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보다 가슴이 먼저여야 한다고 배운 적이 없다. 가슴보다 머리가 먼저라고 배웠다. 그렇다. 책상머리 가르침과 배움은 늘 머리가 먼저였고, 되돌아보는 현실의 경험은 거의 가슴이 먼저였다. 사랑이든 싸움이든 머리로 시작하면 끝없는 문제로 이어지지만, 가슴으로 시작하면 결국 문제의 끝이 보인다.

반려자는 인생을 함께 하는 우리에서 나의 나머지를 의미한다. 오랜 시간 부부를 가르키는 말이었다. 어느날 페이스북에서 어떤 친구(여자)가 자신의 동거인(남자)을 반려동물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았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살짝 충격이었다. 하지만 점점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감하고 동의하게 되었다. 반려동물인 것이다. 우리에게 반려동물이란, 사람이든, 개와 고양이이든, 새나 돌고래이든, 모두 가능한 말이다. 요즘에는 반려식물이라는 말도 사용되고 있으니, 우리에게 반려자는 이제 사람과 동물을 동물과 식물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함께 살아가는 일, 서로에게 반려자로 삶의 시간과 공간을 나누는 일은 사랑으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싸워야 가능한 일이다. 싸우지 않고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나눌 수 있겠는가? 배려의 시작이 불편의 인식에 있는 것처럼, 반려의 시작은 싸움의 경험에 있다. 머리로는 이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 경험해보아야 가슴으로 이해가 될 일이다.

반려자를 넘어 공동체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가 아니기에, 서로 다른 나의 함께 함이기에, 서로 다른 우리들의 더 큰 우리이기에, 반려생활의 불편과 싸움에서 배려가 시작되고 타협이 가능하듯, 그렇게 삶의 시간과 공간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부딪치고 있는 광장의 싸움을 걱정하는 글들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며, 어서 이를 해결하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리 해야 한다거나 저리 해야 한다거나 훈수를 두는 글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저리 싸워본 적이 있었던가. 일방이 아닌 함께 나눔의 반려가 시작되지 못했던 것은 저런 싸움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저리 시끄럽게 싸워보지 않았기에 타협도 협상도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승리와 패배로 장식되는 싸움이 아니라 결국 서로가 자신의 상처를 문지르며 상대의 상처가 눈에 들어오려면 저리 싸우고나서야 하능하지 않을까. 이제 이 나라에도 반려가 시작되려나보다.

김준표 제주동물친구들 감사
김준표 제주동물친구들 감사

반려동물과 시간과 공간을 나누는 이들이 생겨나면서부터, 우리는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시작하는 사랑을 알게 되었다. 반려동물과 시공간을 함께 나누면서, 머리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서로 불편해져서 으르렁대는 일을 경험하였고 양보와 타협을 통해 서로를 배려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 모두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배우게 된 것들이다. 일방적인 배려는 오랜 반려를 보장할 수 없다. 그러니 함께 오래오래 살아가려거든 쌍방의 배려를 위해 서로 사랑하는 만큼 싸울 일이다.<김준표 제주동물친구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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