왔을까.

이날 가이드에 나선 주철희 박사는 당시 여수의 경제상황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주철희 박사는 여순사건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여순사건 연구의 권위자이자 역사학자다.

"14연대의 도움으로 여수를 장악한 인민위원회가 처음 정책을 편 것은 여수 식량영단창고(지금의 농협)의 문을 연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공출제였습니다. 봄과 가을에 추수한 곡식을 정부에 공출하면, 정부가 배급하는 방식이었죠. 하지만 당시 여수의 지배층들이 7~8월에 곡식이 모자르다고 하면서 배급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한 가마를 2,200원에 공출했는데 배급이 안되니 쌀을 사려면 그 5배 이상을 내고 사먹어야 했어요.아낙네들은 도가집에서 비지를 얻으러 다니고 아이들은 나무뿌리를 캐먹으러 산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한말보다 상황이 더 험했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죠.
그런데 인민위원회가 여수를 장악하고 창고 문을 여니, 쌀이 없는게 아니라 쌀이 남아돌아서 썩고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친일경찰과 관료, 도정업자가 합작해서 이윤을 얻으려고 쌀을 숨긴 거였습니다."

이에 여수인민위원회는 시민들에게 하루에 쌀 3홉을 배급하고, 생활용품도 지급했다. 또한, 금융기관의 문을 열어 돈이 없는 대중에게 은행돈을 대출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인민위원회가 여수시의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모습에 시민들 남녀노소 할 것없이 인민위원회를 도왔다. 시민들이 14연대를 도와 진압군과 목숨을 걸고 싸우려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주 박사는 설명했다.

"우리는 여순사건이라고 하면 봉기군(14연대) 이야기만 하는데 시민들이 봉기에 합세하면서 강렬히 싸운 사실은 모릅니다. 시민들이 호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여수가 항쟁일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습니다."

▲주철희 박사가 여순사건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사진 김관모 기자

◎"제주4·3, 여순사건만 보지 말고, 한국정부 70년 폭력사를 봐야"

여순사건 순례자들은 주철희 박사와 함께 여수시내를 돌면서 14연대가 활동했던 당시를 돌아봤다. 여수시에는 70년전 당시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미군과 정부 육해공군이 합작해 봉기군을 탈환할 목적으로 여수 시내를 불바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벽이나 철근까지 모두 녹여버릴 정도였다고 하니 정부군이 얼마나 철저하게 진압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금융가가 모여있었다던 여수시 중앙로는 이제 패션거리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로 변모해있다. 당시 인민위원회가 인민대회를 열었던 진남관 앞의 터도 진남관의 모습만 남아있을 뿐 모든게 변해있다.

▲여수시 중앙로의 모습. 길을 기준으로 1948년 당시 왼쪽은 우체국과 여수일보가 있던 자리이며, 오른쪽은 금융가가 있었다고 한다.@사진 김관모 기자
▲당시 인민위원회가 열렸던 진남관 앞의 건물. 현재 여수시에서 당시 모습을 재현하기 위한 공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14연대가 이곳을 점령했을 때 약 3~5천명의 대중이 인민대회에 참여했다고 한다.@사진 김관모 기자

주 박사는 여순사건이라는 여전히 한국역사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틀에 갇혀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4·3을 드높이는 제주에서는 4·3을 막고자 싸웠던 여순사건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점을 들었다.

주 박사는 "지금도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는 여순사건을 여순반란사건이라고 쓴다"며 "반란사건은 4·3학살을 정당화시켜주는 이야기인데, 이를 몇년간 지적해도 기념관에서 여전히 반란이라는 말을 쓰더라"며 한탄했다.(이 말을 들은 유족회는 즉시 4.3평화기념관에 연락했고, 기념관은 현재 반란사건이라는 용어를 수정했다.)

주 박사는 여순사건이나 제주4·3에서 중요한 것은 그 지역에 학살이 자행됐다는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14연대 창설 당시 14연대 군기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는 미군 임시고문단의 모습. 14연대의 모습은 이같은 단편적인 모습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14연대가 주둔했던 여수시 신월동 한화공장 앞에서 제주4.3유족회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사진 김관모 기자

"우리 역사에서 가장 많은 민간인 학살이 이뤄진 사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동학농민혁명입니다. 당시 조정은 동학과 관련된 모든 가족을 학살하고 부역자를 깡그리 색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억 속에서 동학이 학살로 기억되나요? 동학혁명은 조선이라는 신분제를 해제하려고 했던 농민들의 위대한 승리로 봅니다.
동학혁명 과정에서 엄청난 사람들이 죽어나갔지만 그 희생으로 얻어진 우리 역사의 전환을 보는 것이지요. 제주4·3이나 여순사건을 단순히 민간인 학살로만 접근합니다. 하지만 제주4·3 당시 항쟁군이 주장한 것은 단독정부 수립과 남한 단독선거 반대였습니다. 통일국가를 지향했던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모두 사라지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으로만 접근합니다. 
전라도라는 명칭이 만들어진지 1천년이 되는 해입니다. 저는 전라도 1천년 역사를 '저항'이라는 두 글자로 표현합니다. 전라도의 저항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만들었습니다. 당당하게 그 시대의 그 억압된 것을 끊고 통일 민주국가를 형성하려고 싸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주4·3을, 여순사건을 다음에 기록할 때 제주 사람들, 여순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글로만 써지길 바라십니까?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당당하게 싸웠다는 역사를 쓰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 점을 우리 모두 고민해야 합니다."

이후 4·3유족회는 여수시 신기동 노마드갤러리에 들러 주철희 박사의 '여순항쟁기록展'을 둘러봤다. 유족회는 이곳의 자료들을 둘러보고 여순사건을 설명하는 동영상을 보면서 여순사건을 새롭게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4.3희생자유족회가 여수시 신기동에 위치한 노마드 갤러리에서 여순당시 자료들을 보고 있다.@사진 김관모 기자
▲노마드갤러리에서 여순사건 관련 동영상을 시청하는 유족회@사진 김관모 기자

또한, 저녁에는 여순사건유족회와 함께 '정의로운 과거사해결 위한 연대 워크숍'을 열고, 제주4·3과 여순사건을 함께 공부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날 워크숍에서 유족회는 4·3과 여순사건이 하나의 뿌리이자 한 몸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고, 여순사건특별법 제정에 연대하기로 의지를 모았다.(기사 "제주4·3과 10·19여순은 한 뿌리...연대의 힘 높이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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