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권무일/ 소설가, 역사소설 <의녀 김만덕>, <남이>, <말, 헌마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 수상록 <어머니 그리고 나의 이야기>, 평설 <이방익 표류기>

2018년 11월 11일에 열린 남해 서불과차 한중일 국제학술대회에 내가 참여한 일은 매우 의미 있는 경유였다. 이번 기회에 주마간산 격이지만 여러 유적지를 답사할 수 있어 더욱 보람찬 일이었다.

학술대회에서 남해서복회의 박창종 회장은 88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불 뿜듯 우렁찬 음성으로 대회사를 하셨고, 전야제로부터 송별만찬까지 참여하여 태산 같은 포부를 드러내 주셨다. 대회를 주관한 김성철 사무국장의 빈틈없는 진행과 희생적인 노고 또한 잊을 수 없다. 김성철(남해), 이성보(거제), 문호성(함양), 위장정(중국 낭야), 오오쿠시 다츠오(일본 사가현) 등 연사들의 발표는 유의미하고 들어둘 만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11월 10일 제주도 애월 필자의 집에서 7시 30분에 집을 나서서 길고 지루한 6시간의 여정 끝에 오후 1시 30분에 남해의 한 식당에 도착하였다. 김성철 국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점심을 마치고 필자는 문화해설사 조혜연 선생의 도움으로 유존혁 장군터를 찾았다. 삼별초 정부의 제2인자 좌승선 유존혁이 남해에 머물렀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그의 유적지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적장 유존혁이 남해에 머물면서 연해에서 노략질하고 조공선을 탈취하다가 삼별초가 패하여 탐라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배 80척을 이끌고 도망갔다”고 한다. 우리는 남해군 서면 서호리의 흘포에서 망운산(786m)의 깊은 골짜기를 따라 높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칡넝쿨로 뒤덮인 돌계단을 오르니 석축이 4단으로 쌓여 있다. 계곡을 끼고 산줄기가 양편으로 뻗어있는데, 지금은 논이지만 아마도 옛날에는 바다가 서상항에서 흘포까지 뻗어있었을 것이다.

나는 수년전부터 항몽의 기치를 걸고 강화도에서 진도로, 다시 탐라로 옮겨가며 투혼의 전쟁을 치렀던 삼별초에 대하여 탐구해 왔다. 삼별초 왕국의 최고 지도자 좌승선인 유존혁 장군이 왕온 임금을 수행하지 않고 왜 남해로 갔을까? 그가 이끈 80척의 군함에 약 4,000명(1척당 군인 30명, 곁군 20명)이 승선했다고 가정할 수 있는데, 탐라에서 그들은 어찌되었을까?(당시 탐라 인구는 1만여 명) 나는 장군터에 서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면서 당시의 주변환경과 역사적 맥락을 더듬고 상상의 나래를 편다.

11일 조반을 마친 대회 참가자들(제주, 거제, 함양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 온 사람들)은 금산을 오른다. 단풍으로 물든 나무들이 산길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약700m를 오르니 큰 너럭바위에 서복이 새겼다고 전해지는 석각(徐市日出起禮)이 눈에 들어왔다. 이 석각이 서복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대회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 다음날(12일) 대회참가자들이 썰물처럼 모두 빠져나간 자리에 나 홀로 서 있다. 9시 정각 차 한 대가 머문다. 남해역사연구회 김봉윤 소장이 약속한 시간에 와주었다.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의 일부(또는 전부)를 만든 분사대장 도감터를 둘러보기 위함이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에 불력으로 몽골을 물리치겠다는 신념으로 만들었는데(1236-1251), 여기 남해에서 그 작업에 참여했던 사실이 근래에 명백해졌다. 몽골의 고려지배 당시에 강화도가 아닌 남해도에 그 진본이 숨겨져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씨 정권 말기 정안(鄭晏, 최이의 처남)이 사재를 털어 남해에서 판각을 주관했고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여기 정림사 주지로 12년간 머물 때(1249-1261) 참여했었다. 이규보는 여기 남해에서 대장경 판각작업을 마친 후 그 재료와 인력을 동원하여 『동국이상국집』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특기할 일은 『조당집(祖堂集)』이 팔만대장경의 부록으로 실려 있음을 1922년 일본학자에 의하여 발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남해에서 판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조당집』은 인도, 중국, 신라의 고승열전으로 10세기 중국 복건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놀랍게도 팔만대장경에 끼어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 사전지식을 갖고 나는 김봉윤 소장을 따라 나섰다. 대사리 초입 언덕에 정안의 집과 정자의 터가 주춧돌만 남아있다. 오곡(梧谷)을 지나 봉명정(鳳鳴亭)터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금음산, 녹두산, 삼봉산, 사학산이 점점이 솟아있고 동쪽을 굽어보니 망망한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혜심(진각국사)의 시구가 생각난다. 山點點 水茫茫‧‧‧

우리는 골짜기로, 언덕으로 두루두루 다닌다. 정림사, 백련암, 선원사, 길상암 터에는 주춧돌만 남아있고, 고려 때 제작한 기왓장 조각이 뒹굴고 칡넝쿨에 감겨있다. 정비하거나 발굴조사가 늦어지거나 도외시되는 현실이 슬프다.

북쪽 산정을 에워쌓은 거대한 성은 대국산성(大國山城)이라 한다. 김봉윤 선생은 골짜기 어디에 팔만대장경 제작을 지휘했던 대사(大寺)가 있으리라 추측하며, 대사는 큰절이라는 뜻보다는 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절일 것이라 확신한다. 김 소장이 2시간 동안 보여주고 설명하는 것을 다 기억할 수 없어 여기에 옮기기도 자신 없는 일이다. 언제 다시 찾아와야 할 것 같다. 이즈음에서 팔만대장경과 유존혁 장군의 연관관계에 관하여 부질없고 어이없는 상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돌아오는 길, 남해터미널에서 버스를 탄 나는 관음포에서 내렸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최후를 맞이한 후 그 영구가 안치되었던 곳이다. 나는 이순신 장군을 추념하는 사당 이락사(李落祀)에 참배했고 여러 상징물들을 살펴봤다. 빵 두 개, 캔커피 하나로 간단히 볼가심을 한 후 나는 7.2km의 이순신 순국길을 터덜터덜 걸었다. 해변길을 지나면 모래사장이 나오고 언덕을 오르면 산길에 접어든다. 낙엽이 노랗게 깔려있다. 산길을 벗어나 해변을 한참이나 걷고 두 개의 남해대교 밑으로 지나는 동안 사람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었고 구멍가게조차 보이지 않았다. 12시부터 2시 반까지 걸었다. 허기지고 다리가 뻐근하다. 남해대교 초입에서 부산행 버스에 올랐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나는 조용히 앉아서 불력으로 몽골을 물리치겠다며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고 이를 숨기고 옮긴 고려인의 의지와 희생에 대하여 대하소설을 쓰고 싶다는 의욕을 잠깐 가져봤다. 거기에는 남해의 역사와 자존심이 오롯이 담겨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나는 이미 총기가 사그라지고 있으니 의욕만 가지고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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