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탕]“21세기 볼셰비키, 이 시대의 변혁 출발점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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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탕]“21세기 볼셰비키, 이 시대의 변혁 출발점 되고 싶다”
  • 조수진 기자
  • 승인 2019.10.10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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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기 목요일에 만나는 뜨겁고 내밀한 제주인 인터뷰-2
지난 8월30일 제주시 노형동 가장자리 농원에서 만난 박성인씨.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 8월30일 제주시 노형동 가장자리 농원에서 만난 박성인씨.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 8월30일 낮 제주시 노형동에 위치한 ‘가장자리 농원’. 눈앞에 다가온 가을에 밀려나는 게 서운한 듯 늦여름 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3천여평 정도 되는 밭 어귀엔 백구 한 마리가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는 기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농장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낌새를 알아채곤 짖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농원 주인 박성인(61)씨가 나와 기자를 맞았다. 

35년. 검질(‘김’의 제주어) 매는 게 가장 힘들다는 ‘초보’ 농부 박성인씨가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기간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절반 이상을 ‘노동’에 천착했다. 30년 전과 비교해 지금 한국 사회의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지금 우리 곁에서 어떤 이는 곡기를 끊어가며, 또 어떤 이는 감금에 가까운 경찰의 제지 속에서, 또 어떤 이는 끝이 잘 보이지도 않는 고공 철탑에 올라가며 우리 사회의 노동 민낯을 고발하고 있다. 박성인씨를 만나 대한민국 노동의 현주소를 물어봤다. 

◇“대학생활 1년, 답 찾을 수 없어 바로 노동현장으로”

1978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한 그는 딱 1년 동안 학교에 다녔다. 학과 수업도, 동아리 활동도 10대부터 품었던 삶에 대한 고민에 아무런 답을 주지 못했다. 대학 생활에 회의를 느낀 그는 바로 다음 해인 1979년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제대를 한 1982년. 비로소 박씨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게 된다. 

“그때는 기득권이었던 대학생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들을 버리고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서 민주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게 시대적 흐름이었어요. 군대를 제대하면서 민주화가 가장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판단했던 곳이 바로 노동현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복학 신청만 해놓고 바로 (노동)현장에 들어가게 됐죠.”

수많은 사회문제 중 왜 하필 ‘노동’이었냐고 묻자 그는 “노동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어떻게 한 사회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한 사회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게 노동이에요. 그런데 노동의 주체인 노동자는 70~80년대 특히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고통받았어요. 노동3권도 보장받지 못하고 공돌이, 공순이라 불리며 사회적으로 가장 천시당하는 존재였죠.”

그에게 있어 노동운동은 사회를 변혁하려는 시도이자 움직임이었다. 동시에 어릴 때부터 자신을 괴롭혀왔던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지난 8월30일 제주시 노형동 가장자리 농원에서 만난 박성인씨.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 8월30일 제주시 노형동 가장자리 농원에서 만난 박성인씨. (사진=김재훈 기자)

◇“4.3, 노동, 그리고 민주화…모두가 연결된 개념”

지난 35년 그리고 앞으로 그의 삶을 ‘노동’과 연결해준 계기는 바로 제주4·3이었다. 그는 제대 후 1년 가까이 제주에서 지냈다. 이 기간 그는 4·3을 통해 ‘민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됐다. 4·3 당시에 민중이 부당한 공권력과 미 군정에 맞서 싸운 정신과 80년대 민중인 노동자들이 부당한 자본권력에 맞서 싸운 정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친구인 김수열 시인과 걸어서 제주도를 한바퀴 돌며 4·3을 겪었던 동네 할머니들과 얘기도 많이 나누고 많이 깨닫게 됐습니다. 당시 항쟁하고 죽어갔던 이들의 정신을 지금 시대의 우리가 어떻게 되살려내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죠. 그게 바로 오늘날의 ‘노동운동’이라고 본 겁니다.”

‘노동’, ‘4·3’ 그리고 ‘민주화’, 이 모두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는 생각이 굳혀지자 그는 공개적으로 “노동운동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강연을 통해 “4·3의 진실은 딱 노동운동의 진전만큼만 밝혀진다”는 그의 믿음을 전하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감옥생활 3년9개월…치열하게 노동 공부했다”

박씨는 1986년 ‘다산보임사건(이념서적을 일본 등에서 들여와 운동권 학생들과 노동자들에게 의식화 학습을 한 혐의로 출판기획사 다산·보임 관계자들을 구속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 등을 적용해 실형을 선고한 사건)’으로 1년 6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당시 그는 노동운동에 대해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부터, 현장인 밑에서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기 시작했다. 출소한 후엔 공사현장의 일용직 노동자, 하청업 노동자 등으로 일하며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펼쳤다. 

