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길 / 행정학박사, 前 언론인

지난 6월은 6.25전쟁발발 69주년이었고, 이달 7월은 휴전 66주년이 되는 달이다. 하지만 7월 27일이 휴전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싶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기억하여야 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을 자행하였다.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국군은 피침(被侵) 4일째인 28일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만다. 계속 밀리고 밀리며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했던 우리가, 전세(戰勢)역전의 기회를 잡은 것은 인천상륙작전이었다. 9월 15일 유엔군과 한국군은 인천에 기습상륙을 감행함으로써, 후방의 적군을 섬멸하며 북진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13일 후인 9월 28일, 우리는 수도탈환작전으로 마침내 대한민국 심장부인 서울을 도로 찾게 된다. 함락 당한지 꼭 석 달 만이었다.

6.25와 관련하여 우리 제주도에서 유독 ‘해병대’를 내세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당시 6.25참전군은 육군이 절대 다수이지만, 3천여 명이 ‘한꺼번에’ 해병대로 자원(自願)입대하여 출정한 것은 전사(戰史)상 극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천상륙’과 ‘서울탈환’의 주역들이 누구였는가를 잠간 살펴볼 필요가 있다. 6.25는 국군은 물론이고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과 함께 북한공산군을 상대로 한 전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해병대 특히 제주출신 해병들의 활약상은 대단하였다. 인천상륙전을 필두로, 서울수복과 도솔산전투․김일성고지작전 등을 통해 ‘무적해병’의 신화를 일궈내었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칭도 경남통영지구작전을 대승으로 이끈 제주해병들에 의해 얻어진 상징적 표어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티 없이 순수한 제주도의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조국이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자발적으로 지원하여 전선으로 달려갔다. 징집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용감무쌍하게 싸웠다. 가는 곳마다 적들을 물리쳤고 승리하였다. 중앙청에 맨 먼저 태극기를 게양하는데도, 우리 제주해병들이 앞장섰다.

그렇지만 이 용사들이 처음부터 숙련된 정예병은 아니었다. 해병대 3․4기생으로 불리는 이들은 10대 후반~20대 초반이 거의 전부였다. 전황(戰況)이 걷잡을 수 없이 긴박한 때인지라, 전투 기본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곧장 전방으로 향해야 했다. 인천으로 항해하는 함상(艦上)에서 소총사격술을 익혀야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급박한 상황이었겠는가. 그럼에도 이들은 제주인 특유의 투지와 애국심을 발휘, 실전(實戰)경험을 쌓으면서 점차 최강군(最强軍)이 되어 간 것이다.

이처럼 최강군의 일원이었던 우리 제주출신 해병들이 하나 둘, 저 세상으로 가고 있다. 40여 년 전, 제주시내에 거주하는 몇몇 해병 3․4기 전우들이 뜻을 모아 ‘해병제주동우회’를 결성하고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이들의 우국충정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이른바 ‘새까만’후배이면서도 억지를 부려 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당초 30명으로 출범한 이 조직도, 이제는 단 9명만이 참석한다. 대부분 별세를 했기 까닭이다. 그렇게 강인하고 용맹하였던 역전의 용사들이, 왜 이승을 떠나고 있는가. 연륜 탓이다. 휴전이 된지도 예순여섯 해가 지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대한민국해병대3․4기전우회장을 역임하였던 강창수옹이 어제(10일)운명하셨다. 남제주군수와 서귀포시장 등을 지내며 공직에 바쁜 몸임에도 불구하고, 모군(母軍)에 관한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나섰던 분이다. 더욱이 회장 재임 시 출판한 ‘6.25 참전실록’은 해병대전투사의 불후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6.25전쟁 연합군최고사령관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완수한 맥아더장군은 그의 퇴임사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그렇다. 6.25참전용사! 우리의 용감한 선배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들의 나라사랑, 숭고한 희생정신은 두고두고 우리들 가슴에 깊이 새겨져, 대한민국을 영원히 지켜나갈 것이다. 호국영령들이여! 안심하고 영면하소서.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