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영철/ 한솔제지 퇴직. 트레킹작가. 세계 10대 트레일 완주/ 저서 4권/ 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 동해안 해파랑길/ 영국을 걷다/ 투르 드 몽블랑

여인은 늘 외톨이였다.

외딴 집에 홀로 살았다.

마을 사람들과 말을 섞는 일도 거의 없었다.

여인은 오랜 세월 신경쇠약 환자였다. 마을에선 공인된 사실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이 환자임을 알지 못한다.

언젠가는 평소 사이가 안 좋았던 이웃과 싸움이 붙었다. 그 집 멍석에 널어놓은 메주콩 두 말이 없어진 모양인데 콩 주인이 외톨이 여인을 범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억울한 여인은 펄쩍 뛰며 소리소리 질러 아니라고 항변했다. 콩 주인과의 말싸움은 살벌하게 평행선을 긋다가 어느 순간 여인의 완패로 끝났다. ‘그러면 경찰서 가서 따지자’며 콩 주인이 팔을 끌자 여인은 벼락치듯 뿌리치곤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그리곤 아무 말도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떨고만 있다. 모여든 구경꾼들 눈에는 누가 봐도 ‘도둑 제 발 저린’ 꼴이었다.

경찰이란 말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고, 멀리서 군인 모습만 봐도 얼른 몸을 숨기며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던 그 여인은 어느 날 자기 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주변에 남겨진 알약들로 보아 자살이었고, 사망한 지는 한달 가까이 된 듯 보였다.

평지보다 푹 파인 그 옴팡밭은 30년 전 마을 사람 수백 명이 한날한시에 군인들에게 총살된 네 개 밭 중 하나였다. 공포에 질려 아수라인 속에서 총살 직전 혼절해 쓰러진 덕에 총알은 그 여인만 피해갔나 보다. 군인들이 철수하고 한밤중에 정신이 깬 여인은 자기 위에 겹겹이 쌓인 시체더미를 헤치고 혼자만 기적처럼 살아 돌아왔다. 함께 끌려왔던 어린 자식 둘도 주변 시체 더미 속 어딘가에 분명 있을 터였다. 허나 완전히 넋이 나간 여인이 그날 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순이’라는 이름의 26세 이 여인은 이후 어떤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두 아이를 잃고도 울음이 나오지 않은 것은 공포로 완전히 오관이 봉쇄되어 버린 때문’이었던 그 여인, 남은 인생을 어찌 온전한 의식으로 살아낼 수 있었겠는가.

시신으로 채워진 그 옴팡밭엔 한동안 수백 마리 까마귀 떼가 몰려와 밭 전체를 시커멓게 뒤덮었다.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쪼아먹고 파먹었다. 거의 뼈와 해골만 남은 시신들은 석 달 후에야 동네 사람들 손에 수습되었다.

여인에겐 그 밭에서의 농사가 생명줄이었다. 송장거름을 먹어 비옥해진 옴팡밭에선 이듬해 고구마 농사가 풍작이었다. 어린 두 자식은 총탄에 잃고 자신만 살아난 ‘비정한’ 여인은, 자식 죽은 바로 그 옴팡밭 속에 묶여 김 메고 농사지으며 살았다. 혼자 밭 일구며 한 해 한 해 살아낸 세월이 어느덧 30년, 결국 그녀는 그 옛날 자신이 두 자식과 함께 한 번 죽었던 그 옴팡밭에 누워 스스로 생을 마쳤다.

4.3 70주년 한해가 끝나가는 지난해 12월 16일, 친구와 ‘이덕구 산전’을 찾아가보려 했던 일정을 비 때문에 취소하고 혼자 북촌리 너븐숭이엘 갔었다. 옴팡밭 여기저기 널브러진 비석들을 우산 들고 하나하나 눈여겨 보았다. 소설 ‘순이 삼촌’ 속 문구들이다. 그 시절 여인의 아픈 삶이 머릿속을 메운다.

‘오누이가 묻혀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 갔다.’

‘그 죽음은 한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삼십 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삼십 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삼십 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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