1991년엔 제파PD(반제반파쇼민중민주주의·소련의 현실사회주의와 북한의 주체사상을 모두 억압적인 사상이라 비판하며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등장하는 자본주의가 해소된 사회를 추구할 것을 주장한 계열) 그룹에서 활동하다 다시 국가보안법 혐의로 붙잡혀 2년3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지난 8월30일 제주시 노형동 가장자리 농원에서 만난 박성인씨.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 8월30일 제주시 노형동 가장자리 농원에서 만난 박성인씨. (사진=김재훈 기자)

그리고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를 목도했다. 박씨에게 이 시기는 ‘끝’이라는 충격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는 전환점이었다. 

“그때 같이 운동하던 사람들 많은 경우가 절망해서 전향하기도 했죠. 그 사람들에겐 세계사적으로 희망이 무너진 거예요. 근데 전 충격을 덜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80년대 공부할 때 소련을 모델로 보고 한 게 아니고 한국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했거든요. 징역 살면서 현실사회주의가 왜 패배했는지, 근원적으로 공부하고 접근을 했죠.”

◇“노동은 인간 그 자체…자신이 할 일 자신이 결정하는 ‘노동의 해방’ 추구해야”

박씨는 노동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말한다. 하나는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해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 그 자체’다. 

그는 “노동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실현시키는 역할을 한다. 끊임없는 노동을 통해 인간이 지금의 인간으로 발전하고 변화한 것”이라며 “노동이 인간 그 자체라는 점에서 자신이 할 일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노동의 인간화’ 또는 ‘노동의 해방’”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보통 사람들이 ‘노동은 힘들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물리적으로 힘든 일일 때이고 다른 경우는 남이 시켜서 억지로 해야 하거나 노동의 대가를 온전히 받지 못할 때”라며 “전자는 과학기술이나 기계 발명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지만 후자는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인류 역사가 발전하려면 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가사 등 ‘필요노동’에 들어가는 노동력은 줄여가고 줄인 만큼 사람들이 예술이나 취미활동과 같은 자유로운 노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과학기술 등의 발전이 이뤄지면서 ‘필요노동’에 투입되는 절대적인 노동시간이 줄어듦에 따라 자연히 사회 구성원 모두의 노동시간은 단축돼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이런 모순 현상의 원인이 ‘계급의 양극화’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층은 자신의 24시간을 필요노동에 쓸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고소득층의 24시간은 어떤가요? 계급 간의 문제가 여기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이 시대의 필요노동과 자유노동이 어떻게 분배되고 배치되는지를 보면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이 어디쯤 있는지 볼 수 있죠.” 

지난 8월30일 제주시 노형동 가장자리 농원에서 만난 박성인씨. (사진=김재훈 기자)
지난 8월30일 제주시 노형동 가장자리 농원에서 만난 박성인씨. (사진=김재훈 기자)

◇“절차적 민주주의만 강조…가장 중요한 사회경제 민주주의는 후퇴”

박성인씨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사회경제 민주주의의 후퇴를 꼽는다. 일상과 노동현장에서의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았는데 ‘절차적 민주주의’만을 강조하면서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80년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를 외치면서 선거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만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386세대’ 대부분이 민주화 문제를 그저 정권 교체 정도로만 생각한 거죠. 정권이 바뀌면서 민주주의가 정착했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사회경제 민주주의는 오히려 후퇴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회경제 민주주의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한국 사회에서의 노동자의 위치도 변방으로 밀려났다. 노동자 간 연대도 점차 균열되기 시작했다.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파업과 노동조합 결성 등을 통해 임금 인상과 노동 환경 개선을 이뤄냈죠. 당시엔 대기업 노동자들이 싸워서 임금 인상을 얻어내면 전체 노동자의 임금 인상으로 이어졌어요. 그때까진 조직된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노동자 연결고리, 97년 IMF 이후 깨져”

노동자들을 연결하는 고리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깨지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정리해고제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정리해고라는 게 생기니까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등으로 노동자 계층이 나눠지면서 소수의 노동자가 전체의 노동자를 대변하는 선순환 구조가 차단된 거죠. 자본이라는 지배세력이 집요하게 갈라놓았습니다. 그리고 노동계에선 노동자를 온전하게 하나로 묶는 시도를 하긴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고요.”

그는 한국 사회 노동운동의 한계로 적절한 전략과 주체의 부재를 꼽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운동이 민주화의 일부로 시작됐다가 민주화 문제로만 그친 것이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비롯한 한계들이 오늘날 노동의 위기로 표현된다. 

박성인씨가 지난 5일 제주시청 앞에서 열린 '그대로가 아름다워, 필요어수다! 양' 문화제에 함께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박성인씨가 지난 5일 제주시청 앞에서 열린 '그대로가 아름다워, 필요어수다! 양' 문화제에 함께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노동운동은 민주화를 위한 싸움인 동시에 노사 간 계급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자본에 맞선 싸움이 돼야 합니다. 한국은 90년대 초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반자본주의 전략을 미처 마련 못 했다고 봅니다. 주체도 없었고요.  그 상황에서 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다 흔들려버린 거죠. 경제 위기는 노동자에 대한 공세가 가장 심해지는 시기거든요.”

