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60일 지정생존자 공식 홈페이지
사진=60일 지정생존자 공식 홈페이지

# "과정이 없는 정치는 국가폭력"

‘60일 지정생존자’라는 드라마가 화제다. 원작은 미국 드라마다.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관료들이 테러로 사망하면서 갑작스럽게 대통령 권한대행이 앉게 된다는 ‘미드’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다. 미드에서는 정치드라마가 꽤 인기 있는 장르다. 웨스트 윙, 하우스 오브 카드 등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은 드라마가 제법 있다.

한국에서는 오래 전 MBC에서 했던 공화국 시리즈가 있다. 1981년 제1공화국을 시작으로 해서 2005년 제5공화국까지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정치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던 때가 있었다. 정치 드라마는 ‘정치’를 다루기 때문에 정치적 외압의 대상이 되고 했다. 공화국 시리즈가 실재했던 정치사를 다루고 있다면 지정생존자는 가상의 정치 현실을 다루고 있다.

최근 이 드라마의 대사가 SNS에서 화제가 된 모양이다. 드라마에서는 명인 해군기지 확장 공사를 밀어붙이는 인물을 향해서 “과정이 사라진 정치는 법과 제도의 힘을 빌린 국가 폭력일 뿐입니다.”라고 외친다. 이 대사는 정치 리더에서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극중에서는 명인 해군기지라고 표현됐지만 드라마의 맥락을 보면 제주 강정 해군기지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2019년 5월 경찰처 인권침해진상조사위원회는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주민 의견이 배제되었고 절차 위반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 과정에서 주민과 활동가에 대한 인권침해가 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국책사업’, ‘안보문제’라는 명분이 민주주의 절차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조사 결과였다. 드라마 대사처럼 강정해군기지는 ‘과정이 사라진 정치’가 빚어낸 ‘국가폭력’이었다.

 

# ‘강정’, 과정이 생략된 폭력이 빚어낸 현재

강정해군기지 건설 문제가 제주 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더 많은 민주주의가 더 좋은 공동체를 만든다.’ 이 지극히 단순한 교훈을 배우기 위해 제주사회가 치른 대가는 너무 크다. 30도가 넘는 뙤약볕 속에서 '생명 평화'를 내세우며 5박 6일 동안 제주도를 행진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8년 동안 뜨거운 여름을 걷는 이유는 강정의 교훈을 잊지 말자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의 이런 노력과 달리 정치인과 관료들의 태도는 별반 달라지지 않은 듯 하다.

2015년 11월 이후 제주도 최대 현안이 된 제2공항 갈등의 근본은 ‘과정이 생략된 정치’에 있다. 공론화를 할 이유도, 주민투표의 대상도 아니라고 말할 때는 제2공항 추진의 주체가 아닌 듯한 태도를 취하다가도 제주도가 요청한 국책사업이라고 하면서 제2공항 추진에 명운을 걸겠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판단에 비전문가들의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동안 국토부와 제주도가 태도가 그러했다.

갈등의 원인이 제2공항 반대측에 있다고 했다. 대화는 하지 않으면서 개인 방송에는 꽤나 열심이었다. ‘제2공항 건설이 제주의 경제지도를 바꿀 것이다’라는 지사의 신념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믿음’에는 이유가 없다.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빚어지고 있는 한일 갈등의 이유를 문재인 정부에게 찾고, 심지어 일본 아베 수상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으니 ‘제2공항이 제주 경제 지도를 바꿀 것이다’라는 믿음이야 이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다. 다만 그 믿음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과정은 공정해야 하며 사회적 상식에 기반해야 한다는 점만은 강조하고 싶다.

# 한일 외교 문제도 결국 ‘과정’을 외면하는 일본 정치가 원인

국책사업이, 안보문제가, 경제 발전이, ‘달려 있다’는 이유로 과정은 종종 생략되어 왔다. 해방 이후 한국의 경제발전은 ‘결과가 곧 선’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은 용서가 되었다. 식민지의 경험조차도 ‘근대적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35년 동안 일본 강점 치하에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과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수많이 ‘과정’이 한국 현대사에서 생략되어 갔다. 정권을 잡기 위해서라면 학살도, 쿠데타도 용인되었다. ‘결과’를 위해서라면 배반과 훼절은 언제든지 숭상되었다.

최근 한일문제를 바라보는 보수 언론과 정당의 인식은 식민의 기억과 식민주의적 무의식을 의도적으로 외면할 때 어떤 언어를 생산해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35년간의 식민 체험과 1965년 한일협정, 그리고 이후 한일 관계의 ‘과정’은 보지 않고 화이트리스트 배제라는 ‘결과’만 바라본다. ‘경제문제가 아니라 안보문제다’, ‘정부의 대일외교 참사다’, ‘안보는 북한의 인질로, 경제는 일본의 인질로 만든 무능한 정권’. 보수 언론과 정당들은 한일 외교 문제를 잣대로 탄생부터 못마땅한 ‘정부’를 공격하고 있다.

