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 전문의 전영웅

이 글은 이유근 원장의 <[반론] ‘녹지병원 개원 허가에 즈음하여’에 대한 비판을 읽고>에 대한 재반론이다. 관련 글타래는 하단의 관련기사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다. 녹지병원 개설 허가로 인한 논란이 인 뒤, 이유근 원장과 전영웅 전문의가 각각 녹지병원 개설 허가에 대한 찬성과 반대 논리를 두 차례씩 보여주었다. 이번 글로 영리병원에 대한 두 분의 논박은 마무리한다. 열띤 논의를 전개한 두 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편집부>

최근 회계부정으로 논란이 인 삼성 바이오로직스의 상장유지가 결정됐다. 거래소는 공익실현, 투자자 보호 등의 이유를 내세웠지만 국내 경제관념의 기준이나 기업 윤리 측면에서 비판과 허탈함이 쏟아지고 있다. 이재용의 사면부터 소위 ‘삼바 사태’까지, 권력은 유독 삼성자본에 약한 모습을 연이어 보이고 있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다.

회계규모나 범죄사실이 ‘삼바 사태’보다 덜한 미국의 엔론사태는 회장이 24년 실형을 선고받고 회사는 파산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경제 질서와 연관해서는 엄격한 법 적용을 고수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살인적인 의료수가, 가입하기 어려운 국가의료보험과 민간보험 그리고 이 원장이 강조는 소송비용 등의 이유로 아수라장이 된 미국의 의료체계에 대해서는 어째서 국가가 관여하지 못하고 있을까? 한국의 건보체계를 칭송하며 일부 도입하겠다던 오바마의 의료개혁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기반으로 엄격한 선택을 해온 미국의 권력이, 자국 내 의료자본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권력은 이미 자본에게로 넘어갔다’고 항복을 선언한 지 10년이 넘었다. 국가가 관여할 여지가 많았던 케인즈주의 이후로 이어진 신자유주의 시대는 자본권력이 국가권력을 월등히 넘어선 시대이다. 모든 것은 자본력과 이윤으로 계산되는 시대에, 이 원장이 자본을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 나이브하다. 영리병원과 면밀한 관계가 없는 권력과 자본이야기로 서두가 길었던 이유는 이 때문이다.

자본이 수단이자 목적이 된 세상에서 영리병원은 수익창출을 목적으로 하고, 당연하게도 투자한 이들의 수익을 위해 운영된다. 진료가 1차적 목적이면서 진료의 결과로 발생한 수익을 병원에 재투자 하거나, 개인의원 원장이 가져가는 현재의 한국의료체계와는 관점 자체가 다른 구조인 것이다. 국가가 수가를 통제하는 의료체계에서 개인의원을 운영하며 발생한 수익을 가져가는 것은 수익발생 관점에서는 영리병원과 비슷하다고는 할 수 있다. 그러나, 통제된 수가환경과 사회 안에서 의원의 역할과 목적 등등을 생각하면 영리병원과는 전혀 다르다.

자본은 영악하다. 현 시점에서 녹지병원이 내국인 진료를 하겠다고 고수하는 것은 이 원장의 예측대로 희망적이지 않은 앞날의 손해를 메우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자본이 그런 손해를 예측하면서 장난삼아 제주에 녹지병원 건설과 운영을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런 결정을 했던 시기는 분명, 제주 곳곳에 떼로 몰려다니던 유커들이 이 섬의 땅과 바다를 뒤덮던 때였다. 그것이 사드사태를 만나 중국이 제재를 가하면서 녹지병원의 운명도 현재와 같이 된 것이다. 종종 자본논리를 벗어난 경제정책을 강요하는 중국의 움직임에, 자국의 자본 역시 예측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당한 것이다. 자본 자체가 절대 영악하지 못해서 이런 사태에 빠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리병원으로 인해 자본이 의료를 잠식할 틈과 기회를 얻었는데, 자본이 정부의 통제하에 고분고분할 것이라는 생각 역시 나이브하다. 자본은 국가 권력과 경쟁할 것이다. 저수가에 눌려있던 의료행위가 영리병원을 만나 이룰 것은 의료비 상승밖에 없다. 영리병원의 옆자리에는 민간보험 자본이 자리할 것이다. 상승된 의료비를 민간보험이 보장의 폭과 범위를 서서히 늘려가면, 결국에는 국가의료보험과 경쟁할 수밖에 없다. 마치 LH공사가 다른 민간건설사와 경쟁하듯 말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지는 LH공사가 주택보급 목적을 떠나 다른 건설사와의 경쟁을 통한 수익창출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 예측할 수 있다. 건강보험은 민간보험을 점점 닮아가거나 잠식되어 갈 것이다. 이 원장이 보기에 이런 시나리오는 영리병원 반대파에서 숱하게 해 왔던 주장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지 않으리라는 장담은 가능할까? 그리고, 이후의 국가의료체계가 점점 잠식되고 축소될 것이라는 예측이 틀렸다고 장담할 근거는 존재하는가?

