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영수/ 제주대학교 교수를 퇴임한 후 전업소설가로 활동 중

삼다도라 불리는 제주섬에서 풍다(風多)와 석다(石多)의 현상은 운명적으로 주어진 자연환경의 문제이지만, 여다(女多)의 현상만은 제주사람들의 독특한 생활사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제주도에는 옛날부터 남자보다 여자인구가 많기도 했지만, 제주여성들은 타지역 여성들에 비하여 특히 생활력이 강하고 활동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강인하고 당찬 제주의 여성상은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확인할 수 있는 바이지만, 제주신화에 나타나는 여강남약적(女强男弱的)인 구도가 우리의 주의를 끈다.

탐라국의 건국신화인 고량부 삼성신화는 굉장한 여존남비 구도이다. 제주시청 외벽에 그려진 삼성신화 주인공들의 그림을 보면, 제주도 남자의 원조인 고량부 3을라는 아직 농사 지을 줄도 모르는 남자들, 옷이랄 것도 없이 짐승가죽으로 몸의 일부를 적당히 가린 투박한 사냥꾼 모습으로 나온다. 이에 비해, 이들의 배필로 그려진 세 여자는 벽랑국 왕이 보냈다는 3공주, 하늘하늘 예쁜 옷으로 몸을 감쌌는데다 얼굴 치장도 곱고 우아한 귀인들 모습이다. 제주도 마을 당신들의 원조라는 송당궤눼깃당 소천국과 백주또의 스토리도 삼성신화와 비슷한 여존남비 구도이다. 강남천자국 정승의 딸 백주또는 천정배필을 찾아 제주섬 송당리로 들어오는데, 백주또와 백년가약을 맺는 남자는 아직 음식을 익혀먹을 줄 모르는 한라산 사냥꾼 소천국이다. 백주또는 남편에게 농사를 가르치는데, 밭을 갈다가 배고품을 참지 못한 소천국은 밭 갈던 소를 잡아먹었다가 백주또에게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단군신화에서 남자의 원조격인 단군은 하늘나라의 천신들인 환인과 환웅의 후예인데, 여자의 원조가 된 것은 끈기와 인내력이 뛰어난 공으로 인간으로 변신한 곰이다. 확고한 남존여비의 구도이다.

제주신화에서는 할망신들의 수가 하르방신들보다 훨씬 많다. 제주도 당신들의 원조격인 송당마을 당신 소천국과 백주또에게는 아들 열여덟 명, 딸 스물여덟 명이 있었는데, 이들이 제주도 곳곳으로 뻗어나가 각 마을 당신이 된다. 남성신보다 여성신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은, 제주섬 주민들이 기원하고 치성을 바칠 일들이 여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제주신화는 그 대부분이 무속신화이고, 무당을 찾는 사람들은 대체로 여성들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전쟁에 이기거나 국가의 존망을 걱정할 필요보다는, 자식 잘 낳고 병구완 잘하고 가족간에 화목하여 부자가 되도록 돌봐달라고 기원하는 것이 제주사람들이 심방을 찾고 굿을 하는 이유였던 것이다. 일반 서민들이 치성을 많이 바치는 여성신의 신당들은 번창하게 마련이고, 사냥질하던 전력의 남성신 신당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쇠퇴의 길을 가게 마련이었다. 제주신화에서 가장 위세당당한 행차를 이끌고 단골고객들의 치성을 가장 많이 받는 신은 출산신 삼승할망이었는데 이는 제주도 민초들의 소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식을 낳고 키우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신화나 그리스로마신화처럼 대륙의 거대왕국 신화에서는 출산신의 존재가 아주 미미하다는 사실과 대비가 된다.

