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김희열/ 제주대 독일학과 교수

독일의 바이로이트 바그너 축제극장은 특이하게도 정치와 예술 사이에서 많은 부침을 겪었다. 이 극장은 바그너의 구상에 따라 지어졌고,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오늘날까지 그의 작품만을 그것도 1년 중 여름에만 한 달 정도 공연하는 콘서트홀이다. 지금도 바그너 악극공연이 있을 때 연미복과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독일 및 유럽의 주요 정치가들과 애호가들이 바이로이트를 방문한다. 아주 오래된 극장시설임에도 불구하고 바그너 악극은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어서 관극 표를 미리 구매하지 않으면 공연은 보기가 어렵다.

이 축제극장은 바이에른 왕 루드비히 2세의 여러 도움으로 완성되었는데, 그는 1864년 18세의 나이에 아버지 막시밀리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이후 바그너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예술에서 존재의 의미를 보았고, 이들은 실제로 바그너 작품 상연을 위한 전용극장을 뮌헨에 짓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성사되지 못했고, 나중 바이로이트에 바그너의 아이디어대로 콘서트홀을 건립하게 되었다. 바그너는 1871년 5월 12일에 그로부터 2년 후에 바이로이트 음악축제를 열어서『니벨룽의 반지』를 공연하겠다고 미리 공표하였다.

한편으로는 1872년부터 바그너협회와 독지가들 그리고 루드비히 2세의 지원과 더불어 축제극장 기금 마련에 들어갔으며 이후 바그너는 그 목적을 위해서 자주 유럽 여러 곳에서 연주여행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1872년 봄 바그너 가족은 바이로이트로 이사해서 얼마간 세 들어 살다가 2년 후 루드비히 2세의 지원을 받아 지어진 새로운 집 “반프리트”(광기+평화의 뜻을 담고 있음)에 정착했다. 바그너가 직접 집 이름을 ‘반프리트’라 명명했고, “여기 반프리트에서/ 내 광기들이 평화를 발견하였다”라는 명패구절에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마침내 평안에 이르게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드디어 1875년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건립되었고, 이곳에서 1876년 여름『니벨룽의 반지』가 초연되었다. 이 첫 개관 공연에 독일의 황제 빌헬름 1세가 참관함으로써 사회·정치적으로 이 축제극장의 의미가 크게 부각되었고, 바그너의 명성과 이름은 유럽에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그럼에도 바그너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크게 상반되게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음악비평가들이 거의 예외 없이 바그너 음악과 그의 주도권에 대해서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당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관객은 일반시민이 아니라 대부분 유럽의 귀족들이어서 바그너의 음악은 귀족을 위한 예술이며 1876년 『니벨룽의 반지』 초연은 “예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실패작”이라고 혹평받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바그너협회가 창설되었고 1871년 만하임에서 바그너애호가 그룹이 구성된 이후 독일 여러 곳에서 유사한 그룹이 생겨났다. 이들의 목적은 바그너의 예술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것이었으며 그 열광은 바그너를 우상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이후 바이로이트와 반프리트는 바그너 애호가들의 성지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적 성향은 내셔널리즘과 반유대주의였으며, 바그너와 그의 가족, 그 중에서도 바그너의 아내 코지마(음악가 리스트의 딸)와 그의 사위였던 챔벌린이 반유대주의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였다. 바그너 애호가였던 챔벌린은 원래는 영국인이었으나 나중 독일인으로 귀화해서 반유대주의를 바이로이트에서 강화시켰고 바그너 가족과 히틀러와의 친분구축에도 일조하였다.

