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5월 한림읍에서 출생, 제주서초등학교, 제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보건정책학과 석사- (전)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KAPHC) 회장- 한국장애인보건의료협회(KAHCPD) 부회장-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장- 제주대안연구공동체 이사장- 열린의사회 재난의료구호팀 팀장- 탑동365일의원 원장

대다수의 사람들은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큰 부담 없이 받기를 원한다. 제주 탑동365일 의원 고병수 원장은 ‘주치의제도’를 통해 이런 바람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늘 강조하는 의사다.

주치의(主治醫)란 ‘정해진 환자를 주로 치료하는 의사’란 의미와 때론 ‘나와 가까이 있고, 나를 잘 알면서 진료해주는 의사’로 풀이된다. 다시 말하면 동네에 있는 단골병원 의사가 주치의 역할로 제격이라는 얘기다.

그는 “동네 병원을 쇼핑하듯 이 병원 저 병원 기웃거리는 의료소비자와 기계에서 찍어내듯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진료와 처방을 끝내는 의사들의 모습이 우리나라 의료현실이다. 이것이 ‘왜 주치의제도인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라고 말한다.

고 원장은 이처럼 의료에 관한 제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진료하는 고병수 원장

그를 만났다. 왜, 의사였는지 궁금했다. 그는 "학교 선생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많이 다녔다. 그 당시는 운송수단이 마땅치 않아서 한 번 그 학교로 전근가면 보통 6~7년 근무를 했고, 거기에서 집을 얻어 살았다. 가는 곳마다 형과 누나들이 태어나서 그 지역 학교를 다녔다. 나도 한림공고를 다니시던 아버지 탓에 한림읍에서 태어났으나 아홉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칠삭둥이여서 황급히 제주시내 의원을 거쳐 비행기를 타고 세브란스병원으로 날아가 인큐베이터에서 몇 달을 살다가 겨우 살아났다고 한다"라고 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고, 초등학교 4학년 때 몸무게가 24kg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허약하고 툭하면 아팠던 탓에 다른 사람들을 고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던 것 같다. 그래서 파브르 곤충기나 시튼 동물기 등 생물들과 관련된 자연과학 관련 책들을 좋아했다. 의과대학 들어갈 때까지 한 번도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바꿔본 적은 없다"라고 의사는 자신에게 필연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사회 현실 문제에 관심을 두는 이유를 물었다. "형과 누나가 많아서 그 영향을 받았던 것 같지는 않다. 책상 앞에 그 사람 사진을 붙여놓고 본받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평범한 애국심을 가졌던 아이였는데 중학교 3학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은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이었다. 뭐가 뭔지 모르는 정치 상황 속에서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제주도내에서 두 학교만 있었던 ‘흥사단 아카데미’라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다소 사회 정의를 생각하게 되었고, 책을 많이 읽으면서 다소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뜨였던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나고 군인들이 총을 들고 공공기관을 지키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고, 광주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식들은 어린 나에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내용들이었다"라고 하면서 "친구와 같이 정치를 풍자하는 소극장 연극을 보러가기도 했고, 친구들과 나름 정치사회에 대한 의견들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우리에게는 어떤 자료나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4년 쯤, 재수하던 시절이었는데 대학에 들어간 친한 친구들 상당수가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몇몇은 수배를 받았다. 수배를 받던 친구들은 재수생인 나와 몰래 만났고, 밤새 시국에 대한 토론을 하기도 했다. 아마 그러한 영향이 사회에 대한 정의를 심어준 동기가 아닌가 싶다. 뒤늦게 들어간 의과대학에서는 당연히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고, 그러다보니 의과대학을 8년이나 다녀야 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러면서 "안 하던 공부를 하면서 겨우 의과대학 졸업과 의사 국가고시를 통과해서 의사가 되었지만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멍청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수련의(레지던트) 기간 동안에는 정말 많은 공부를 하면서 실력을 쌓았다. 내가 세브란스 병원의 수련의 매뉴얼을 만들 정도였으니..... 세브란스병원 연구강사까지 마치고 구로에 개원을 했다. 의사는 환자가 많은 게 실력을 인정받는 길이고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거라는 선배들로부터의 통념을 알고 있었고 나 또한 그렇게 하려고 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하면서 제법 환자 수도 많아졌고, 구로 지역에서 인지도도 높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교 때 알던 선배가 병원을 찾아와서 사회정책을 연구하는 연구소를 만들고 있는데 참여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 당시에는 노무현 정부가 삼성경제연구소와 연계되어 우클릭하는 모습을 보이던 차였고, 과거 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사회 진출해서 생활하던 중 마음에 하나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가 많이들 연구소 창업에 함께 하게 되었다. 나도 그 중에 한 명이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이다. 당시로서는 민간연구소 중에 박사급 연구원 10여 명을 두고 있었고, 민간 10대 경제연구소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거기에서는 여러 분과가 있었고, 나는 보건의료분과에서 여러 명과 공부도 하고 토론도 했다. 이전에 가졌던 의사에 대한 상이 그 때 벗겨지기 시작했고, 한국 보건의료의 문제, 주치의제도에 대한 신념 등이 그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의과대학 졸업 후 희미해져갔던 사회에 대한 시선도 다시 진해지기 시작했다. 처음 개원을 했던 구로에서 홀몸노인(독거노인)이나 거동이 힘든 장애인 방문 활동을 열심히 하기도 했고, 해외 의료활동을 하기도 했다"고 얘기를 이어갔다.