여성신들이 강세인 것은 신들의 수가 많고 적음만이 아니고 심방들 본풀이인 신화 스토리의 구도에서도 나타난다. 여존남비적이라고 하면 지나칠지 모르지만 적어도 여강남약적인 구도임에는 틀림없다. 스토리 전개의 중심에서 파트너 역할로 나오는 남녀 캐릭터의 성격을 비교할 때에 이같은 구도가 명백해진다. 제주신화 가운데 제일 재미있고 상징성이 풍부하다는 자청비 스토리를 보면, 여주인공은 똑똑하고 당차지만, 남주인공 문도령은 아둔하고 미죽고 어리숙하다. 자기를 사랑하는 여자가 같은 선생 밑에서 3년이나 글공부를 하는데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는 문도령의 모습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든다. 자청비 스토리는 중국의 오랜 전설 축양전(祝梁傳)에서부터 발전적으로 변형되어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국판 원전과 제주판 변형본에서 나타나는 여성 캐릭터의 차이는 똑똑한 제주여성들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제주신화의 자청비에 해당되는 중국 축양전의 축영대는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놔두고 부모님이 정해주는 남자와 결혼하는 순진해 빠진 여성인데, 이 때문에 상사병으로 죽은 양산백의 무덤을 지나다가 나비로 환생한 한 맺힌 남자와 함께 하늘나라로 날아가는 것으로 스토리가 끝난다. 제주여성 자청비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자식들의 지극한 순정을 몰라본 부모의 반대로 결혼약속이 깨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묘책을 강구함으로써 부모의 찬동과 축복을 얻는 당차고 지혜로운 길을 갔을 것이다.

문전본풀이의 남선비는 무능하고 어리석은 남편인데, 그에게 생계마련의 먼길 장사에 나서도록 격려한 것은 그의 부인 여산부인이고, 고향을 떠나 헤매던 남선비를 농락하여 가문의 몰락을 초래한 것은 사기꾼 같은 여자 노일저대 딸이다. 남선비는 여산부인의 선행에 답례하거나 노일저대 딸의 악행에 대응할 깜냥이 못되는 남자로 보인다. 운명신 이야기인 삼공본풀이에서 강이영성과 홍은소천의 셋째 딸 가믄장아기는 집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당한 후 잠 잘 곳을 찾아들고 자기 반려자를 택하는 일에 강단과 기지를 보여주지만, 그녀의 선택을 받는 마퉁이네 집 막내아들은, 착하기만 할 뿐 자신의 삶의 진로개척에 선택권을 행사하는 예가 없다. 염라대왕 앞에서 배짱좋게 불호령하면서 이승나들이를 명하는 강림차사는 가히 영웅이라 할 만하지만, 그로 하여금 험하고 무서운 저승길을 다녀오도록 격려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준 이는 그의 부인이다. 무속신화는 아니지만 제주의 창조신화격인 설문대할망 전설은 어떤가. 치마로 흙을 날라다가 제주섬을 만들었다는 설문대할망 이야기는 많이 전해지지만, 설문대하르방의 존재는 아주 미미하다. 제주여성의 압도적인 위세를 보여주는 스토리 가운데 금악리 당신 본풀이가 있다. 정좌수딸이 산에서 만난 남자는 삼별초난의 영웅 황서국서인데, 여자는 꾀를 써서 남자를 꽁꽁 묶어놓고 마을로 내려오려 한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누님 대접을 해주면 풀어주겠노라고 엄포를 놓는다. 나중에 비가 억수로 내리는 어느 날 산에서 빗물에 쫄딱 젖은 몸으로 마을로 내려온 황서국서가 자기 집을 찾아들었을 때 정좌수딸이 하는 말은 ‘아버지, 저 남자가 내 남편 될 사람이우다’ 였다고 한다. 이런 여자와 이런 남자가 부부생활을 할 때 어떤 관계가 될는지는 불문가지이지만, 이보다 더한 말이 나오는 제주민요가 있다. ‘우리 집에 저 멍텅구리, 갈치 낚으레 가거든, 바람이랑 불거든 석덜 열흘만 불어라.’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