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아침. 지난 계절을 씻기는 양 시원한 바람이 청량감을 전해온다. 오래 떨어졌던 네 식구가 한 자리에 모인 즐거움이 이 가을 바람에 설렘을 보탠다. 차례를 마치고 맛난 거라도 내다줄까 싶어  딸들을 불러본다. 대답이 없다. 고양이가 “야옹” 하며 다가온다. 다 큰 딸들은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 있다. 애들에게 큰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그제서야 화들짝 놀란 큰딸이 대답한다. "우리 부른 거였어요? 하도 다정하게 부르길래 고양이 부르는 줄 알았지."

딸들은 종종 "다음 생애 태어나면 엄마의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고양이는 똥만 싸도 칭찬받는다면서. 생각해보니 딸의 말이 이해됨 직도 하다. 모래를 온 방안에 흩뿌려 놓는다거나 아끼는 화병을 깨뜨렸을 때에도 엄마라는 사람은 고양이에게는 늘 관대하다. 그 관대한 엄마가 뱀허물처럼 남겨진 딸아이 옷을 보면서는 길길이 날뛰니 아무리 성인이 된 딸이지만 이쯤 되면 고양이가 부러울 수도 있겠다 싶다.

잠시 왜 그런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반려’라는 단어를 떠올려본다. 나는 고양이와는 반려를 하면서도 딸아이와는 반려를 하고 있지 않는 것인가? 우리 가족들은 과연 '반려'하고 있을까? '반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본다. ‘생각이나 행동을 함께하는 짝이나 동무’라고 나와 있다. 반려자, 반려인이란 표현은 친근하면서도 자연스런 단어다. 배우자나 친구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반면 반려딸, 반려부모라는 단어는 쓰이지 않는다. 자녀나 부모 사이처럼 혈육으로 이어진 가족 사이에는 반려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이처럼 반려라는 말에는 피를 나누지 않은 존재, 나와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근래 반려라는 단어와 가장 많은 빈도로 어울려 쓰이는 말은 단연 반려동물이다. 나처럼 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그들과 반려생활을 하며 가족으로 살아간다. 부모 자식 사이처럼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은 아니지만 배우자처럼 인연으로 맺어진 가족 같은 개념인 셈이다. 나와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반려에는 인내와 노력이라는 숨겨진 가치가 필요한 법이다. 그걸 우리는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수많은 일상 속에서 하나씩 깨달아 간다. 

그러니 '나'와 다른 존재인 우리 집 고양이가 집안을 초토화시켜도 그저 헛웃음 한 번으로 넘길 수 있나보다. 그런데 딸들에게는 '나'와 다른 존재임을 잊고 거칠게 튀어나오는 말만큼이나 관대하지 못했나 보다. 추석에 만난 이모님이 말씀하신다. "자식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데 무슨 동물이야. 그래서 난 동물 안 키워." 키운다는 관점보다 반려한다는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어떨까. 자식을 키우려 하지 말고 반려하고, 동물을 키우려 하지 말고 반려하자. 생각과 뜻을 같이 하자. 단순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기쁨, 배고픔과 외로움까지  함께 느끼면 어떨까. 동물뿐만 아니라 피가 섞인 자녀나 부모와도 '반려'할 수 있다면.<김미성 제주동물친구들 대표>

김미성 제주동물친구들 대표
김미성 제주동물친구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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