이 논쟁에서 굳이 내세우지 않으려 했던 영리병원 반대 측의 통상적인 논리나 시나리오를 꺼낸 건, 이 원장이 영리병원 역시 국가에 의한 수가통제를 받을 것이라는 다소 순수한 주장을 여러 곳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주장이 순수한 만큼, 통상적인 반대논리 역시 다시 한 번 언급해도 될 만큼 설득력이 생겨버렸다. 영리병원이라는 것 자체가 투자한 만큼 열심히 운영해서 벌어가겠다는 것인데, 국가가 통제한다면 영리병원 자체가 의미를 잃게 된다. 국가는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권고 정도나 할 수 있을 뿐이다.

의료수가는 영리병원 운영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수준의 적정수가가 형성되고 해외의 사례나 국내 경제 규모나 물가수준을 적용해서 전문가의 개입 하에 결정될 것이다. 시장에서 상승하락하는 주식이나 물건값을 국가가 통제하면 그것은 시장경제의 교란이다. 의료시장 경제논리에 따르려는 영리병원을 국가가 역시 그런 식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원장은 수익을 투자자에 배당하느라 의료에 재투자하기 어렵고 비싸기만 한 영리병원을 누가 가겠냐고 반문한다. 의료의 아수라장인 미국에서 2018년 미국 100대 병원 순위 중 상위 20개 병원은 당연하게도 영리병원이 포함되지 못했다. 그것이 영리병원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하위 80개 병원과 미국 전역의 5400개가 넘는 병원들에 포함된 영리병원들은 곳곳에서 스스로의 생존방식으로 경영과 진료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실제 벌어지고 있는 지금 미국의 의료실정이 영리병원 존치의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고 의료의 국가통제를 너무 과신하고 있다. 영리병원이 허가되고 운영된다는 것 자체가 의료가 국가통제 영역을 벗어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애써 부정하거나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물론, 녹지병원 하나가 우리의 의료체계를 위협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영리병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길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현 정권의 보건복지부 관계자도, 현 정권 내에서 영리병원의 허용이 없다고 쐐기를 박기도 했으니 말이다. 국가 의료체계가 붕괴한다는 것은 이 원장의 주장대로 정권을 내어주어야만 하는 중대함이다. 그런데, 그런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면서 강렬한 체감없이 물이 흐르는 듯 진행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의료는 자본과 국가정책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요소도 농밀하게 포함하고 있어서, 문화적 요인이 변화의 경사를 더욱 완만하게 만든다면 의료시장은 특별한 저항없이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작은 개인병원에서도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는 문제를 두고, 굳이 크고 비싼 병원에 가서 치료받으며 만족감을 얻는 환자의 심리를 한 예로 들 수 있다. 구조적으로는 민간보험 자본이 이 변화를 만들어 내는 배후의 역할을 할 것이다. 국가의료체계 교란과, 국민의 삶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중요한 시점에 자본의 위협을 나이브하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전문가라면 이와 같은 태도는 더욱 경계해야 한다. 고삐 풀려 날뛰는 자본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현 시대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표면적인 정치, 그 이면에 위치한 자본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지적 수준이 요구된다.

이틀 전, 지상파 방송토론에서 영리병원을 찬성하는 측의 인사가 마지막에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 속 희망을 잘 찾아보자.’고 마무리한다. 영리병원 허가가 인간의 온갖 불행을 풀어 준 판도라 상자의 개방임을 그도 알고는 있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남은 희망을 찾자는 것,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행을 다 겪은 뒤 마주한 희망은 상대적으로 덜한 고통이나 불행일 뿐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지 않는 것이 맞다. 영리병원이 판도라의 상자라면 말이다.<외과 전문의 전영웅>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