연일 쏟아지는 언어들은 사뭇 거칠다. 언어가 힘을 지니기 위해서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좋은 공동체’라는 공공의 우물에 뿌리를 둔 비판적 사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쏟아지는 보수정당과 언론의 언어를 보면 공공의 우물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의문이다. 그들의 언어는 날카롭기만 하다. 어떨 때는 칼자루가 아니라 칼날을 잡고 흔드는 자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헌법 9조를 바꿔서 ‘보통국가’를 꿈꾸는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의도는 분명하다.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 전쟁범죄의 책임은 외면한 채 ‘대일본제국’의 그릇된 과거를 지향하는 그들이야말로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이다. 세상을 떠난 고 노회찬 의원은 ‘외계인이 침공하면 힘을 합쳐 싸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공동체’를 위협하는 불의에는 함께 맞서야 한다는 뜻일 거다. ‘과정’에 눈 감으면 누가 지구인이고 외계인지 구분을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금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2019제주생명평화대행진(사진=김재훈 기자)
2019제주생명평화대행진(사진=김재훈 기자)

# 개발, ‘과정’을 외면하는 또 하나의 폭력

‘성장’과 ‘개발’을 위해서 ‘과정’을 생략했던 시절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제2횡단도로’ 지금의 ‘5.16’도로를 건설에 동원됐던 ‘국토건설단’이 대표적이다. ‘국토건설단’의 시작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만들어진 ‘국토건설단 설치법’이다. 원래는 만 28세 이상의 병역미필자들을 구제하고 국토건설 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현역병 입대를 미룬 미필자들을 당시 각종 개발사업에 동원하기 위한 제도였다. 하지만 운영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해 1962년 관련 법이 폐지된다.

박정희 정부는 1968년 6월 전국 폭력배 일제 단속 방침을 밝힌다. ‘사회정화’, ‘사회악 일소’라는 명분으로 전국의 폭력배를 A, B, C 세 등급으로 분류해 제주도와 소양강 등의 공사장에 동원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지원자에 한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상 ‘강제 동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 ‘국토건설단원’ 1진이 제주도에 도착한 때는 1968년 6월 22일이었다. 1차로 도착한 100명의 ‘국토건설단원’들은 한라산 아흔아홉골에 수용된다. 이들의 임금은 하루 2백82원이었다. 이들의 도착 소식을 당시 제주신문은 “속죄의 삽 든 건설단원”, “국토개발하는 힘센 주먹”이라고 보도한다.

1968년 6월 22일 제주신문, 국토건설단 1진의 제주도착 소식을 전하고 있다.
1968년 6월 22일 제주신문, 국토건설단 1진의 제주도착 소식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언론의 보도와는 달리 이들의 처우는 열악했다. 폭력배뿐만 수용된 것도 아니었다. 갓 결혼한 새 신랑도 국토건설단원이 되었다. 당시 신문은 친구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한 자발적 지원이라고 보도하고 있지만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어야 할 새신랑이 ‘자발적’으로 강제 노역에 지원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제주 도착 첫날 환자도 속출했다. 결핵, 설사 환자뿐만 아니라 암 환자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수용 생활을 견디지 못해 탈출을 감행하는 이들도 있었다. ‘개발’을 위해서라면 폭력배라는 이유로 ‘강제 노역’에 동원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정화’ ‘사회악 일소’라는 강제 수용의 역사는 부산 형제복지원, 서산 간척단, 국토건설단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행되었다.

제2공항에 이어 신항만까지 과연 지금 우리는 '과정의 정치'를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가.
제2공항에 이어 신항만까지 과연 지금 우리는 '과정의 정치'를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가.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 풍요로움’은 수많은 비명을 먹고 자란 ‘피의 자식’인지 모른다. 우리가 ‘과정’에 눈감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지금 우리의 ‘꼬라지’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더 많은 민주주의’ ‘더 좋은 공동체’를 사유하게 만드는 힘이 아닐까.

‘탐라국 천년 해양관광 실크로드’가 마련되었다면서 신항만 건설 계획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제주도정을 보면서 ‘탑동 매립의 교훈을 잊어버렸는가’라고 묻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과정’을 외면하는 ‘성장’이 어떤 ‘꼬라지’를 낳는지 지금 우리 세대가 똑똑히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제2공항, 비자림로에서 어떤 것도 배우지 못한 제주도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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