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컬한 표정의 고양이
"혐오할 시간에 잠 좀 더 자면 안 되겠냐옹"(사진=픽사베이)

혐오의 근원이 경험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보면 거의 모든 혐오의 시작은 선입견이었다. 선입견이란 경험 이전에 미리 가지고 있는 편견을 말한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동조하면서 관념적으로 자리 잡는 경우도 있다. 뱀에 대한 혐오적 태도가 대표적이다.

대학시절 마당이 있는 집에서 자취를 했다. 창문 밖에 자그마한 텃밭이 있었다. 텃밭을 바라보며 왼쪽 끝에 옛날식 화장실이 오른쪽 끝에 대문이 있었다. 텃밭 뒤편에서는 옆집과 경계인 담장이 블록으로 쌓여있었고, 화장실 뒤편은 밭담을 경계로 보리밭이 있었다. 어느 여름날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담장을 천천히 미끄러져 움직이는 뱀을 보았다. 어디에서 나타난 걸까? 옆집에 살고있는 뱀일까? 설마 우리집 마당텃밭에? 아니야 뒤쪽 보리밭에 살고있는 뱀일 거야. 별별 생각을 다하며 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뱀은 대문쪽 텃밭에서 서서히 담장을 올라 담장을 타고 화장실 쪽으로 움직였다. 제발 화장실 안으로만 들어가지 말아다오. 빌고 또 빌었다. 텃밭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담장을 타고 올라가기를 반복하면서 뱀은 화장실 지붕에 이르렀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화장실 문을 열 수 없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담장을 오르락내리락 하던 뱀의 몸짓은 정말 아름다웠다. 뱀은 아름다운 몸짓을 가지고 있는 매혹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뱀에 대해서 나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뱀은 간사하고 간악하여 사람을 미혹하는 존재이고 돌을 던져 죽여야 하는 그런 대상이었다. 말하자면 혐오의 대상인 셈이다. 뱀을 혐오의 대상으로 보는 나의 선입견은 종교에서 비롯되었다. 경전 어느 귀퉁이에서 뱀에게 지혜를 배우라는 문구를 발견한 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뱀의 지혜는 머리에 남아있지 않고 뱀을 오직 혐오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뱀을 보면 돌을 던져대곤 했었다.

나에게 위협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레 겁을 먹고 위협을 예단하며 선제공격을 하는 인간의 행위는 정당하지 않다. 정당방위가 아닌 선제적 폭력인 것이다. 혐오의 이유는 종종 사후합리화이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혐오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혐오하고 나서 혐오하는 이유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길고양이에 대한 혐오가 대표적인 예이다.

몇 년 전 ‘나두 몰라’라는 블로거의 고백을 의미 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고양이 혐오자였다고 고백한 그는 자신이 고양이를 혐오하는 데는 합리적인 이유는 없었다고 인정한다. 고양이는 요물이다, 재수 없다, 무섭게 생겼다는 사람들의 편견을 그대로 답습해서 그냥 싫어했었다는 것이다. 그 블로거는 고양이를 직접 만나고 경험하게 된 이후 고양이 혐오자에서 길고양이를 돌봐주는 ‘캣맘’이 되었다.  선입견과 편견은 혐오를 조장하지만 경험은 배려를 낳는다.

김준표 제주동물친구들 감사
김준표 제주동물친구들 감사

동물에 대한 사회의 수준은 사회의 소수자와 인권을 대하는 데서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고양이에 대한 혐오든, 퀴어나 난민에 대한 혐오든 자신의 경험이 아닌 선입견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혐오하는 마음이 들거든 선입견을 내려놓고 직접 만나보라. 고양이를 마주하고 퀴어를 마주하고 난민을 마주하여 눈을 맞추고 귀를 기울여보라. 나의 이야기를 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혐오가 사라지고 배려가 싹틀 것이다.<김준표 제주동물친구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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