다양한 활동으로 현실문제에 참여하고 있는 고병수 원장

이어서 "나는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의사라고 특별히 사회적 관심을 기울이는 게 이상하다고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 사회가 가지는 의사에 대한 시각이 보수적이거나 좀 특별하게 보기 때문에 나처럼 활동하면 특이하게 보일 뿐이다. 어쨌든 학생운동 시절과 새사연 활동,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활동 등이 이후 여러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고 자신이 사회문제에 관여하게된 동기를 털어놨다. 그는 지역의 문제, 즉 제주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크다. 제주 지역의 총체적 대안 이야기에 대해선 "제주를 제주답게 하면서 지역 경제를 살리는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데 도나 도의 정치인들의 노력이 다소 부족하다고 본다. 그것은 정치인들이 임기 내에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조급함과 지역에 대한 이기주의가 한 몫 하고 있다고 본다. 전문가들과 관련자들이 오랜 시간을 두고 연구하며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금 제주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에 대해선 "개발 논리이다. 이전까지의 도지사나 정치인들이 그랬고, 현재의 원희룡 도지사조차 철학과 원칙이 없는 도정을 이끌고 있다. 그런 면에서 현재 제주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지속가능한 제주’에 대한 장기적 이정표와 도민 합의이다. 그 이정표는 결국 제주도의 책임 정치인들이 만드는 것이지만 그 과정은 전문가나 관련자들과 함께,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개발 논리가 아닌 환경과 생태가 보존되면서도 제주 시민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한다.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다. 그는 "선거 과정이나 도정을 이끌 때 조급한 정책 마련이 문제이고, 더 큰 문제는 도지나사 도의 정치를 책임지시는 분들의 철학 부재이다. 제주도의 특징과 이에 바탕을 둔 미래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 깊은 고민이 없지 않나 의심스럽다. 지금 당장 도로를 뽑고 대단위 단지를 건설하고, 대형 위락시설을 지으면 당장 5년의 경제는 살릴지 모르지만 10년, 50년 이후의 제주 경제는 오히려 후퇴하거나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져서 힘들어질 수 있다. 그 예는 수없이 보아왔다. 탑동 매립 사태, 섭지코지 개발 사태, 강정해군기지, 신화역사공원 사태 등..... 하지만 지금도 그러한 무책임한 시도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데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제2공항 문제, 관련된 비자림 벌목 사태, 지금은 취소 수순에 들어갔지만 영리병원 문제, 한림읍 금악리에 계획하고 있는 신화련금수산장 문제, 송악산 뉴타운 건설 문제 등.... 대부분 개발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제주도가 개발 이외에 지역경제를 살릴 방법이 그렇게도 없는가? 아니면 개발업자들과 한 통속이 되어서 그러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머리가 없는 건가 걱정이다"라고 얘기한다.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물었다. 고 원장은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정책의 경우에 시간이 들더라도 전문가들과 관계자들의 충분한 의견을 물은 후 공론화 과정을 또한 충분히 거쳐야 한다. 대부분 정책을 수행할 때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보여도 빨리 진행하려고 하다 보니 무리수를 두는 것이다. 제주시 버스전용차로 문제나 쓰레기 요일제 문제는 최근 시민들이 불편해 하는 실패한 정책 중 하나이다.

두 가지 예를 들겠다.