그는 노동자끼리 서로 공격하는 구조를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일례로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를 ‘귀족 노조’라 일컫는 태도를 지적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회사에 쌓아둔 사내유보금이 엄청 납니다. 또 금융소득자 등 불로소득자가 굉장히 많고 재벌이나 오너들의 연봉이 노동자에 비해 지나치게 높죠. 이런 부분에 대해선 침묵하면서 대기업 노조가 파업을 하면 ‘귀족노조’라며 노동자가 노동자를 공격하기 바쁘죠. 이런 구조를 더 이상 용인해선 안 됩니다.”

◇“노동, 결국 정치의 문제”

박성인씨는 바로 지금이 우리 사회 노동운동의 위기라면서도 새로운 전환기이자 새로운 주체를 형성해야 하는 시기라고 강조한다. 80년대 이후 노동현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는 이미 마련됐다. 노동3권도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노동조합 조직율은 10%에 불과하다. 특히 계약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은 먼 얘기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실패를 거듭해온 노동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선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그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90년대 말에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국회의원으로 진출하는 시도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죠. 지금은 이른바 진보정당이라 불리는 정치세력의 영향력이 가장 약화돼 있기도 하죠. 하지만 노동자들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끊임없이 시도해야 합니다. 이게 지금 시기의 가장 관건이라 봅니다.”

지난달 8일 제주시 연동 농어업인회관 앞에서 열린 농민장터에서 박성인씨가 자신이 재배한 농작물을 판매하고 있다. 장터는 매주 일요일 오후에 열린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달 8일 제주시 연동 농어업인회관 앞에서 열린 농민장터에서 박성인씨가 자신이 재배한 농작물을 판매하고 있다. 장터는 매주 일요일 오후에 열린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30년은 노동, 앞으로 30년은? 아직 고민 중”

30년이 넘도록 박성인씨를 붙잡은 것은 ‘노동’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30년간 그의 삶은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까. 

“물론 농사를 잘 짓는 게 가장 중요하죠. (웃음) 지금 가장 고민하는 건 앞으로 최소 30년 내가 붙잡고 가야할 게 무엇인지입니다. 방향이 잡히면 지난 30년 그랬듯 전력을 다해서 또 30년을 갈 겁니다. 그중 하나가 자연재배 농사 원리를 정리하고 교육하는 일, 또 다른 하나는 제주의 미래를 위한 정책 이론과 전략을 개발하는 일입니다.”

그에겐 30년 이후에 불리고 싶은 별명이 있다. 21세기 볼셰비키. 

“지난번 서승 교수가 제주에서 북콘서트를 열었는데 뒷풀이 자리에서 나를 소개할 때 ‘이 시대 마지막 볼셰비키’라고 하더군요. 웃고 넘어가긴 했는데… 문득 30년 이후에 21세기의 볼셰비키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말하는 역할이 되고 싶거든요. 환갑이 넘은 지금도 변화의 출발점이 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박성인,

1959년 제주 출생.
1978년 연세대 사회학과입학.
1982년 제주 학습모임 참여.
1983년 다산보임그룹 참여.
1986년 다산보임사건으로 구속.
1988년 울산지역 노동현장 취업.
1989~1990년 울산노동조합협의회 준비위 간사.
1991년 제파PD사건 구속.
1995~2007년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정책위원장·부소장·소장)
1999~2008년 노동자의 힘(기관지위원장·대표)
2009년 사회주의노동자당건설준비위원회 강령위원장.
2010년~ 사회주의노동자계급정당준비위원회 중앙위원.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2- 학출활동가의 삶의 이야기, 유경순> 참조

박성인의 '나의 삶과 사상에 영향을 끼친 10인'

1.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독일 출신 신학자;1906~1945)
2. 시몬 베유(Simone Weil·프랑스 출신 사상가;1909~1943)
3.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독일 출신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경제학자;1818~1883)
4. 엥겔스(Friedrich Engels·독일 출신 철학자;1820~1895)
5. 레닌(Vladimir Il'ich Lenin·러시아 출신 혁명가이자 소련 초대 국가 지도자;1870~1924)
6.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폴란드 출신 사회주의 이론가;1871~1919)
7. 체 게바라(Che Guevara·아르헨티나 출신 혁명가;1928~1967)
8.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네덜란드 출신 철학자;1632~1677)
9.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미국 출신 경제학자이자 평화주의자;1883~1983)
10. 이반 일리치(Ivan Illich·오스트리아 출신 신학자이자 철학자;1926~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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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김진웅 2019-10-30 09:45:17
잘 읽었습니다. 내밀한 인터뷰의 전형. 정성스런 글쓰기. 건필에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금욕탕 2019-10-11 14:04:53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