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살고 있는 김윤숙 시인의 "참빗살나무 근처" 시집의 봉투를 열어보니 단풍과 같은 아담한 정장이 마음에 들었다. 제4부로 나눠진 73편 중에 제1부 첫 작품이 "단풍"이었다. 

단풍

놓치는 건 네가 아닌 내 안의 시월이다

붉게 쑫아지는 울음의 저 길 끝으로

붙잡지 못하는 마음 서늘히 번져간다

울고 싶도록 파아란 가을 하늘이라는 표현이 있다. 가을 하늘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문제였다. 떨어져 나간 단풍의 붉은 울음이 아니고,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내 마음의 울음이었다. 흔히 단풍을 객관화 시키는 작품들은 많지만 "놓치는 건 네가 아닌 내 안의 시월이다" 즉 우리들인 것이다.

다음은 "엉또폭포"이다.

엉또폭포

산정을

끼고 내려

흩어진 형제들

 

한핏줄의 만남은

서로를 당기는지

 

손깍지 부둥켜안은 몸

곤두박질

절벽 아래

 

비명이 바닥을 쳐

벼랑을 세우고

 

순식간 마음 얼고

눈과 귀를 멀게 하여

 

비로서

 

저 먼 바다로, 쓸려간다

어미 품 간절히

엉또폭포는 서귀포시 강정동에 있는 폭포인데 상류가 건천(乾川)이어서 산간에 70미리 이상의 비가 내릴 때 폭포로서의 제 구실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폭포를 의인화 시킨 것만이 아니고 이산 가족으로 묘사했다가  하나로 뭉쳐졌을 때의 노도와 같은 파워로 깎아찌를 듯한 벼랑까지 세우고 대해(大海)로 모습을 감추는 폭포의 생과 파란에 넘친 인생이 오버랩된다.

다음 시는 "궁리"이다. 

궁리

 

1

낮잠서 깬 어릴 적은 왜 그리 울었는지

그 누구도 안 보여 나 홀로 있다는 예감

텅 빈 집 흠칫 놀라서

설움 복받쳤을까

 

2

살림난 아이들 그새 이는 적막에

먼 시간 거슬러 온 이 낯선 고요가

마뜩이,

제 딴의 궁리를

되새기는 한나절

한나절의 의미는 여러 각도로 음미할 수 있다. 특히 어릴 적 낮잠 속에서 깨어났을 때, 혼자라는 놀라움의 고독과 곧 저녁이 찾아와서 하루가 끝나다는 아쉬움 속의 초조감 등도 그렇다.

또 다른 의미로서는 저녁이 곧 와서 밤이 되면 하루가 끝난다는 초조감과는 반대로 아직도 밤이 되기까지는, 하루가 끝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여유롬이다.

그러나 시인은 상반되는 이것을 떠나 새로운 한나절을 제시했다.'궁리' 속의 한나절은 동심 때와 성인으로서 맞은 그 시간의 흐름을 의외의 발상으로 대비 시켰는데, 지나 온 과거에 대한 자기 성찰이 아니고 변명에 가까운 자신의 삶을 정당화 시키려는 한나절이었다. 궁리의 한나절이 아니고 한나절의 궁리였다.

다음은 "풍경"이라는 시이다.

풍경들

들쳐 낸 묶은 책들 수북이 쌓인 먼지

잠시 스친 날들과 잊혔던 인연들이

숨 쉬듯 떨저 나와 눈가를 간질인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긴 터널을 지나와

펼쳐놓은  풍경 속 안 보이는 비탈을

꼭 잡아 놓지 말라는 저릿한 생 나를 끈다

책만이 아니고 우리 삶의 흔적들 모든 것이 다 그렇지 않을까.  상징적으로 시인은 책을 선택했다. 삶의 반추 속에 영상처럼 가물거리는 모습을 그려보는 가운데 새로운 발견도 안겨준다. 인생의 온고지신만이 아니고 풍경의 대상 속에서도 온고지신은 번뜩인다. 이것은 이 시에 대한 역설적 해석이지만 또 역설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가능성까지 보여준 작품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어떤 꽃 하나"이다.

어떤 꽃  하나

 

누군가 실컨 울고

이제 참으려는 듯

 

쏟아 내던 장맛비 멀쩡히 갠 하늘 맑다

 

변명도 못할 때 있다,

어쩔 수 없이 묵묵부답일

 

내뱉는 그 말에도 옷 적시는 빗줄기라

꺾인 우산살의

펼 수 없는 당혹감일 때

 

치자꽃, 한 송이 남아 있어 아직 " 나 괜찮습니다"

마지막 일행 <치자꽃, 한 송이 남아 있어 아직 "괜찮습니다">가 왜 갑자기 나왔을까 솔직히 의문이다.  4연까지는 한국 날씨도 열대지방처럼 게릴러폭우, 한정된 지역만의 회오리비람 등이 몸에 베여 익숙한 상태이다.

이 한순간에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것은 그래도 난감한 일이다. 그 속에서도 연약한 치자꽃 한 송이는 당당이 이겨 내고 향기를 주위에 흩뿌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엉또폭포"의 의인화와 "궁리"의 1과 2의 대비의 발상 등은 읽는 독자들을 즐겁게 한다.

김윤숙 시인은 제주출생으로 2000년 <열린시학> 신인상 당선 으로 등단. 시집은 <가시낭꽃 바다> <장미 연못> 등이 있다. 시조시학 젊은시인상,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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