모두 독일의 예지만 하나는 독일의 주치의제도 도입 과정이다. 지역사회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주치의제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독일도 오래도록 이 제도를 도입하려고 시도했는데, 아직도 논의를 거듭하다보니 몇 개의 주에서만 시행하고 전 국민이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두 번째 예는 독일의 탈원전 과정이다. 2011년 3월경에 독일은 탈원전 공론화를 위해 ‘에너지 윤리 위원회’를 구성해서 논의를 시작했다. 위원들은 총 17명이고 여기에는 원전 관련 과학자는 물론 기업인, 종교 지도자, 사회학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인사들이 골고루 들어가서 토론과 검증 과정을 벌였다. 기간은 짧지만 100여 차례의 회의와 TV 공개 토론회 및 시민 공청회가 있었고, 이런 심도 있는 논의 끝에 윤리위원회는 결국 원전은 안전할 때 폐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국민 갈등도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우리 제주에서도 좋은 예가 있다. 영리병원과 관련한 시민공론화 과정..... 결국 중요한 도 정책의 경우에 충분한 논의나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오랜 시간과 공력이 들어간다고 해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의료얘기로 돌아가 고 원장에게 일차의료의 중요성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일차의료는 이미 선진 외국들은 상당 수준 발달이 되어있고, 국가 보건의료 정책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어진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 쪽은 후진적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제도의 미비이다. 일차의료란 일차의료 전문의와 관련 보건의료 인력들이 협력하면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웬만한 건강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하는 보건의료의 중심 제도이다. 그러기 위해서 대부분의 전문의들은 동네에 개원을 하면 안 되고 전문병원이나 종합병원에서 전문적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많은 전문의들이 모두 개원을 할 수 있고, 정작 일차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들(가정의학과 의사)의 역할은 왜소해지고 말았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리고 전문의에 대한 생각도 물었다.

"전문의제도는 1917년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소정의 시험을 통과하면 의사가 되었고, 대부분 지역사회로 가서 주민들을 돌봤다. 그들은 분만도 하고, 아기들부터 노인들까지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료를 했다. 외과수술은 물론 동네 사람들이 필요한 진료는 웬만큼 다 할 수 있어야 했다. 물론 몇몇 전문의는 있었지만 도제식 교육에 의한 것이었지 법과 제도가 받쳐주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시작한 제도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한국은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여전히 지역 중심의 일차보건의료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일차보건의료에도 전문의 제도를 만들었다. 그것이 일차의료전문의제도이고 그렇게 수련을 받은 의사들을 일차의료전문의(GP, General practitioners)라고 불렀으며, 국가 보건의료의 기본 틀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나라의 50% 정도를 일차의료전문의로 양성을 하려고 하지만 한국은 90%가 단과전문의이다. 한국은 늦게 도입한 전문의제도를 지나치게 맹종한 나머지 지역 중심의 보건의료시스템은 등한시해버린 것이다. 공중보건의제도 빼고는....

전문의제도는 좋은 제도이다. 하지만 국가보건의료체계를 생각하면 지역 중심의 보건의료를 강화하면서 여러 전문의들을 양성해야 옳다. 한 예로 한국의 이비인후과의사는 인턴 과정을 포함하여 5년을 수련 받는데, 전문의로 지역에 나와서는 감기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그들은 원래 외과 계통의 의사인데.... 선진 외국들은 거의 GP가 동네를 책임지고, 정말 전문의가 필요한 경우에 종합병원이나 전문병원으로 가기 때문에 거의 모든 전문의들은 개원가에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한동안 제주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영리병원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었다. 그는 "영리병원 문제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 경제정책을 설계하던 중 제안된 것이다. IMF를 겪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여러 경제정책을 구상하던 중 일부 의료학자들의 의견을 들어 싱가포르 등 모델을 좇아 준비되었다. 시도만 여러 번 하다가 결국 제주도에 첫 영리병원 허가에 이르렀다.

영리병원에 대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경제를 상업주의로만 성공시킬 수 있다는 후진적 사고가 문제이다. 국민의 기대에서 시작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이런 정책을 구상했다는 것은 정부 정책을 입안할 때 철학의 빈곤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그 시기는 지식기반을 바탕으로 한 경제 정책을 세울면서 미래를 길게 보고 건설해야지, 영리병원 정도를 생각했다는 것은 한참 후진적인 사고, 즉 철학의 부재이다.