바그너가 사망한 이후 1901년까지 코지마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운영을 책임졌다. 그녀에 의해서 짜인 바그너 악극들의 상연 계획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으며, 오직 바그너 악극만 1년 중 약 한달 간 7월 하순에서 8월 사이에 공연되고 있다. 1차 대전 중에는 작품상연이 없었고 경제적 위기로 인해서 10년 동안 공백이 있다가 1924년 전쟁이 끝난 후 공연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때는 독일의 정치적 분위기가 바뀌었고, 특히 바이로이트에서는 국가사회주의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더구나 1923년에 바그너 음악의 열렬한 찬미자인 히틀러가 처음으로 바그너 가족의 손님으로 반프리트에 왔고, 바그너 가족들은 히틀러를 아주 가까운 친지로써 받아드렸다. 특히 바그너의 며느리였던 비니프레드와 히틀러의 친분관계는 아주 돈독했다. 그녀는 히틀러를 열렬히 찬미하였고, 히틀러는 1933년 제국수상으로서의 권력을 쥔 이후에도 꾸준히 바그너가족과 그의 악극을 보러 바이로이트로 왔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손주들에게는 존경하는 삼촌처럼 여겨졌고, 그와 나치시대 주요 인물들이 1940년까지 바그너 축제극을 참관했고 경제적 지원도 했다. 그래서 나치시대에는 바이로이트가 히틀러의 도시이며 바그너 축제극장은 ‘히틀러의 극장’이라 여겨질 만큼 음악과 정치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면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또 고인이 된 이후에도 바그너의 예술관과 입장은 극우주의 및 반유대주의에 크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2차 대전 이후 순수 문화공간으로서의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많은 과제들이 있었다.

그런데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사례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런 극장의 생존은 불가능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경제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바그너극장은 히틀러와 제3제국의 주요 인물들과 연관되어 있었고, 바그너 집안은 반유대주의 정서가 강했기 때문에 적폐청산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극단적 지탄이나 단죄의 대상이 되지 않은 데에는 전통적으로 독일이 문화국가라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바그너는 비록 히틀러가 가장 존경한 음악가라 하더라도 시대를 초월한 국가의 문화자산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으며 이 축제극장의 존재는 바이로이트라는 작은 도시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어 준다는 실리적 이유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바그너 집안과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 대한 여러 사회적 지탄이 없지는 않았으나, 2차 대전 이후 바그너 축제극장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두고 재출발하는데 성공하였다.

1951년 히틀러의 찬미자였던 비니프레드 바그너가 극장장에서 물러나고 그녀의 아들들인 빌란트와 볼프강 바그너가 그 직을 물려받음으로써 정상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66년 빌란트의 때 이른 죽음으로 볼프강 바그너가 단독으로 축제극장을 이끌면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정치의 색을 배제한 예술의 장소로 변모되었고 국제적으로 바그너 관객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게다가 70년대부터는 외부 연출가에 의해서 바그너 악극들이 준비되었고 이 방향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60년대 이후 순수 예술극장으로 변모되어서 바그너 가문에 의해서 그의 악극만이 상연되는 전 세계에서 그 사례를 볼 수 없는 예술극장이 되고 있다.

원래 바그너의 생전 구상에 따르면 이 축제극장은 ‘니벨룽의 극장,’ 즉 4부작(‘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그프리트,’ ‘신들의 황혼’)으로 이뤄진『니벨룽의 반지』공연을 위해서 지어졌다는 점에서 이 작품공연과의 연관성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작품이 없었다면 그의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 대한 구상은 전혀 다른 형태이거나 다른 곳에 혹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니벨룽의 반지』는 총 상연시간이 15시간이 넘으며 각 작품의 상연시간이 짧은 경우 2시간 반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오케스트라 연주, 군중장면, 무대미술과 장치 및 의상을 통해서 매번 아주 현대적 연출이 가능하다는 점으로 인해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에서 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예를 들면 올해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도 예술의 전당에서 11월에 4부작의 첫 작품인 ‘라인의 황금’이 독일과 한국의 음악가들에 의해서 성황리에 공연되었다.

우리의 경우 전통적 음악극이라고 할 수 있는 1인 오페라 ‘판소리’의 상설무대가 있다면 어떨까? ‘판소리’의 개작이나 새로운 판소리 레퍼토리를 통해서 외연확장도 가능할 것이고, 전통적 방법으로는 장구와 판소리 장인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공연이 가능한 세계적 문화아이템이다. ‘판소리’의 전용무대나 상설공연은 규모로 본다면 스펙터클한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축제극장과 가장 대비되는 세계에서 가장 작지만 강한 인상을 주는 음악극 무대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판소리’의 부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세계적 상설무대로 만들 수 있는 예술가가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제주에서 민요나 노동요를 통한 악극 창조와 상설공연은 불가한 것일까?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