둘째, 한국의 보건의료 상황에 대한 분석이 모자랐다. 허약한 건강보험 재정, 의료 보장성 60%(선진국들은 80% 넘음... 이것은 거의 무상의료에 가까움) 정도에 일차보건의료도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돈벌이를 중심으로 한 영리병원을 꺼낸다는 것은 지반이 약한 토지 위에 새 집을 짓겠다는 것에 다름없다.

셋째, 외국은 굳이 영리병원을 막지 않는다. 하지만 튼튼한 보장성과 의료제도 위에 필요한 만큼 허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보장성 80% 될 때까지는 영리병원 문제는 논의 대상에 올리지 말자는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조차 못 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이런  제안을 영리병원 조건부 허용이라는 왜곡된 표현으로 인용하면 안된다고 덧붙였다.

평소 그가 생각한는 ‘질 높은 의료서비스’란 "의료소비자인 시민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된다. 즉, 적절한 비용과 훌륭한 진료 기술 및 시스템, 편안함과 안정성 등을 말한다. 우리는 어느 수준에 있을까 생각해 보면 된다"라고 말한다.

고 원장이 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은 결국 제주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원래 제주도 일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는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제주도에는 인물이 많기 때문에 굳이 나까지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나는 주로 국가의 정책을 생각했다. 새사연은 그런 고민을 풀 훌륭한 연구소였고.... 경제 정책, 주택정책, 도시계획 등 여러 연구나 노력 중에 주치의제도를 비롯한 보건의료 정책은 나의 전공과 맞아서 깊이 연구할 수 있었다. 결국 장애인건강주치의제도를 제도화 하는데 역할을 했고, 주치의제도와 보건의료 인력들을 협력을 중요시 하는 여러 학회에서 중요한 일들을 하게 되었다. 결론지어 말하면 제주도민들의 삶의 질만을 위한 것은 아니고 정체 국민을 대상으로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그 혜택은 제주가 가지게 될 것이기에...."라고 정리한다.

해외 진료봉사활동 모습(2013년 5월, 캄보디아)

그는 봉사활동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서울에서 동네의원을 할 때는 거동이 불편한 주민들을 위해 방문진료를 해왔다. 제주에서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방문진료를 한다. (한국에서는 방문진료에 대한 수가는 없다.)

그리고 해외 오지에 진료를 가거나 재난의료팀을 이끌며 여러 재난 지역들을 다녔다. 스리랑카 내전이 끝나자마자 전쟁의 폐허 속을 다녔고, 필리핀 태풍 때, 네팔 대지진 때 등..... 재난의료팀은 재난 발생 시부터 지역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다가 재난 일 주일 안에 투입되어야 하는 일이다.

봉사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선 "대부분의 해외 봉사나 국내 의료 봉사는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 가는 사람들의 만족감이야 높을지 모르지만 그 정도로는 그 지역의 보건의료를 향상시키거나 건강증진을 할 수 없다. 결국 100년을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진정 의료를 통해 봉사를 하겠다면 후원을 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다"라고 하면서 "봉사는 이타주의에서 생겨난 방법으로 말 그대로 아무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 그 대상이 어려운 사람들인 것이고.... 목적은 없다고 본다. 다만 그 봉사가 훌륭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그 지역이나 사람이 변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주면서 진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색내기이고, 밑빠진 독에 물붓기일 뿐이라는 생각이고, 그러한 예를 수없이 봤다. 오히려 그 반대의 예는 오래 전 한국에서 의료활동을 펼쳤던 미국의 의사들이다"라면서 그는 지금까지 참다운 봉사를 생각하며 활동하고 있다.

고 원장이 꿈꾸는 고향 제주에 대해선 "제주는 내 인생에서 언제나 자랑스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는 제주가 비웃음을 당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것은 곧 내 꿈과 멀어지는 것이며, 그 반대가 내가 꿈꾸는 제주라 할 수 있겠다.

흔히 시민단체에서 얘기하는 생태, 자연, 공동체가 살아있는 제주이다. 제주는 우리가 살고 있지만 우리 소유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한 것들이 지금 제주를 망가뜨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제주 지역경제가 살아야 하는데, 흔히 말하듯 먹고 사는 문제냐, 보존이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가지고 가야 할 가치라고 본다. 누구나 공감하지만 실제에서는 망가뜨리고 건물을 짓는 것, 곶자왈을 없애고 도로를 뽑고 건물을 짓는 것들이 횡행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제주가 먹고 살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노력하는 것이 부족하고 이 또한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고 원장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 제안이나 내용들에 대해선 "훗날 자신에게 어떤 기회가 온다면..."라고 여운을 남기며 인터뷰를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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